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그래도 공주라더니 우리 월 언니 손가락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시네요. 정말 우스운 일이에요."
"북요 공주면 뭐 대단한가요? 월 언니가 얘기한 것처럼 당신은 그냥 패전국의 공주예요. 우리 주나라에서 웬 위세를 떨어요?"
"당신의 그 꼼수를 우리는 모를 거라고 생각하세요? 육 대장군께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여인을 아내로 삼겠다고 말했었죠. 당신이 오자마자 월 언니를 골라서 겨루겠다고 한 건 그냥 월 언니를 밟고 올라서려는 거 아니었나요? 왜요? 자기가 재간이 없어 가시를 밟으니 아프죠? 그래서 이제는 억울한 척, 불쌍한 척하는 건가요?"
"오공주, 질까 봐 겁나면 솔직히 말하세요. 우리는 뒤에서 당신을 비웃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당신을 비웃으려면 앞에서 웃을 거예요."
아가씨들은 인정사정없이 말했다. 하지만 야율아한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변경의 귀족 아가씨들 중에서 월령안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녀의 상대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녀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월령안을 바라보며 냉소했다.
"육 대장군이 오랫동안 자취를 감춘 뒤 아무 소식도 없죠. 도대체 뭘 하러 간 건지 알고 싶지 않으세요?"
월령안은 변함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알고 싶어도 야율아한과 거래하지 않을 것이다.
야율아한은 나쁜 심보를 품고 있었다.
"당신……!"
야율아한은 월령안이 꾐에 걸려들지 않자 얼굴에는 노기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월령안, 염명경 귀시에서 당신의 거래를 받을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거래도 받아들일 수 있겠죠. 아닌가요?"
월령안은 잠깐 멍하게 있다가 속눈썹을 가볍게 떨었다. 눈 속의 냉담함을 숨긴 채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 말이 맞아요."
육장봉은 갑자기 변경을 떠난 뒤 아무 소식도 없었다.
서 선생도 따라서 감감무소식이고 그녀에게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육장봉과 서 선생을 막고 이 두 사람이 그녀에게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육장봉과 서 선생이 자발적으로 그녀에게 전갈을 보내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 두 사람이 이처럼 깊이 숨기고 그녀에게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을 일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야율아한의 말까지 결부하여 월령안은 속으로 칠 할 정도는 확신할 수 있었다.
월령안은 눈을 들어 야율아한을 바라보았다. 야율아한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웃고 있었다.
과연!
그녀가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보통 많은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사람들은 황제의 손을 빌려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녀는 이 수가 대단하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과 서 선생이 그녀에게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건 철광산 관련 일뿐이었다.
월령안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줄곧 황제가 백방으로 확인하고, 또 전선에서 무기 대가를 불러와 그녀가 전방에 보낸 병기가 금나라에서 나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철광산 일은 끝난 줄로만 생각했다. 계속하여 그녀를 지켜볼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야율아한이 염명경 귀시를 들먹이자 그녀는 알게 되었다. 설령 황제가 포기했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북요인들과 청주 사람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음모로 그녀의 목숨을 빼앗을 수 없게 되자 철광산을 이용해 황제의 손을 빌려 그녀를 죽이려 했다.
황제는 그녀가 유용하므로 당분간 죽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철광산이 확인되는 날이면 이는 그녀와 황제 사이에 놓인 큰 장애물로 그들 서로가 더욱 경계하게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황제가 그녀를 용인하지 못하고 죽이거나 아니면 그녀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몰래 힘을 모아 황제에게 반기를 들 것이다.
'살인을 하면서 본인 손에는 피를 묻히지 않는다니. 참 좋은 계략이야.'
월령안은 속으로 몰래 감탄했다.
북요와 청주가 몰래 꾸민 계략을 알게 되자 월령안은 야율아한과 실랑이질할 여유가 없었다.
북요, 청주의 툭하면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야율아한은 유치한 아가씨에 불과했다. 시집까지 갔던 부녀자로서 어린 아가씨와 시시콜콜 따질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은 야율아한에게 되는 대로 두어 마디 정도 더 응대하고 설개연이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야율아한은 물론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여러 차례 도발했지만 월령안은 그냥 '오'라고 애매한 대답만 하고 다른 글자는 하나도 뱉지 않았다.
다른 귀족 아가씨들은 더 얄미웠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들은 월령안을 따라 했다. 월령안이 야율아한을 무시하자 그녀들도 무시하며 야율아한이 혼잣말을 하게 내버려 두었다.
정원 안에는 사람 천지였지만 야율아한은 영문 모를 고독감에 시달렸다. 누구 하나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녀가 고의로 언성을 높여 말해도 아가씨들은 못 들은 척하고 자기 할 일을 하면서 그녀의 존재를 무시했다.
야율아한은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정원에 있는 모든 이들은 자기 할 일만 하면서 그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최 대학사가 이제 막 승상 자리에 오르고 북요가 패전했을 뿐만 아니라 비무에서 연이어 패배하지 않았다면 야율아한은 정말 당장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고 싶었다.
야율아한은 가까스로 연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시도 더 머무르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
최씨 가문 사람은 누구도 그녀를 잡지 않았다. 심지어 배웅하는 사람도 없이 야율아한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야율아한은 마차에 오르자마자 참지 못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얌체 같은 주나라 인간들, 내가 조만간 너희들을 다 죽여 버릴 거야."
마차 안에 꿇어앉아 있던 여자 노예가 그녀의 말을 듣고 의아한 눈빛으로 흘끔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땅바닥에 꿇어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낙원 안, 많은 귀족 아가씨들도 잇달아 떠났다.
