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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89)화 (589/1,004)

589화 우리가 죽었다고 하면 죽은 것

노인은 비웃듯이 피식 웃더니 곧 담담하게 말했다.

"폐하, 신은 황성사에 가서 일을 보아야 합니다. 폐하께서 신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황제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노인은 내관에게 바퀴 의자를 밀라고 눈짓했다. 앞으로 밀어 황제 옆을 돌아가라고 했다.

황제는 신속히 한 걸음 움직여 다시 한번 노인을 가로막았다.

"황숙, 알려 주세요. 월령안은 도대체 진짜로 죽은 겁니까 아니면 가짜로 죽은 겁니까?"

"폐하, 너무 흥분하셨군요. 그 애가 진짜로 죽었든, 가짜로 죽었든 그게 어째서 폐하께 중요한 일입니까?"

노인의 혼탁하고 어두침침한 눈동자에 빛이 반짝였다. 마치 예리한 섬광처럼 황제의 속마음을 꿰뚫는 듯했다.

눈길이 마주치는 찰나 황제는 왠지 속이 켕기는 감이 들어 기가 꺾인 채로 말했다.

"청주……."

"월 삼낭이 있잖습니까."

노인은 냉랭하게 황제를 바라보았다. 갖은 풍파를 겪었지만 여전히 예리한 눈동자는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황제는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내밀한 생각을 염 황숙에게 들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제는 난처해하며 얼굴을 돌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월령안이 부리기가 더 좋습니다. 짐은 월령안을 더 믿습니다."

노인은 낮은 소리로 웃고는 비웃듯이 말했다.

"폐하, 조상의 유훈을 기억하십시오. 월씨 가문 여자들은 독이 있습니다. 절대, 절대로…… 월씨 가문 여인을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짐은 아닙니다."

황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부인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고 어두운 얼굴로 변명했다.

"짐이 어찌 월령안 같은 여인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황숙께서는 짐을 너무 우습게 보십니다. 짐은 다만 계획이 틀어지는 게 싫을 뿐입니다. 월령안이 정말로 죽으면 짐은 무척 번거로워질 겁니다. 그래서 짐이 이처럼 조급해하는 겁니다."

뒤로 갈수록 황제는 목소리가 점점 더 차분해지고 설득력도 커졌다.

황제는 드디어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이건 아주 좋은 일이다!'

노인은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황제에게 도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내관에게 어서 밀고 나가라고 말했다.

황제는 그를 더는 막지 않았다. 그저 제자리에 서서 냉랭하게 노인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노인이 멀리 가고 나서야 황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이반반에게 말했다.

"명월산장에 가서 서신언에게 묻거라. 그리고 서신언에게 짐이 사람을 안배해서 원수 사건을 뒤집을 거라고 전해라."

"폐, 폐하……!"

이반반은 너무 놀라 말조차 하지 못했다.

'폐하께서는 자신이 무슨 얘기를 하시는지 알고 있는 건가?'

서 원수 사건은 고종 황제가 판결한 것이었다. 황제가 서 원수를 위해 판결을 뒤집는다면 그것은 모든 이들 앞에서 고종 황제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폐하께서 정신이 잘못된 건 아닌가?'

황제는 차가운 눈초리로 이반반을 쓸어보았다.

"왜? 너마저도 짐을 혼낼 것이냐? 짐에게 어떻게 일 처리를 해야 하는 것을 가르칠 것이냐?"

이반반은 다리에 힘이 빠져 바로 무릎을 꿇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흥!"

황제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고 소매를 젖히며 가 버렸다.

이반반은 무릎을 꿇고 한참 숨을 고르다가 겨우 천천히 일어났다.

* * *

황금당은 정말로 일 처리가 효율적이었다. 그날로 월령안의 '머리'를 가지고 조운충을 찾아가 나머지 돈을 지불하라고 했다.

"이게 월령안의 머리라고?"

