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3화 네가 너그러이 용서해 줘
야율헌일이 월령안을 부르는 호칭은, 처음 만날 때의 월 가주, 친척 관계로 가까워지려 했던 '외사촌 누이', 우호적이고 친근한 '령안'을 거쳐 결국 다시 월 가주라는 호칭으로 되돌아왔다.
야율헌일이 월령안에 대한 호칭의 변화는 그녀에 대한 그의 중시 정도의 변화이기도 했다.
지금 그는 월령안을 자기와 평등한 지위에 놓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부러 자신을 낮추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그가 다른 부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여전히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저는 삼황자와 할 거래가 없습니다."
야율헌일은 못 들은 척하고 제 말만 했다.
"상인은 오직 이익만을 추구합니다. 월 가주, 국가 정권 탈취를 돕는 장사는 얼마나 많은 이익이 있을까요? 당신이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나요?"
그는 월령안에게 자신의 야망을 털어놓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월령안처럼 영리한 상인과 거래를 하려면 반드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어 그녀가 자신에게서 이익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재산이 어느 정도 축적되면 돈은 숫자에 불과해요. 삼황자, 제가 얼마나 어리석으면 장부 상의 숫자를 위해 목숨을 내걸 수 있겠나요?"
월령안은 비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당신네 월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그 숫자를 위해 모험했죠. 그때 당신 아버지나, 십 년 전 당신 오라버니나 다 마찬가지예요."
야율헌일은 분명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는 월령안의 능력을 확인하고서는 우호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냉정하게 분석했다.
"월 가주, 당신과 범씨 가문의 십 년 쟁탈전은 그렇게 쉽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장사하는 재능이 있지만 범씨 가문도 당신에게 그렇게 크게 뒤처지지는 않아요."
"범씨 가문은 당신네 월씨 가문과 다릅니다. 당신네 월씨 가문에서는 한 세대 한 사람만 남겨두기 때문에 가주는 영원히 외톨이입니다. 경쟁에 참여했던 월씨 가문 자제들은 자신의 타고난 조건을 제외하면 다른 조건은 모두 같기 때문에 친척이나 친구의 힘을 빌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야율헌일은 갑자기 말투를 강하게 했다.
"범씨 가문 사람은 다릅니다! 당신과 경쟁하는 범씨 가문 사람은 가문 전체가 지지할 뿐만 아니라 주나라 여러 업계에 걸친 인척 관계를 가지고 있어요. 당신은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혼자뿐입니다. 만약…… 제 말은 만약, 만약 육장봉이 국경에서 죽으면 당신은 또 하나의 큰 조력자를 잃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무엇으로 배후가 복잡한 범씨 가문과 다툴 것입니까?"
야율헌일은 단숨에 말하고 나서 월령안을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삼황자께서 잘못 얘기하셨네요. 제 가장 큰 후원자는 폐하세요."
월령안은 무심하게 반박했다.
"게다가 월씨 가문은 황권 다툼에 참가하지 않습니다. 도와줄 수 없음을 용서하세요."
"월……!"
야율헌일은 더 설득하려고 했다. 이때 월령안이 탁자 위를 세차게 두드렸다.
"외사촌 오라버니, 저는 제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그때 누구의 손에 잘못되었는지를 알고 싶어요. 제 신분으로는 북요에 가기 힘들지만 오라버니께서 북요로 돌아간 뒤 저를 도와 알아볼 수 있나요? 누가 범인인지 밝혀낼 수 있다면 이 외사촌 누이는 후하게 사례하겠습니다."
야율헌일은 순간 두 눈이 반짝였다. 무슨 말을 하려던 순간, 월령안의 탁자 위에 올려둔 손을 보고서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가슴속의 기쁨을 가까스로 내리누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요!"
'주나라에 볼모로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 참 잘됐어!'
