592화 모두 제 잘못이죠
"엄마야, 남 대교주는 정말 무서워."
소육자는 손을 들어 이마의 식은땀을 닦았다. 손을 놓자마자 여위고 바싹 마른 노인이 커다란 의료함을 메고 힘들게 산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사의 문수(文修)?"
소육자는 갑자기 얼굴색이 싸늘해지더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검을 빼들고 상대방을 가리켰다.
"경고한다! 당장 나가라. 그렇지 않으면 이 남육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젊은이가 날 아나? 그것참 잘됐군. 자, 자, 젊은이가 와서 도와줘. 이 의료함이 너무 무거우니 날 도와 들어다 줘."
사의는 등 뒤에 멘 의료함을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열정적으로 소육자에게 인사했다. 마치 그의 손에 든 검이 보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소육자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더니 갑자기 눈이 풀리면서 멍하니 사의에게로 걸어갔다.
수횡천이 나왔을 때 소육자는 두 눈이 넋이 나간 채 멍하니 사의에게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즉시 엄한 소리로 외쳤다.
"소육자!"
소육자는 잠깐 멍하게 있더니 곧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저도 모르게 뜰 가운데까지 걸어간 것을 발견하고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 억울한 듯이 수횡천에게 고자질했다.
"맹주, 사의 문수가 사술(邪術)로 저를 현혹했습니다."
"빌어먹을!"
수횡천은 차가운 얼굴로 앞으로 다가가더니 소육자의 손에서 검을 받아 사의를 냅다 찔렀다.
사의는 깜짝 놀라 곧바로 커다란 의료함을 둘러메고 날듯이 밖으로 달아났다.
"농담입니다! 농담이에요! 수 맹주 화내지 마십시오. 제발 화내지 마십시오. 늙은 것이 어린애를 놀린 것뿐입니다. 이 늙은 것은 절대로 악의가 없습니다. 수 맹주…… 어이쿠…… 오해입니다. 오해라고요. 수 맹주!"
수횡천은 쫓아나갔다.
소육자는 잠깐 망설이며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육 대장군, 남 대교주의 위압감을 떠올리자 흠칫 떨고는 역시 뛰쳐나갔다.
상대할 수 없으면 피하면 된다.
산장 편원, 월령안은 등나무 밑에 앉아 있었다. 다리에는 흰 털로 된 양탄자를 덮고 있었다.
등나무는 산장 안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식물이었다. 수횡천이 세심하게 보살핀 덕분에 보랏빛 등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줄기줄기 뻗어 내린 등꽃은 마치 보랏빛의 풍경과 같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바람이 불자 보라색 작은 꽃이 바람에 흔들리며 마치 보랏빛 바다처럼 나무 밑에 병약한 미인의 청아함과 아름다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육장봉은 들어서자마자 등나무 아래에 조용히 앉아 있는 월령안을 보았다. 그녀는 얼굴빛이 창백하여 검은 눈동자로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도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평온하기만 할 뿐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육장봉은 살기를 띠고 들어왔다. 하지만 들어서는 찰나 온몸의 살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제자리에 서서 월령안과 서로 마주 보았다.
육장봉은 그녀의 깡마른 볼과 하얗게 바랜 입술을 보고 가볍게 탄식하고 말았다.
그는 월령안 앞에 다가가 귀신 가면을 벗어 그녀의 무릎에 올려놓았다.
"월령안, 당신은 나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소!"
월령안은 잠깐 멍해 있다가 다리 위 가면을 보고 웃었다.
"맞아요. 전 당신한테 물어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시집간 삼 년 동안 저는 때때로 당신의 생사조차도 몰랐어요. 그런 제가 어찌 당신에게 천목신교의 교주가 맞느냐고 물을 수 있겠나요?"
월령안은 무릎 위의 귀신 가면을 부여잡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제가 물어본 적이 없어서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당신은 아무것도 필요 없었어요. 제 도움도 필요 없고, 제가 당신을 위해 고민할 필요도 없었죠. 하지만 당신은 한 번도, 한마디도 저에게 말하지 않았어요. 그저 제가 광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구경했죠.
제가 묻지 않아서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군요. 저를 미워하고 제가 필요 없으면서도 말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이혼하는 것도 사전에 한마디 말도 없었어요. 당신은 마치 높이 군림하는 신처럼 차가운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았어요. 제가 살려고 발 버둥치는 것을 바라보면서 당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고도 맨 나중에…… 왜 물어보지 않았냐고 하는군요."
"하지만 육장봉 당신은 제가 어떻게 묻길 바라나요? 제가 당신에게 보낸 편지, 삼 년 동안에 백 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건만 당신은 한 통도 보지 않았고 또 한 번도 답장한 적이 없었어요. 당신은 제가 물어본 적이 없다고 말하죠. 맞아요. 제가 물어보지 않았어요. 그래서 모두 제 잘못이죠. 당신에게 속임을 당해도, 웃음거리가 되어도, 삼 년을 헛되이 보내도 모두 마땅하죠!"
팍!
월령안은 손에 든 귀신 가면을 냅다 던져 버렸다.
그녀는 괴로웠다. 정말로 괴로웠다.
월령안은 가슴이 따끔따끔 아플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서 말하지 못할 분노와 불만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육장봉을 탓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은 그녀에게 말해 줄 책임이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멍청하게 스스로 망신을 자초한 것이다.
삼 년간 헛수고를 하고, 괜히 불안에 떨고 괜히 마음을 졸이며 필요 없는 노력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성은 이성이고 감정은 감정이다.
월령안은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평온한 눈빛, 담담한 표정에 아무 감정 기복도 없는 육장봉을 바라보면서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육장봉의 평온한 얼굴을 철저히 찢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육장봉에게 터뜨리는 것은 옳지 않았다.
