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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87)화 (587/1,004)

587화 아쉬울 거 없어요

"짐은 변방으로 가라고 하지 않았어. 짐이 미친 것도 아니고 왜 그녀더러 변방에 가서 장봉이를 찾으라고 하겠느냐. 월령안이 싸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장봉을 찾아가는 건 그에게 누가 될 뿐이야."

황제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조계안은 차갑게 대답했다.

"황형은 월령안이 육장봉의 생사에 관심이 없다고 얘기했어요."

황제는 당당하게 말했다.

"짐은 다만 월령안이 장봉의 안위에 관심 갖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변방으로 쫓아가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장봉에게 관심 갖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잖아. 꼭 변방으로 가야만 하는 건 아니지. 연약한 일개 여인이 변방에 가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어찌 이리 생각이 없는 것이냐?"

"그렇다면 황형이 얘기해 보세요. 월령안은 어떻게 육장봉의 생사를 관심 가져야 하나요? 두어 마디 관심이 담긴 말을 하고 눈물 조금 흘리면 육장봉에게 관심을 가지는 건가요. 그러면 되는가요?"

조계안은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황제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월령안은 말로만 육장봉의 생사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어요. 그러자 황형은 성지를 내려 그녀를 여 상인이 무정하고 차가우며 냉혹하다고 질책했어요. 또한 최일이 중독되었던 일을 가지고 월령안에게 뭐라고 했죠. 그래서 도대체 월령안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조계안은 손에 들고 있던 과일 쟁반을 던져 버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월령안이 뭐라도 하지 않고 말로만 두어 마디 관심을 보였으면 어떠할 것 같아요? 황형은 또 성지를 내려 그녀가 여상인으로서 가식적이고 입으로만 육장봉에게 관심을 가졌다면서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고 질책할지도 모르죠."

"짐은 그러지 않을 거야!"

황제는 자신 없이 말했다.

"됐습니다. 황형.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황형 자신이 잘 알고 저도 알고 있어요. 우리 형제 사이에 쓸데없는 거짓말은 하지 맙시다."

조계안은 황제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일어서더니 손뼉을 치며 말했다.

"황형은 황제지만 그래도 도리를 따져야죠. 분명 황형께서 먼저 성지를 내려 월령안을 꾸짖고 또 월령안이 최일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염명경 귀시에 간 사실을 들먹이며 그녀에게 행동을 하라고 암시한 겁니다. 지금 월령안은 황형이 원하는 대로 사람을 데리고 육장봉을 찾으러 변방에 갔어요. 황형은 아직도 무슨 불만이 있으세요?"

있다.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아주 많았다.

하지만 그는 말할 수 없었다.

황제는 털썩 주저앉으며 화가 나서 눈을 희번덕거렸다.

"하나같이 애물들이야. 짐은 너희들 때문에 울화통이 터져서 죽을 거야."

조계안은 황제를 외면한 채 탁자 위에 가면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뒤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황숙께서 황성사를 지킵니다. 제가 농땡이를 치면 안 되죠. 저 다녀오겠습니다."

"꺼져, 꺼져. 다 꺼져!"

황제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

"월령안, 금군에게 붙잡히지 말기를 기도하거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단단히 혼내 줄 테니까."

조계안은 황제를 등지고 입술을 오므리며 냉소를 지었다.

'황형은 늘 저리 순진하시지.'

월령안은 청주에 가기 위해 수개월 동안 준비했다. 지금 설령 급급히 떠났다고 해도 누구나 그녀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그는 황제 수하의 금군 몇 명이 월령안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 * *

월령안은 황제가 절대 그녀를 이렇게 변경을 떠나게 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변방으로 찾아가는 것은 더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일단 그녀가 변경을 떠났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그녀를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손을 쓰기 시작할 거라는 것이다.

