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화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니에요
사흘 밤낮이 아닐 수도 있었다. 월령안은 두 사람이 열흘 밤낮을 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강호인들은 마치 직접 보기라도 한 듯이 생생하게 말했다. 그 바람에 그녀는 자신이 그들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건 아닌지 한동안 의심했었다.
마차가 황금당의 손에 들어간 시간을 따져도 열흘이 채 되지 않았다.
만약 남상권이 마차를 얻기 위해 황금당을 찾아갔다면 어떻게 계산해도 열흘 밤낮을 싸울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남상권과 황금당 당주가 접전하게 된 원인인 마차가 월령안의 것이었다.
남들은 이 사실을 모르지만 황금당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천목신교가 그 마차를 마음에 들어 했다면 그들도 그녀의 것임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황금당의 사람들은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변이 없는 한, 그녀가 청주에 나타나면 천목신교도 역시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마차를 소유하지 못해 불만을 가진 거물들이 그녀한테 화풀이를 하는 건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약소하고 가련하며 무기력할 뿐이었다.
월령안은 가는 내내 벌벌 떨면서 조끼를 꼭꼭 여몄다. 누군가 그녀가 바로 전설 속 두 거물이 접전하게 된 원인인 천 년 된 유창목 마차의 원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 두려웠다.
월령안은 가는 길에 조심스럽게 행동하다가 무림맹에 도착해서야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수횡천의 세력 범위 내이고, 그의 무림맹이 그녀를 보호하기에 그녀가 강호에서 제멋대로 할 정도는 아니어도 마음 편하게 행동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월령안은 무림맹의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부잣집 도련님처럼 소탈하고 풍류스러운 모습을 선보였다.
하지만 가면 갈수록 그녀는 수상함을 느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한여름인데도 그녀는 어쩐지 추워서 흠칫 떨고 말았다.
결국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한쪽에 있는 소육자에게 물었다.
"소육자, 우리가 길을 잘못 들어선 거 아닌가요. 이 길이 무림맹으로 가는 길 맞나요? 허허벌판에 있는 외딴 묘지를 찾아가는 건 아닌가요? 가는 내내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풀도 한 포기 보이지 않네요. 당신들의 무림맹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요? 무덤만 가득한 공동묘지 같은 곳은 아니겠죠?"
그녀는 자신이 속은 것 같기만 했다.
이런 비루먹을 곳에 어떻게 무림맹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돈은 또 어떻게 번단 말인가.
월령안은 오는 내내 긴장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무림맹 지역에 발을 들여놓은 다음부터 소육자가 거의 쪼그라들다시피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때 월령안이 묻자 소육자는 더는 피하지 못하고 겨우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안 도련님, 길을 잘못 들어선 게 아니에요. 이게 바로 무림맹으로 가는 길이죠. 보세요. 앞쪽에 경계비가 있잖아요."
월령안은 소육자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흙 속에 묻혀 있는 반 토막 된 돌비석이 보였다.
비석은 누런 흙으로 덮여 있었다. 소육자가 가리키지 않았다면 월령안은 그것이 비석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돌비석으로 위에는 글이 아닌, 흙만 볼 수 있었다.
월령안은 묵묵히 소육자를 힐끗 바라보았다. 눈에는 성토로 가득 차 있었다.
소육자는 속이 찝찝하여 감히 월령안을 보지 못했다.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려 돌비석으로 걸어갔다.
소육자는 돌비석을 발로 차서 그 위의 누런 흙을 털어 버리고 다시 비석을 가리키며 월령안에게 소개했다.
"월…… 안 도련님, 이거 보세요. '맹(盟)' 자, 무림맹의 '맹' 자."
돌비석은 반 토막뿐이었다. '맹' 자 하나만이 남아 있어 궁상맞기 그지없었다.
월령안은 말을 채찍질하여 다가와서 비석을 보았다. 한참을 침묵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무림맹은 쭉 이런 모습이었어요?"
"그런 것 같아요."