월령안은 가까스로 울분을 억눌렀다. 그녀는 육장봉을 콱 밀치고 이를 갈며 말했다.
"육장봉, 비키세요. 꼴도 보기 싫어요!"
육장봉은 상체만 조금 흔들릴 뿐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화가 더 치밀어 다시 한번 육장봉을 밀어내었다.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요. 들리지 않나요? 육장봉! 저는 지금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요. 혼자서 생각하며 감정을 가라앉히고 싶다고요. 당신은 왜 왔어요? 저를 조롱하려고 오셨나요?"
"아니오."
육장봉은 월령안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아니면 왜 왔냐고요? 위로해 주려고? 전 필요 없어요."
월령안은 힘껏 자신의 손을 빼내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면서 억지로 냉정을 되찾으려 했다.
"육장봉, 저 월령안은 그렇게 연약하지 않아요. 이만한 일로 속상해하고 슬퍼하지는 않아요. 당신의 위로가 필요 없으니 이젠 가셔도 돼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는 또다시 육장봉을 밀쳤다. 이번에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밀쳤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힘을 과대평가하고 육장봉도 과소평가했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밀쳤지만 육장봉은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육장봉이 가볍게 잡아당기자 의자에서 그의 품에 떨어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육장봉의 가슴에 부딪쳤다. 콧등이 시큰하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육장봉!"
월령안은 화가 나서 크게 외쳤다. 힘껏 밀쳐 내며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 밖으로 육장봉은 땅바닥에 앉더니 어린애를 안듯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가볍게 그녀의 등을 다독이며 잠긴 목소리로 낮게 한마디 했다.
"여기 있소."
"이것 좀 풀어 주세요."
월령안은 한참을 버둥거렸다. 하지만 숨이 가쁜 것 말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화가 나서 육장봉을 확 물어뜯고 싶었다.
'육장봉은 자신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모른단 말인가. 나를 숨 막혀 죽게 하고 내 재산을 물려받으려는 건 아니겠지!'
"안 풀어 줄 거요."
육장봉은 월령안을 더욱 꼭 끌어안았다. 월령안은 너무 조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행히 육장봉은 월령안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한 것을 알아채고 그녀가 편히 숨 쉴 수 있게 팔을 살짝 풀었다.
월령안은 다시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되자 드디어 살 것 같았다.
그녀는 숨을 고르고서 아직 육장봉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입을 열어 육장봉더러 손을 풀라고 말하려 했다. 이때 육장봉의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령안, 알고 있소? 주나라의 황제는 문관을 죽이지 않고 무장을 죽이기를 좋아한다오."
월령안은 순간 멍해져 가만히 있었다.
육장봉은 말을 이어 갔다.
"당신 옆에 있는 서 아저씨는 서 원수부 출신이오. 그분은 서 원수부의 막내도련님으로 한때 황자의 반독(伴讀)이었으며 무척이나 잘나갔지. 육씨 가문이 급부상하기 전에 서씨 가문이야말로 무장 중 일인자로 막강한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소. 북요를 막아내는 데도 서씨 가문에서 가장 많은 힘을 기울였다오. 서씨 가문에서 주나라의 강산의 절반을 지켰다고 말할 수도 있소."
월령안은 몸부림치는 것도 잊고 다시 침묵했다.
육장봉은 월령안이 진정되자 계속하여 말했다.
"그해, 고종 황제가 친히 정벌에 나섰다오. 서 원수는 극력 막으려 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소. 하는 수 없이 함께 정벌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오. 고종 황제는 참패하고 수십만 명의 병사가 전사했소. 또한 고종 황제는 하마터면 사로잡힐 뻔했다오.
고종 황제는 돌아온 뒤 문책하기 시작했소. 참패 원인을 모두 서 원수에게 뒤집어씌웠지. 게다가 결정적인 시각에 서 원수는 성만 지키고 고종 황제를 구조하지 않아 고종 황제가 하마터면 사로잡힐 뻔하게 되었다오. 고종 황제는 서 원수에게 극도로 불만을 품었소. 서 원수가 반역을 꾀할 야심이 있다고 여긴 것이오."
"변경에 돌아온 뒤 고종 황제는 조정 신하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서 원수부 가문의 구성원 전체를 투옥시켰소.
서 원수와 가문의 성인 남자들은 모두 처단되고 가족은 영남(嶺南)에 유배되었지. 그리고 사면받지 못하며 영원히 돌아오지도 못하게 했소."
"물론 그때 척결된 것은 서 원수부뿐이 아니었소. 서 원수가 발탁한 무장들은 그 후 몇 년 동안 일일이 박해를 받아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소."
육장봉은 여기까지 말하고서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때문에 월령안의 마음도 같이 긴장해졌다.
곧이어 육장봉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월령안, 주나라에서 문관은 설령 부정부패하든, 자리만 차지하고 국록을 축내든,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든 모두 상관없다오. 황제는 문관을 죽이지 않거든. 기껏해야 면직시키면 끝이오. 하지만 무장은 안 되오. 주나라에서 무장의 칠 할 이상은 모두 전장에서 죽지 않고 황제의 손에 죽었다오. 그러니 조정의 무장들은 직위가 얼마나 높든, 권력이 얼마나 크든 상관없이 모두 몸을 사리고 처세한다오.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낮추기를 원하오. 나는……."
육장봉은 잠깐 뜸을 들이고는 자조적으로 말했다.
"월령안, 당신도 알고 있잖소. 내 어머니는 공주요. 나도 절반은 황실 종친이라고 할 수 있지. 폐하께서 나를 믿고 중용하지만 나 역시 어쩔 수 없다오."
어쩔 수 없이 황제를 신임하지 않고 경계하며 뒷손을 남겨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