최씨 가문의 하인들은 준비해 두었던 선물을 귀족 아가씨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최씨 가문 설개연은 비록 최씨 가문 며느릿감을 고르는 자리였지만 최씨 가문 사람들은 형식에 신경을 썼다. 연회에서 결코 남녀가 접촉하거나 맞선을 보는 자리는 마련하지 않았다.
설개연에서는 서화 교류를 위주로 어울렸다. 매번 연회가 끝날 때마다 최씨 가문에서는 연회에서 사용된 서화를 표구하여 참가자들에게 선물했다.
물론 주로 최씨 가문 아들들의 서화였다.
최씨 가문의 아들들은 대부분 재능과 학식이 높았다. 다만 벼슬길에 들어서는 것에 크게 흥미가 없었고 최씨 가문에서도 그들을 강요하지 않았다.
최씨 가문에는 서화 솜씨가 뛰어난 대가 몇 명이 나왔다. 평소 그들의 서화는 천금을 가지고도 구하기 어렵고 오직 설개연에서만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시집가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최씨 가문 설개연에 초청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다만 이번에 받은 선물에는 서화 외에 장군왕 세자 명의의 술 가게에서 준비한 선물함도 있었다.
아가씨들의 선물함 안에는 은양당의 비단 꽃과 미인방의 손수건이 들어 있었다. 모두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 선물 외에도 아가씨들마다 선호하는 대로 별도로 준비한 선물이 있었다.
남자들의 선물함에는 술 외에 붓, 대나무 부채 등 각자 취향에 따라 준비한 선물이 있었다.
사람들은 선물을 받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집으로 돌아와 하인이 장군왕 세자가 어떤 선물을 준비했는지 알리자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장군왕 세자가 신경을 많이 썼군. 남의 것을 가지면 사정을 봐줘야 한다잖아. 장군왕 세자의 술 가게가 문을 열면 꼭 가야겠다."
"어쩐지 오늘 설개연에 나온 술이 예년과 다르다 했지. 새 술 가게에서 나온 것이었군. 이 술맛이 정말 괜찮은데, 술 가게가 개업하는 날 싸게 살 수 있다 하니 얼마간 사 두어야겠다."
아가씨들은 마음에 드는 선물을 받자 매우 기뻤다. 그녀들은 술을 구입할 수 있는 구리 우대 엽서를 직접 쓸 수는 없었지만 마음에 쏙 드는 선물을 받았으니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어 했다.
대부분 아가씨들은 장군왕 세자가 보낸 구리 우대 엽서를 자기 아버지와 오라버니에게 선물했다. 또 어머니에게도 선물해 어머니더러 하인에게 시켜 구매하라고 하기도 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월령안과는 상관없었다.
월령안도 설개연 손님으로서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최 부인은 월령안을 잡지 않았다. 직접 그녀를 문밖으로 배웅하면서 떠나기 전에 잠시 망설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령안, 오늘 북요 오공주가 너한테 한 말은 폐하께서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넌……."
월령안은 최 부인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손을 잡고 가볍게 힘을 주었다.
"최 숙모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알고 있어요."
철광산에 관한 일은 최 부인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월령안은 그녀가 자신에게 말해 주지 않은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일은 그녀가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나았다.
"령안,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말해. 절대 우리하고 예의를 차리지 마. 알겠느냐?"
월령안은 자신만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 부인은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 저도 모르게 신신당부했다.
월령안은 전혀 번거로워 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최 부인을 안심시키고 나서야 마차에 올랐다.
돌아가는 길에 월령안은 허국공부의 마차가 한쪽 옆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마차를 끌던 준마 네 필은 보이지 않고 진흙투성이 마차뿐이었다. 차바퀴의 보석도 진흙에 덮여 빛을 잃고 있었다.
"월 누님, 보세요!"
소육자와 소갑은 일부러 속도를 늦추어 월령안이 똑똑히 볼 수 있게 했다.
"괜찮군요."
월령안은 힐끗 한번 보더니 가볍게 웃었다.
소육자는 금세 득의양양해했다.
"월 누님 걱정하지 마세요. 소갑이 직접 손썼어요. 제가 망을 보고요. 우리가 아주 은밀하게 처리해서 누구도 알아내지 못할 거예요."
"알아내더라도 아무 일 없을 거예요."
월령안은 차창을 내려놓으며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허국공부는 기울 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설령 허국공부가 여전히 중천에 뜬 해라고 해도 허 낭자는 그녀의 부모를 모욕했다. 대가로 그녀를 어떻게 혼내 주어도 지나치지 않았다.
월령안은 설개연에서 돌아온 후 여전히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육장봉이 철광산을 찾아간 일을 모르는 듯 담담하기만 해 아무도 뭐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월령안의 반응을 전해 듣고 저도 모르게 한마디 감탄했다.
"황숙은 어떻게 가르쳤는지 몰라. 나이도 어린데 지혜롭기가 요물에 가깝구나. 짐이 설령 무엇을 조사해 낸다 해도 그녀를 어찌할 수 없을 거다."
조계안은 난각의 연탑에 누워 황제의 말을 듣고 그를 흘겨보았다.
"지혜롭기를 요물에 가까운 것도 결국 황형이 궁지에 몰아 그렇게 된 거잖아요. 남의 멀쩡한 아가씨를. 황형이 얘기해 보세요. 남의 집과 가족을 잃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끊임없이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잖아요. 황형, 부끄럽지도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