소육자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난감해하며 말했다.
아무튼 그가 처음 보았을 때부터 무림맹은 줄곧 이 모양이었다.
월령안은 땅이 커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장사를 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돈 버는 능력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이 비루먹을 곳에 돈을 얼마나 처넣어야 사람을 불러들여 돈을 쓰게 할 수 있는 무림 마을을 지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당황스러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월 누님, 후회하시는 건 아니겠죠?"
소육자는 옷자락을 비비 꼬며 불안한 듯이 물었다.
'월 누님이 후회하면, 이제 우리 무림맹은 희망이 없는 건가?'
월령안은 소육자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물었다.
"수 오라버니는 어디에 살고 있어요?"
지금은 그녀가 후회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후회할 수 없었다.
소육자는 월령안이 수횡천을 찾자 금세 기뻐했다. 조금만 늦으면 그녀가 가지 않겠다고 할까 걱정되어 얼른 말했다.
"월 누님, 수 맹주는 무림산장에 있어요. 앞쪽 저 길에서 한 번만 꺾으면 금방 도착해요! 멀지 않아요. 말을 타고 가면 반 시진이면 갈 수 있어요."
월령안은 피식 웃었다.
"장소가 제법 크네요. 갑시다."
그녀는 이미 수횡천과 같은 배에 올랐다. 이제 더 어찌할 수는 없었다.
문제가 있더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방금 천목신교와 황금당 양쪽 거물들의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두 거물들이 그녀에게 앙심을 품든 안 품든 그녀는 모두 무림맹이라는 이 보호자가 필요했다.
어쨌든 무림의 각 대문파들을 호령할 수 있는 무림맹이다. 경영을 잘하면 큰 도움이 될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월령안은 기분이 얼마간 좋아졌다. 반 시진 동안 누런 흙먼지를 들이마시게 되어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림맹의 길은 온통 누런 흙뿐이고 풀이라고는 한 포기도 없었다. 말이 달리자 누런 흙먼지가 휘날렸다.
월령안의 몸에 걸친 하늘색 옷은 곧 원래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졌다. 얼굴에도 먼지가 두껍게 씌우다 보니 풍류적인 협객 기질은 고사하고 사람의 모습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월령안은 멀리 낡고 허름한 큰 마당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마침내 도착했군!'
너무나 험난한 길이었다.
월령안은 말을 몰아 저택 앞에 이르렀다.
그녀는 얼른 말에서 내려 흙먼지를 털어내고는 다시 탄식했다.
"화본이 저를 속였군요. 무슨 백의 협객 같은 소리. 강호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구나. 수 오라버니가 왜서 항상 회색 낡은 옷을 입고 다니는지를 이제 알 것 같아요. 이 강호의 길은 그냥 옷을 버리게 만드는군요."
"헤헤, 강호의 길은 걷기 힘들어요. 월 누님, 저도 변경에 한 번 다녀와 보니 이제야 알겠어요."
소육자는 말 등에서 뛰어내려 대수롭지 않게 얼굴을 한 번 쓱 훔쳤다.
"정말로 힘들군요……. 저는 줄곧 강호 협객이 출타하면 여아홍 한 항아리에 쇠고기 두 근을 지니고 다니는 줄 알았어요. 이제 보니 당신네 강호인들은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쇠고기를 먹지도 못하겠군요. 우리 장사하러 다니는 상단보다도 못하네요. 상단은 비록 힘들지만 그래도 먹는 건 제대로 먹거든요."
월령안은 물주머니를 열고 물 한 모금을 벌컥 들이켰다. 이제야 그나마 살 것 같았다.
'너무 힘들어!'
이 길이 사막을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녀는 무언가로 얼굴을 감쌌을 것이다. 이 무슨 풍류스럽고 방자한 협객의 모습으로 겉치레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본(話本 - 옛날에 성행하던 생활상이나 역사적인 설화의 대본)이 사람을 잡은 것이었다.
