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7화 내 돈을 떼먹으려고 하지 마세요
야율아한, 북요의 오황녀였다. 사실 사람들은 그녀의 옷차림에서 이미 그녀의 신분을 짐작하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열정적이고 대범하게 자기소개를 해도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체면을 중히 여기는 이들은 담담하게 웃어 보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소녀의 존재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고 옆 사람과 한담했다.
최 부인 역시 무덤덤하게 인사말 한마디를 건넸다.
"오공주였군요. 자리에 앉아 주세요."
그녀는 환영받지 못하고 냉대당하는 게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릇 심리적 인내력이 약한 사람은 모두 불편함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낮출 것이다.
그러나 북요 오공주는 전혀 자각하지 못한 듯 보였다.
"최 부인 감사합니다."
그녀는 월령안과 최 부인 앞에 다가가 최 부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방긋 웃으며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 언니,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오공주는 온몸에 붉은 옷을 걸치고 기세가 등등하여 월령안 앞에 다가섰다. 그녀는 일부러 온몸으로 위압감을 내뿜으며 월령안을 압도하려고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아가씨들은 오공주의 갑자기 강해지는 기세를 느낄 수 없었다. 기껏해야 소박한 차림새의 월령안이 아름답고 환한 북요 오공주 앞에서 빛을 잃었다고 느낄 뿐이었다.
최 부인은 바로 월령안의 옆에 서 있었다. 그녀는 한눈에 오공주의 작은 술수를 꿰뚫어 보았다. 그녀가 앞으로 다가가 저지하려는 순간 월령안이 살며시 잡아당겼다.
월령안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오공주의 기세가 그녀보다 강한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오공주의 말에 서둘러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오공주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나서야 대답했다.
"안 됩니다."
이 수는 어느새 오공주의 위압감을 무너뜨렸다.
"월 언니, 제 어머니께서는 한인(漢人)이세요. 그분은 유씨예요."
오공주는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얼굴의 미소도 날카로워졌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당신 어머니가 조씨라도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월령안의 어머니도 유씨였다. 당연하게도 그녀는 북요 오공주의 말속에 담긴 암시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녀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그녀는 친언니에게까지 손쓸 수 있었다. 그러니 어디서 난지도 모르는 외사촌 여동생, 그것도 북요 황실 혈통을 이어받은 외사촌 여동생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언니는 절 인정하지 않는 건가요?"
오공주 얼굴의 미소는 변함없지만 기세등등한 날카로움을 띠고 있었다.
월령안은 코웃음을 치며 오공주에게 끌려가지 않았다.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소문이 정말인가 봐요. 오공주는 육 대장군에게 시집가려고 수단을 가리지 않는군요. 모든 이들 앞에서 육 대장군을 가로막고 한 청혼이 이루어지지 않자 이번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저를 언니라고 부르나요? 안타깝게도 당신은 너무 늦게 오셨어요. 저는 이미 육 대장군의 아내가 아니에요. 당신이 저를 언니라고 불러도 소용없어요. 육씨 저택의 대문에 들어가지 못할 거예요."
오공주는 잠시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바로 대범하게 인정했다.
"월 언니의 말이 맞아요. 저는 육 대장군을 흠모해요. 육 대장군에게 시집가고 싶으니 월 언니께서 도와주세요."
"오공주, 당신은 지금 최씨 가문의 설개연에 참가했지만 결국 육 대장군을 위해 온 거라 말씀하셨습니다. 최씨 가문을 어찌 보는 겁니까!"
최 부인은 좀 전의 온화하고 친근하던 표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오공주는 표정을 조금도 바꾸지 않고 말했다.
"최 부인, 과한 말씀입니다. 최일 공자께서 저를 맞아들이겠다고 하시면 저는 당장 육 대장군을 내려놓고 이 혼사를 승낙할 겁니다."
최 부인은 북요의 오공주가 자중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자 그만 화가 나서 웃고 말았다.