월령안은 야율헌일이 그녀의 뜻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월령안은 몸을 일으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외사촌 오라버니 감사해요. 시간이 늦어 더 잡지 않겠어요."
야율헌일은 뜻을 이루자 더 머무르려는 생각이 없어 몸을 일으켰다. 떠나기 전에 월령안에게 한마디 했다.
"조심하세요. 조운충이 거금을 들여 황금당의 살수를 청했어요. 그들은 당신이 살아서 청주에 도착하는 걸 원치 않아요."
"외사촌 오라버니 일깨워 줘서 고마워요. 조심할게요."
월령안은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황금당에 거금을 썼다. 조운충이 황금당이 거절할 수 없는 패를 내놓지 않는 한, 살수를 청해 그녀를 암살하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 * *
월령안은 야율헌일을 명월산장에서 내보내고 안뜰로 돌아왔다. 이때 하인이 또 찾아와 소함연이 만나기를 청한다고 보고했다. 소함연은 그녀가 만나 주지 않을까 두려워 특별히 하인에게 만약 그녀가 만나 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월령안은 하인의 말을 듣고 소함연에게 안 가고 버티면 뭐 무서워할 거 같냐고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 일련의 일들을 떠올리고 결국 참기로 했다. 하인을 시켜 소함연을 화청에 데려오라고 했다.
소함연은 얼굴이 눈물범벅이었고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옷도 볼품없이 구겨져 무척이나 초췌해 보였다.
월령안이 미처 놀라기도 전에 소함연은 그녀 앞에 달려와서 무릎을 꿇었다.
"월령안, 아버지, 내 아버지께서 위급해……. 내가 빌게. 제발 내 아버지를 좀 살려 줘. 제발……."
"죄송해요. 소씨 큰 아가씨께서는 장소도, 사람도 잘못 찾아온 거 같습니다."
월령안은 뒤로 한발 물러섰다. 소함연이 무릎을 꿇도록 내버려 두었다.
소함연은 월령안 앞에 무릎을 꿇고 기어가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눈물범벅이 되어 애원했다.
"월령안, 아버지, 나, 오라버니 모두 너에게 미안할 짓을 많이 했던 걸 알아. 그들이 너에게 빚진 건 내가 갚을게! 손 신의한테 내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말해 줘. 네가 내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준다면, 내 목숨을 너한테 맡길게. 네 마음대로 복수해도 돼."
"있잖아, 그건 불가능해."
월령안은 꿈쩍도 않고 차갑게 소함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네 아버지의 목숨을 살려 달라고 날 찾아온 걸 진작 알았다면 너를 만나러 나오지도 않았을 거야. 난 너희 소씨 가문이 모조리 죽어 버리기를 바라거든. 그러니 말해 봐…… 내가 왜 네 아버지를 구하겠어?"
"월령안, 너, 너만이 나를 도울 수 있어. 좀 도와줘. 저, 저기…… 그때 우리 아버지가 그래도 너희 모녀를 도와준 셈이잖아. 아버지 좀 살려 줘 부탁할게."
소함연은 월령안의 옷자락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것 같았다.
본래 눈으로 말하던 그녀였건만 지금 그 눈동자는 빨갛다 못해 피가 떨어질 듯해서 매우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월령안은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감동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소함연의 손을 와락 잡고는 호되게 밀쳐 버렸다.
"정말 모를 일이야. 무슨 낯으로 나한테 빌어? 소함연, 너 혹시 잊은 거 아니야? 그때 너희 남매와 너희 소씨 가문 사람들이 나와 내 어머니를 어떻게 대했는지 잊은 거야?"
"하지만 내 아버지, 내 아버지가 너희들 목숨을 지켰잖아. 그리고 너는 아직 살아 있잖아……. 잘 살고 있잖아?"
소함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할수록 목소리도 작아지고 눈 속에 빛도 점점 어두워졌다.