조운충은 황금당에서 보내 온 사람 머리를 보고 화가 나서 웃고 말았다.

"너희들은 내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니면 내가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피범벅이 된 머리를 아무것이나 가지고 와서 나한테 월령안의 머리라고 하다니. 너희들은 내가 봉으로 보이냐?"

조운충이 자신은 황금당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를 우롱하는 눈앞의 사람들을 다 잡아 죽였을 것이다.

황금당 사람들은 너무나 뻔뻔스러웠다.

"그래서?"

황금당의 살수는 조운충을 냉랭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허리춤의 검을 끌어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

"조 세자께서 나머지 돈을 꿀꺽하시려고?"

"나는 월령안의 머리를 원한다."

조운충은 물론 빚을 떼먹을 생각이 없었다. 아니 감히 떼먹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감히 황금당의 빚을 떼먹는 사람은 없었다.

"이게 바로 월령안의 머리입니다."

황금당의 살수는 조운충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 않고 위협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저번에 황금당의 빚을 떼먹은 사람들은 봉분에 이미 풀이 사람 키를 넘게 자랐을 겁니다. 조 세자께서도 한번 시도해 보시렵니까?"

"너희들은 이게 월령안의 머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냐?"

조운충은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말했다.

"만약 월령안이 아직 살아 있다면?"

"우리가 죽었다고 하면 죽은 것입니다."

황금당의 사람은 아예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도도하게 말했다.

"사흘 시간을 드립니다. 사흘 안에 잔금을 가져오지 않으면 조 세자를 저 머리와 함께 저승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황금당의 살수는 이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가 버렸다. 조운충에게는 피투성이 된 머리만 남겨 주었다.

조운충은 화가 치밀어 욕을 퍼붓는 한편, 상자에 든 사람의 머리를 쓸어버리고는 호통쳤다.

"조사해! 월령안이 도대체 진짜로 죽은 건지 아직 살아 있는지 똑바로 조사하란 말이야!"

* * *

황제와 조운충뿐만 아니라 월령안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모두 월령안이 이렇게 죽었는 걸 믿지 않았다. 지금까지 황금당이 쌓아 온 명성과 평판에도 월령안이 이렇게 쉽게 죽었다는 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월령안의 적이건 친구이건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모두 신속하게 사람을 보내 그녀가 정말로 죽었는지 가짜로 죽었는지 조사했다.

하지만 유독 육 대장군은 달랐다.

육 대장군은 월령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조바심도 내지 않고 걱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잘했다고 한마디 했다. 차갑고 굳은 입꼬리도 다소 올라간 것을 보아 기분이 아주 좋은 모양이었다.

육일 등 친위대는 이 모습을 보고 하나둘씩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군의 기분이 좋으면 되었어.'

그동안 육장봉은 누가 돈을 빚지고 갚지 않은 것처럼 날마다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혹시라도 잘못해서 장군의 심기를 건드려 벌을 받게 될까 걱정했다.

다행스럽게도 월 낭자가 좋은 소식을 전해 왔다.

당연히, 좋은 소식이었다.

월 낭자가 장군의 안위를 염려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호위만 이끌고 홀몸으로 경성을 떠나 장군을 찾아온다 했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 아니면 또 무슨 좋은 소식이 있겠는가.

월 낭자의 '사망 소식'에 대해서 친위대는 전혀 믿지 않았다.

우선 그들은 황금당과 월 낭자의 관계가 얼마나 좋은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 점을 모른다 해도 황금당의 살수들이 월 낭자를 죽일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장군은 월 낭자를 보호하게 암위를 안배했다. 월 낭자에게 정말로 일이 생겼다면 암위가 진작 소식을 전해 왔을 것이다. 외부로부터 소식을 전해 들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육장봉의 기분이 좋아지자 육이를 비롯한 친위대도 덩달아 홀가분해졌다.

하지만 육장봉의 좋은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날 저녁, 육장봉은 암위가 보낸 소식을 받았다.

