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화 어차피 무너질 담벼락
허 낭자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최 부인은 또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동작은 무척이나 차분하고 세심했다.
허 낭자는 이상한 기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최 부인이 이처럼 부드럽게 대하자 그녀는 울먹이며 고자질했다. 자신이 어떻게 월령안을 화나게 했는지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월령안이 어떻게 자신을 모욕했는지만 말했다.
최 부인은 듣기만 하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간혹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마치 허 낭자를 온전히 믿는 것 같았다.
월령안은 옆에 서서 이 광경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최 숙부의 부인은 과연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아가씨들은 허 낭자가 먼저 월령안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어떻게 모욕하고 짓밟았는지를 직접 보았다.
하지만 허 낭자는 최 부인 앞에서 그런 것들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모든 잘못을 월령안에게 떠밀면서 월령안이 먼저 도발하고 또한 그녀를 때리려 하고 내쫓으려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어처구니없게도 그녀가 월령안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형편없는 지난날을 알기에 월령안이 그녀를 죽여 입막음하려 한다고 말했다.
아가씨들은 저도 모르게 서로서로 마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허 낭자는 지금 우리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는 건가?'
작은 지방에서 오래 머물면서 사람들이 떠받드는 데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어머니처럼 자기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렇다 해도 아가씨들은 묵묵히 하늘만 올려다볼 뿐 나서서 월령안을 위해 말해 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최 부인이 너무나 자애로운 눈빛으로 허 낭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은 최 부인의 뜻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녀들이 최씨 가문의 설개연에 참가한 것은 물론 최씨 가문에 시집가고 싶어서였다. 그녀들은 최 부인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몇 명은 춘일연에서 월령안과 교제했던 터라 그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월령안도 빨리 울고 가련한 척하라고 조용히 한마디 귀띔해 주었다.
월령안은 아가씨들의 호의를 마음으로만 받고 그녀들이 말한 것처럼 울면서 억울한 척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불쌍한 척, 억울한 척하는 짓을 할 수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불쌍한 척해서 동정을 받는 것보다 실력으로 상대를 짓누르는 것을 좋아했다. 상대방이 아무리 억울해도 참을 수밖에 없게 해 주기를 좋아했다.
월령안은 허 낭자가 훌쩍거리며 고자질을 다 끝낸 다음에야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 최 부인에게 읍을 하며 예를 올렸다.
"죄송합니다. 부인의 연회에 누를 끼쳤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최 부인은 월령안이 다가오자 즉시 손수건을 옆에 있던 어멈에게 건네주었다.
그 어멈 역시 영리한 사람이었다. 어멈은 손수건을 받아 들고 허 낭자를 한쪽으로 데려갔다.
"허 낭자, 소인이 얼굴을 닦아드리겠습니다."
허 낭자는 멍해져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미처 정신을 차리지도 못했다. 이때 최 부인은 앞으로 다가가 월령안을 부축하며 시원하게 말했다.
"애도 참, 너무 예의를 차리는구나. 한집안 식구인데 무슨 예를 올리느냐. 너 최 숙부는 숙부라고 부르면서 난 왜 부인이라고 부르고 그러니. 서운하구나, 어서 숙모라고 불러. 아니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최 부인은 월령안과 얘기하면서 조금도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전혀 월령안을 남으로 대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최 부인의 뜻을 알아차리고 흔쾌히 받아들였다.
"최 숙모님 안녕하세요."
"역시 착한 아이구나. 네 최 숙부가 돌아와서 줄곧 참한 조카를 얻었다고 자랑하더라고. 어찌나 부럽던지. 오늘 나도 그 참한 조카를 드디어 만나는구나."
최 부인은 얼굴에 웃음꽃을 피우고 손목의 붉은 팔찌를 끌어 월령안의 손목에 끼워 주었다.