그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철면피한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월령안에게 빌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월령안을 제외하고 누가 그녀를 도와줄지, 그녀를 도와줄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월령안은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모든 존엄과 자부심을 내던지고서라도 월령안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소씨 큰 아가씨는 나름 염치라는 게 있는 모양이군."
월령안은 소함연을 내려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소함연은 얼마나 뻔뻔해야 그녀가 잘 살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삶은 그녀 자신이 두 손으로 조금씩 일궈 낸 것이다. 소씨 가문 사람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월령안, 나, 나……."
소함연은 절망에 찬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두 눈은 점점 빛을 잃어 가며 다만 무기력하게 애원할 뿐이었다.
"월령안, 아버지를 구해 줘. 네가 나를 가축 부리듯이 해도 돼. 네가 말하기만 하면 꼭 할 수 있어."
소함연은 눈물로 젖은 얼굴을 쳐들고 월령안을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월령안, 한번만 도와줘. 이번 한번만 꼭 도와줘. 앞으로…… 아니 내 평생을 네게 팔게. 시키는 대로 할게. 앞으로 네 말대로 할게. 너의 노복이 될게."
소함연은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문득 무언가 생각이 난 듯이 다급하게 부인했다.
"아니, 아니, 아니…… 너의 개가 될게. 네가 나를 어떻게 때리고 욕해도 좋아."
소함연은 처량하게 울었다. 얼굴이 눈물, 콧물 범벅이 되었다.
월령안은 소함연이 이처럼 추하게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여태까지 소씨 가문 큰 아가씨가 우는 모습은 그야말로 우는 미인이었다.
소함연은 울기는커녕 눈시울만 붉히고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려도 많은 사람이 다가가서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 그녀의 앞에는 월령안뿐이었다.
월령안은 그녀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고, 또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녀를 달래기는커녕 지금 죽이지 않는 것이 이미 매우 관용을 베푼 것이라고 생각했다.
월령안은 차갑게 비웃었다.
"보아하니 소씨 큰 아가씨는 그때 내 목에 개 사슬을 매고서 나를 개처럼 기어 다니게 하고 개밥을 빼앗아 먹게 하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 같군."
그녀는 소함연이 정말 싫었다.
그녀는 이제 소씨 가문에서 겪었던 고통을 거의 잊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소함연이 집으로 찾아와 한바탕 울면서 그녀로 하여금 또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몹시 싫었다. 소씨 저택에서의 생활, 그리고 지나간 고통을 떠올리는 것이 더욱 싫었다.
사람들은 역경이 사람을 성장하게 하고 역경이 사람의 의지를 연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나간 역경들이 지금의 우수한 당신을 만들어 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보기에 역경은 역경 자체일 뿐이었다. 전혀 사람을 성장시키지 못하며 심지어 인생을 망칠 수도 있었다.
그녀는 하마터면 지난날의 고통 때문에 거의 훼멸될 뻔했다.
"미안해. 미안해…….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 그때는 내가 철이 없어서 그랬어. 내가 잘못했어. 월령안, 이렇게 절할게. 이렇게 사과할게. 네가 너그러이 용서해 줘. 이번만 꼭 용서해 줘."
소함연을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면서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절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마가 땅바닥에 닿으려는 순가, 월령안은 발을 뻗어 소함연의 이마를 막았다.
"지금 절해서 무슨 소용이 있어? 지금 절하면 그때 너희들이 하인을 시켜 나를 물속에 처박아 죽이려고 했던 일이 없어져? 하인을 시켜 나를 매달고 때려죽이려고 하던 일이 없어져?
너희들이 끊임없이 내 어머니를 욕보이던 일이 없어져? 너희들이 하마터면 내 어머니 결백을 망치려 했던 일이 없어져? 너희들이 나를 구리파 투수장에 보낸 일이 없어져?"
월령안은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었다. 말마다 칼처럼 사람을 짓누르는 위압감을 띠고 있었다.
소함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끊임없이 고개만 흔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우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