월령안은 확실히 죽지 않았다. 이른바 '사망 소식'은 그녀가 황금당과 꾸민 연극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중점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월령안이 황금당을 움직여 연극을 꾸민 대가로 지불한 물건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본래 육장봉에게 주려고 했던 마차였다.

육장봉은 암위가 보내온 소식에 금세 얼굴이 어두워졌다.

'감히 령안이 나를 위해 준비한 마차를 가로채다니, 화가 나는군!'

"여봐라."

육장봉은 손가락을 모아 수중의 편지를 손에 꼭 쥐었다. 온몸으로는 사람을 씹어 삼킬 듯한 한기를 내뿜었다.

육일은 들어오더니 멀리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예를 올렸다.

"내가 한동안 자리를 비울 것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미루거라."

육장봉은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감정의 기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육일은 감히 토를 달지 못하고 즉시 대답했다.

그날 밤 육장봉은 주둔지에서 사라졌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육일, 육이, 육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대장군의 기분이 무척이나 나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에 갑자기 황제의 명령을 받고 월 낭자가 청주로 가는 결정적인 시각에 경성을 떠날 때보다 더 나빴다.

이럴 때에는 대장군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어야 했다. 그들은 감히 간섭할 수 없었다.

* * *

육장봉이 주둔지를 떠난 그 다음 날 천목신교의 좌호법(左護法)은 황금당을 찾아가 의사를 밝혔다.

그들 교주가 황금당의 천 년 유창목으로 만든 마차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들 천목신교가 사교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치를 따지는 편이었다.

그들은 빼앗지 않고 황금을 주고 살 테니까 값을 부르라고 했다.

천 년 유창목으로 만든 마차는 전체 주나라…… 아니 북요, 대금, 서역의 여러 나라까지 더해도 더는 찾아낼 수 없는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천 년 유창목으로 만들어 물과 불뿐만 아니라 칼과 창도 막을 수 있는 것을 차치하고 유일무이하다는 점만을 위해서라도 황금당은 돈에 미치지 않은 이상 팔지 않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황금당은 돈이 모자라지 않았다.

이변 없이 황금당은 거절했다.

천목신교 좌호법도 화를 내지 않은 채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천목신교는 도리를 따지지만 사교입니다. 사교가 일 처리 하는 데는 규칙 같은 것을 따지지 않죠. 오늘 당신들은 마음대로 값을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일 저희 교주가 찾아오신다면 그때는 이리 말이 잘 통하지 않을 겁니다."

천목신교는 황금당을 위협하는 게 분명했다. 팔지 않으면 강탈하겠다는 것이었다.

어쨌든 천목신교는 그 마차를 얻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황금당은 암흑가를 종횡무진한 지 수십 년이 되었다. 심지어 염명경 귀시에서 가장 발언권이 있는 조직 중 하나가 되었다. 당연히 그런 위협 같은 건 두려워하지 않았다. 쌍방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천목신교도 사교의 명성을 저버리지 않았다. 사흘 뒤 교주인 남상권은 좌우 호법, 마주(魔主) 열여덟을 거느리고 황금당에 쳐들어갔다.

그 일전의 결과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천목신교의 고수와 황금당의 사람들이 하루 밤낮을 격렬하게 싸운 뒤, 남상권이 아주 소박한 마차를 타고 나왔다고만 전해졌다.

남상권이 부상을 입었는지, 그 마차가 정말로 천 년 된 유창목으로 만들어진 마차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황금당 사람 말고는 천 년 된 유창목으로 만든 마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강호인들이 이 일을 담론하거나 남상권이라는 악마가 방자하고 도리를 따지지 않는다고 질타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이들 강호인들의 질타는 남상권을 추호도 상하게 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그의 명성을 더욱 떨치게 했다.

강호인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월령안도 무림맹으로 가는 길에서 남상권과 관련된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다. 특히 남상권이 황금당과 사흘 밤낮을 싸웠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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