"월 누님, 누님께서 그렇게 얘기하시니까 저도 무술을 그만두고 장사를 하고 싶어요."
소육자가 가련하게 말했다. 더하여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어서 보건대 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곧 그렇게 될 거예요."
월령안은 소육자를 다독이며 어서 가서 문을 두드리라고 했다.
"월 누님, 너무 생각이 많으시네요. 수 맹주의 집은 문을 잠글 필요가 없어요."
소육자가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며 말했다.
"월 누님, 우리 먼저 들어갑시다. 맹주께서는 지금쯤 아마 뒷산에서 물고기를 잡고 계실 거예요. 이곳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요. 식량이 다 떨어지면 뒷산 연못에 있는 물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어요. 좀 있다 드셔 보세요. 뒷산에 있는 그 생선은 매일 먹으면 지겹지만 가끔 먹으면 맛이 무척 좋아요."
소육자는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붙임성 있게 월령안을 접대했다.
"안 도련님이라 부르라고 했잖아요. 몇 번을 상기시켜 드려야 해요."
월령안은 소육자를 따라 들어갔다. 산장 내 벽면이 얼룩지고 들보가 말라서 갈라진 것을 보아도 전혀 놀랍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보살의 마음이 되었다. 수횡천의 이곳이 얼마나 허름해도 그녀는 다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나마 산장 안은 허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상한 냄새도, 먼지와 흙도 없었다.
"월…… 아니, 안 도련님. 먼저 앉아 있으세요. 제가 가서 목욕물을 덥힐게요."
소육자는 월령안에게 앉으라고 하고는 이리저리 서둘러 정리했다. 그녀가 도와주려 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남이 알면 웃을 일이었다. 어쨌든 그도 반 정도는 주인이라 할 수 있는데 손님더러 일하게 할 수는 없었다.
산장 안에는 물이 있었다. 소육자는 물을 덥혀 월령안에게 가져다주었다.
월령안은 온몸이 먼지투성이라 소육자에게 예의를 차리지 않고 깨끗한 옷을 들고 가서 목욕했다.
그녀가 나왔을 때, 짧은 마고자를 입은 수횡천이 뒤뜰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수 오라버니."
월령안은 수횡천을 보자 기쁨이 차올랐다.
예전에 수횡천은 말없이 떠나갔다. 육장봉은 온몸에 상처를 입고 돌아와서 수횡천과 겨뤘다고 했다. 월령안이 수횡천을 얼마나 걱정했는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월령안은 육장봉의 재간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의 부상이 워낙 심한데 과연 수횡천이라고 얼마나 나을까.
육장봉은 경성에 있고 또 손불사 신의까지 옆에 두고 있었다. 그녀는 육장봉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수횡천은 옆에 신의도, 돈도 없었다. 그녀는 정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서 아저씨가 비록 그녀에게 수횡천이 생명의 위험이 없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지만 직접 보지 못하면 그녀는 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늘 수횡천이 길가에 쓰려져서는 치료받을 돈이 없어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가난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돈이 없는 나날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 그녀는 각지를 돌아다니며 가난 때문에 목숨을 포기하는 일들을 수도 없이 보아 왔다.
지금 수횡천이 멀쩡한 것을 보고서야 그녀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월령안, 수횡천과 소육자의 점심은 생선을 넣고 끓인 국과 건빵이었다.
별수 없었다. 무림산장에는 따로 먹을 음식이 없었다. 수횡천이 전에 사온 쌀가루도 다 떨어지고 생선밖에 먹을 게 없었다.
생선국은 수횡천이 끓였는데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월령안은 만족스럽게 먹고 나서 수횡천의 요리 솜씨가 요리사와 비견된다고 연신 칭찬했다.
수횡천이 미처 겸손을 떨기도 전에 소육자가 매정하게 폭로했다.
"이건 맹주의 솜씨가 좋은 게 아니라 생선이 좋은 거예요. 그냥 물에 던져 넣어 푹 끓이면 이 맛이거든요. 잘못될 리가 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