"이 팔찌는 어머니께서 나에게 준 것이야. 딸에게 넘겨주라고 했는데 난 아들밖에 없잖니. 팔찌를 그냥 관 속에 넣어 갈 줄 알았어. 오늘에야 이렇게 선물할 수 있게 됐구나."
월령안은 언뜻 보고도 최 부인이 준 팔찌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양하지 않고 대범하게 받았다.
"최 숙모님 고마워요."
최 부인은 월령안이 대범하며 그녀에게서 가난한 집안의 우물쭈물함이 보이지 않자 바라보는 눈빛에는 기쁨이 역력했다.
"령안이는 손목이 하얗고 매끄러워 합혈홍(鴿血紅 - 가장 좋은 품질의 루비) 팔찌가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그녀는 월령안이 아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남편의 승상 직이 어떻게 왔는지도 알고 있었다.
이 두 가지만으로도 그녀는 월령안을 친딸처럼 사랑할 만했다.
더하여 월령안은 예쁘고 일 처리가 대범하여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녀는 아들이 능력이 부족해 이렇게 좋은 아가씨를 아내로 맞이할 수 없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
최 부인의 눈에는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부, 부인……!"
허 낭자는 한참 동안 울었다. 비록 우는 척만 했다고 해도 기운이 빠져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최 부인과 월령안이 모녀 사이처럼 가까운 것을 보자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허 낭자군요. 허 낭자 좀 괜찮으시죠?"
최 부인의 허 낭자를 바라보는 눈빛은 시종일관 부드러웠다.
허 낭자는 한순간 자신이 생각이 많은 건 아닌지 의심했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대범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부인, 많이 좋아졌습니다."
"많이 좋아졌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그럼 전 바래드리지 않을게요."
최 부인은 말을 마치고는 허 낭자와 함께 있는 분홍색 옷을 입은 아가씨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안 낭자 맞죠? 두 분, 자 가시죠."
"부, 부인…… 무슨 뜻이에요?"
허 낭자는 그 자리에서 멍해 서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최 부인을 바라보았다.
'이건 나를 쫓아내는 거야?'
"령안이의 말을 못 들었나요?"
최 부인이 웃으며 물었다.
허 낭자는 눈을 커다랗게 부릅떴다.
"부인, 저, 제 아버지는 시박사 제거이고 제 할아버지는……."
최 부인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허 낭자의 말을 가로챘다.
"허 낭자, 저는 당신 아버지가 누구든, 할아버지가 누구든 상관하지 않아요. 저는 다만 찾아온 이는 모두 손님으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청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나쁜 손님은, 미안하지만 저희 최씨 가문에서는 접대하지 못하겠네요."
말을 마치고 최 부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제 기억으로 우리 가문에서는 허국공에게 초대장을 보낸 적이 없군요."
"뭐라고?"
"초대장이 없다고?"
"불청객으로 와서 남 집에서 이렇게 방자하게 군 거야?"
"허국공부는 참 정말……."
"과연 작은 곳에서 자란 사람은 공개 석상에 나서면 안 된다니까."
허 낭자는 신분이 높기에 설개연에 나타나자마자 모두들 그녀가 최일 때문에 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자리에 있는 규수들 중 구 할이 최일을 노리고 있었다. 최 부인이 허 낭자를 내쫓자 다른 규수들은 맞장구를 치며 허 낭자를 마구 짓밟았다.
허 낭자는 전에 줄곧 강소, 절강 일대에서만 머물렀다. 아버지가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관리는 아니지만 실권을 맡고 있고 또한 천자의 심복이며 배후에는 허국공부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때문에 그 일대의 관리들은 모두 허 낭자를 떠받들었다.
허 낭자는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최 부인의 축객령과 뭇 아가씨들의 불에 기름을 붓는 말들을 들으면서 화가 난 나머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마지막 자부심으로 가까스로 버티면서 노하여 말했다.
"당, 당신들…… 정말 너무해요! 오늘의 수치를 기억할 거예요. 최 부인, 돌아가서 반드시 제 아버지께 얘기할 겁니다. 다음에 다시 보자고요."