때문에 출발하자마자 그녀는 소육자더러 한시도 쉬지 말고 말을 몰아 미친 듯이 달리라고 분부했다. 마차를 끄는 말 네 필이 모두 기진맥진한 다음에야 속도를 늦추게 했다.

"월 누님, 바로 앞이 십자파(十字坡)입니다."

달빛을 빌려서야 소육자는 겨우 방향을 알아볼 수 있었다.

"됐어요. 십자파에 이르면 멈추세요."

월령안은 하루 종일 마차를 탔다. 얼굴빛이 조금 피곤해 보였다.

"좋아요."

소육자는 월령안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그냥 월령안의 말만 들으면 되었다.

마차는 계속 앞으로 달렸다. 마침내 말이 거의 버티기 힘든 순간, 경성에서 삼백 리 떨어진 십자파에 도착했다.

소육자는 마차를 멈추고 숨을 골랐다. 월령안에게 막 도착했다고 말하려는데 갑자기 허리춤에 황금 장식품을 건 살수들이 어두운 곳에서 뛰쳐나와 검을 들고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황금당의 살수!

소육자는 뛰쳐나온 사람들을 보고 얼굴빛이 크게 변했다. 곧바로 뛰어내리며 검을 빼들고 마차를 막았다.

"월 누님, 살수가……."

"두려워하지 마세요. 같은 편이에요."

월령안은 차문을 열고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소육자는 휘둘렀던 검을 가까스로 거두어들였다. 고개를 돌려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황금당의 살수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소육자와 세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앞장에 선 살수가 월령안에게 보자기를 던져 주며 냉랭하게 말했다.

"가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고맙네요."

월령안은 소육자의 어깨를 다독이며 긴장을 풀라고 했다.

"월 누님, 이거 어떻게 된 일이에요?"

소육자는 우두커니 검을 거둬들이고 얼떨떨해 있었다.

"나중에 말해 줄게요."

월령안은 소육자에게 눈짓하고는 손에 든 보자기를 열고 남성복 한 벌을 꺼내 그에게 주었다.

"먼저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소육자는 비록 영리하지는 않지만 말을 잘 들었다. 월령안이 말하는 대로 따랐다.

소육자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월령안도 남장으로 갈아입고 나와 있었다. 그녀는 마치 갓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공자처럼 빼어낸 기상을 선보였다.

소육자는 눈앞이 훤해졌다.

"월 누님, 남장을 하니 남정네처럼 거친 멋이 나네요."

월령안은 할 말이 없었다.

"칭찬하는 줄로 알게요."

월령안은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소육자에게 손에 든 낡은 옷을 내려놓으라고 눈짓했다.

소육자는 옷을 내려놓고는 득의양양해서 말했다.

"헤헤, 당연히 월 누님을 칭찬하는 거예요."

"지금부터 안 공자라고 부르세요. 기억해요. 실수하지 마세요."

월령안이 주의를 주었다.

소육자는 그 자리에서 호칭을 바꿨다.

"알겠습니다. 안 공자."

"가도 됩니다."

앞장선 황금당 살수가 말 두 필을 끌고 나타났다.

월령안은 말을 끌고 와 그중 한 필을 소육자에게 주었다. 다시 말을 가져다준 이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저를 대신해 당신네 당주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이 인정을 꼭 기억할게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급한 대가로 충분합니다."

황금당의 살수는 매몰찬 얼굴을 하고 체면이라고는 봐주지 않았다.

월령안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탔다. 소육자를 부르고는 말을 몰아 떠나갔다.

소육자는 잠깐 멍해 있다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급급히 말에 올라타더니 말을 몰아 월령안을 쫓아갔다.

두 사람은 내내 미친 듯이 달렸다. 날이 밝을 때쯤에야 휴식할 곳을 찾았다.

이때서야 소육자는 월령안에게 도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물을 수 있었다.

"선수를 쳐서 기정사실로 만드는 거예요."