"오공주는 신분이 고귀하셔서 제 아들은 아마 넘보지 못할 것 같군요."
오공주는 코웃음을 치며 최 부인의 체면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최 부인께서는 최 공자께서 저에게 장가드는 것이 탐탁지 않으면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면 됩니다. 무슨 넘보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세요."
"공주께서 스스로를 알고 계시는데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있나요. 괜히 난감하게 해드릴 뿐이죠."
오공주가 예의를 차리지 않으니, 당연히 최 부인도 그녀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최씨 가문에서는 일개 북요 공주를 안중에 두지 않았다.
오공주는 쌀쌀한 얼굴을 하고서 경멸을 담은 말투로 말했다.
"당신네 최씨 가문에서 설개연을 열어 며느리를 고르잖아요. 그런데 왜 저희는 최씨 가문 아들을 고르면 안 되나요? 최씨 가문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모르는 사람은 당신네 최씨 가문 아들이 천자나 되는 줄 알겠어요. 설개연은 왕비를 고르는 자리이고요."
"오공주,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최 부인은 안색이 살짝 변하며 노하여 말했다.
오공주가 도발적으로 눈썹을 치켜세웠다.
"제 말이 틀렸나요? 그러면 설개연은 당신네 최씨 가문에서 며느릿감을 고르는 연회가 아니에요?"
"물론 틀렸어요."
월령안은 최 부인이 점차 열세에 처하자 한발 앞서 입을 뗐다. 최 부인을 난감하게 하지 않기 위해 우선 먼저 말했다.
"최 숙모님, 패전국의 공주에 불과합니다. 숙모님은 수양이 있으셔서 오공주의 체면을 봐주시고 그녀를 난감하게 하지 않으려고 하시죠. 하지만 전 성격이 나빠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네요."
월령안은 먼저 최 부인에게 내려올 길을 터준 다음에야 다시 말했다.
"귤은 회남(淮南)에 심으면 귤이 되고 회북(淮北)에 심으면 탱자가 되지요. 오공주의 어머니는 비록 한인이지만 아버지는 북요인이에요. 또한 오공주는 북요에서 나고 자라서 북요 야만인과 다를 바가 없어요. 글 몇 자를 안다고 설개연을 품평하다니요. 그림을 감상하는 설개연을 어찌 선보는 자리라 말할 수 있나요. 완전 속물이십니다."
오공주는 화가 나서 도리어 웃었다.
"내가 야만인이라고? 모르면서 아는 척한다……. 월 낭자는 자신감이 대단하군요! 듣건대 월 낭자가 춘일연 화신이라면서요? 주나라의 표현에 따르면 춘일연에서 간택된 화신은 주나라에서 가장 아름답고 빼어난 낭자라고 하더군요. 화신께서는 감히 저와 한번 겨룰 수 있나요?"
월령안은 일찌감치 이 사람이 자기를 찾아온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때문에 오공주의 말을 들어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눈길로 방자하게 오공주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당신과 겨룬다고요?"
"볼 것 없어요. 제 몸매는 당신보다 좋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과 기마와 활쏘기를 겨루지는 않을 거예요. 당신네 주나라 사람들이 능한 금기서화(琴棋書畵 -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 등 당대 지식인의 필수 교양)를 겨룰 거예요."
오공주는 거만하게 말했다.
월령안은 박장대소했다.
"오공주께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셨군요. 저는 당신 몸매에 관심 없어요. 저는 그냥 오공주 몸에 은표를 지닌 곳이 있는지 본 거예요."
"은표? 그건 무슨 뜻이죠?"
오공주는 어딘가 잘못된 것을 직감하고 경계하는 눈초리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경계는 별 소용이 없었다.
"말 그대로 돈이에요. 당신이 저와 겨루는데 돈을 지불할 수 있겠어요?"
월령안은 하찮다는 듯이 반격했다.
오공주는 화가 나서 말했다.
"당신과 겨루는데 돈을 내야 하나요? 당신은 뭐라도 되는 줄 아세요? 기루의……."
"아니죠."
월령안은 오공주의 말을 가로채고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월령안은 상인이고 재신의 친딸이라 불리는 사람이에요. 난 시시각각 돈을 벌거든요. 당신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제가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지 아세요? 오공주, 저는 당신이 아니에요. 당신의 시간은 값어치 없지만 이 월령안의 시간은 아주 소중하거든요."
'나와 금기서화를 겨루고 싶다고?'
마침 집을 지을 돈이 모자랐다. 오공주가 달려와서 돈을 주겠다고 하는데 그녀가 받지 않으면 하늘도 안타까워할 것이다.
월령안은 야율아한이 화가 나서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리며 냉소했다.
사람이 뻔뻔하면 천하무적이다.
야율아한은 뻔뻔스러움으로 변경 귀족 아가씨들을 무찌르고 변경의 체면을 중요시하는 귀족 아가씨들과 부인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꿈 깨시지! 오늘 야율아한에게 진짜 철면피라는 게 어떤 건지 한번 가르쳐 줘야겠군.'
월령안은 야율아한에게 반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오공주, 아직도 겨룰 거예요? 전 쉬운 사람이에요. 오공주께서 제 시간을 지체한 데 대한 비용을 지불할 수만 있다면 종목이 무엇이든 상관 없이 언제든 꼭 상대해 드릴게요."
월령안의 눈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는 보통 여인들처럼 두 눈에 정이 넘쳐흐르지는 않지만 야율아한처럼 거만한 것이 부잣집 도련님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녀는 붉은 옷으로 감싸고 화려하며 빛이 나는 야율아한에 비해 어두운 색감의 옷을 입고 있어 아주 수수해 보였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자 빛을 뿌리는 것처럼 보여 모든 이의 시선은 그녀에게로 쏠렸다.
하지만 월령안은 이런 것들을 안중에 두지 않고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무심한 듯한 나른함을 띤 말투였다.
"오공주, 저는 상인 가문 출신이라 안목이 좁고 눈에는 돈밖에 없어요. 제발 저하고 자매의 정 같은 걸 얘기하면서 돈을 떼먹으려고 하지 마세요. 우선 당신은 북요인인데 저하고 무슨 정이 있나요. 정이 있다고 해도 안 돼요. 육 대장군도 제 돈을 빚지면 갚아야 해요. 당신의 체면이 대단하다고 육 대장군보다 더 대단하겠어요?
당신 어머니가 유씨인 사실은 나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제 어머니 성이 유씨고 당신 어머니 성도 유씨라고 해서 억지로 나와 외종 자매 관계를 강요할 수는 없죠. 세상에 유씨는 참 많거든요. 제가 유경장을 알고 지내고 도와주는 것은 그가 재능이 있고 제가 그에게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내가 무엇을 벌게 해 줄 수 있나요?"
월령안은 말이 빠르지 않지만 한 글자, 한 글자를 이어 내려가 야율아한이 끼어들 기회를 주지 않았다.
야율아한은 몇 차례 입을 달싹여 월령안의 말을 중단시키려 했으나 기회가 없었다. 그녀가 말을 끝낸 다음에야 야율아한은 말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정설이든, 역설이든 다 말하고 난 다음이라 야율아한이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돈을 주지 않고 월령안을 강요해 비기겠다고 하겠는가.
소용이 있겠는가.
소용이 없었다.
월령안은 수도의 귀족 아가씨들이 아니었다. 야율아한이 뻔뻔하다지만 월령안은 그녀보다 더 뻔뻔스러웠다. 게다가 대범하게 자신의 신분을 인정하고 또한 직접 자신은 돈을 중요시하고 남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는다고 말해 야율아한이 생각해 둔 모든 수를 막아 버렸다.
야율아한은 별다른 수가 없었다. 다만 몰래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그깟 돈. 당당한 북요 황녀가 돈이 없겠어요. 월령안, 마음대로 말해 보세요. 한 번 겨루는 데 돈을 얼마 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