월령안은 건빵을 꺼내어 온수와 함께하여 조금씩 떼어먹었다.

"네?"

소육자는 여전히 얼떨떨해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월령안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 목숨을 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으세요?"

소육자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 때문에 출발할 때, 그는 월 누님에게 호위를 많이 거느리고 가자고 귀띔했었다. 그의 무예 실력이 형편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월 누님을 죽이려는 그 사람들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는 없었다.

그는 수 맹주가 아니었다. 수 맹주가 있었다면 그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남이 손쓰기를 기다리기보다는 제가 먼저 손쓰는 게 낫죠. 이변이 없는 한, 내일 아침이면 저를 주목하는 모든 이들이 소식을 받게 될 거예요. 나 월령안이 황금당 살수의 손에 죽었다는 소식 말이에요."

월령안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그걸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소육자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황금당의 명성이 있잖아요. 믿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아무도 안 믿어도 상관없어요. 여하튼 청주에서 내건 황금 십만 냥은 이제 제 거예요."

조운충은 거금을 주고 그녀의 머리를 샀다.

그 돈을 그녀가 번 것이다.

"황금당의 사람들은 왜 저희에게 협조하죠?"

소육자는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월령안은 방그레 웃으며 말했다.

"물론 제가 내건 가격이 더 높으니까요."

"하지만 월…… 아니. 안 공자. 공자에게는 금이 없잖아요?"

지난번 황금당이 요구한 여비도 최씨 가문이 여기저기 빌려서 겨우 마련했다.

"저에게 돈은 없어요. 하지만 돈이 되는 게 있죠. 그 마차를 기억하세요?"

월령안의 미소가 살짝 옅어졌다.

소육자는 두 눈을 반짝였다.

"기억하죠. 소갑은 그 마차가 물불뿐만 아니라 칼창도 막을 수 있어 가치가 어마어마하다고 했어요."

"네."

월령안은 입안의 건빵을 삼켰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눈 속의 복잡한 감정을 숨기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마차는 천 년 된 유창목으로 천궁각 장인 수백 명이 삼 년 만에 만들어 낸 거예요. 가치가 얼마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없지만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을 거예요. 누군가 천 년 된 유창목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해도 천궁각에서는 더 이상 만들어 내지 못하거든요."

"천궁각에서 만든 거잖아요? 어떻게 다시는 못 만들어요?"

소육자는 눈을 커다랗게 뜨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왜냐하면……."

월령안은 가볍게 탄식하고 말했다.

"천 년 유창목을 다룰 수 있는 대가께서 이 마차를 만들고 너무 흥분돼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떴어요. 그분은 세상 뜨기 전에 미처 제자에게 공예를 전수하지 못했죠. 천궁각의 각주는 일찍이 천궁각 전체를 그 마차와 바꾸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제가 거절했어요."

"천궁각 전체요? 그 정도 가격인가요?"

소육자는 놀라 입도 다물지 못했다. 입안의 건빵이 바로 흘러나왔다.

"맞아요!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황금당에서 마음이 움직인 거죠."

월령안은 건빵 한 조각을 떼어서 입에 넣고 맛없이 씹었다.

"저, 저, 저…… 월 누님, 그렇게 귀한 마차를 황금당에 줄 수 있는 건가요?"

소육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월령안을 지켜보았다.

만약 그라면 아까워서 바꿀 것 같지 않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것이잖아.'

"아쉬울 거 없어요. 이 마차는…… 본래부터 제 것이 아니에요."

월령안은 말하면서 눈빛에 초점이 없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소육자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월 누님이 사람을 시켜 만든 거 아닌가요?"

"제가 부탁해 만든 건 맞지만 제가 쓰려던 건 아니었어요. 만들어서 선물하려고 했었어요."

월령안은 눈길을 거두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육자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선물한다고요? 누구한테요? 누가 그렇게 행복한 사람인가요? 누가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무이한 마차를 선물로 가질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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