최 부인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가세요. 바래다 드리지 않을게요."
"아아, 가자!"
허 낭자는 이제 최 부인의 마음에 들려는 생각이 전혀 남지 않았다. 그녀는 최 부인을 호되게 한번 노려보고는 분홍색 옷을 입은 안 낭자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안 낭자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허 낭자보다 더 난처했지만 감히 말을 못 했다.
허 낭자는 둬 걸음을 내디디고 갑자기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더니 월령안을 힐끗 노려보며 위협했다.
"월령안, 내가 강남에서 기다릴 거다!"
그녀는 지금까지 자라 오면서 이렇게 크게 체면을 잃은 적이 없었다.
최 대학사는 승상이 되었기에 그녀가 최씨 가문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월령안까지 어찌하지 못할까.
월령안이 아무리 재간이 있어도 한낱 여상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해상 운송을 책임진 제거였다. 월령안이 강남에서 장사하려면 그녀의 아버지를 피해 갈 수 없었다.
'월령안, 기다려. 완전히 끝장나게 만들어 줄 테니까!'
"하루빨리 강남에 갈게요."
월령안은 사뿐히 절하며 허 낭자의 위협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허 낭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고는 자리를 떴다.
월령안은 옅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박사 제거라!'
허 낭자의 아버지는 십이 년간 시박사 제거를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황제에게 소환되었다. 심지어 허국공부는 최씨 가문의 초청도 받지 못한 채 손녀를 최씨 가문 설개연에 참가시켰다. 이 징후는 허 낭자의 아버지 또는 허씨 가문에 일이 생겼음을 말해 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허 낭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허씨 가문의 담벼락이 무너지려고 한다. 어차피 무너질 담벼락, 그것도 이미 다른 여러 사람이 무너뜨리려 하는 담벼락이었다. 거기에 손짓 한 번을 더하여 조금쯤 빠르게 무너지도록 하는 것은 그녀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월령안은 최씨 가문 시녀를 불러 시녀 앞에서 귓속말을 몇 마디 했다.
월령안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남들은 듣지 못하지만 옆에 서 있던 최 부인은 다 듣고 있었다.
최 부인은 저지하지 않고 시녀가 간 뒤 농을 쳤다.
"너도 참 뒤끝이 길구나."
월령안은 가볍게 웃었다.
"자기가 물에 빠진 것도 모르고 아무나 물어대는 개일 뿐이에요. 때리지 않으면 아깝죠. 때려도 누가 감히 저를 어쩌겠어요."
최 부인은 월령안이 아마도 눈치챘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영리하고 세상 물정에 훤한 월령안에게 감탄했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네 그 비딱한 도리도 참 그럴듯하구나."
다른 아가씨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하지만 최 부인이 웃자 하나같이 작은 목소리로 담소하며 허 낭자의 일은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일순간 정원에서는 또다시 웃음꽃이 만발했다.
바로 이때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갑자기 울렸다.
"모두들 정말 즐겁게 웃고 있네요. 제가 혹시 무언가 즐거운 일을 놓친 건 아니겠죠?"
말이 끝나자 붉은색 승마복에 털모자를 쓴 소녀가 해맑게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홍의 소녀는 예쁘고 명랑하며 대범했다. 얼굴의 미소는 아침 해처럼 모든 추위를 녹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뛰어 들어온 것과 또한 전혀 내외하지 않는 말투는 모두의 미움을 자아냈다.
아가씨들은 홍의 소녀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 부인 역시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말문을 닫았다.
정원에는 잠깐 적막이 흘렀고 분위기가 어색하기만 했다.
그러나 홍의 소녀는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스스럼없이 말했다.
"이런, 제가 자기소개를 하는 걸 잊었네요. 제 성은 야율이고, 이름은 아한입니다. 가문에서 다섯째라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은 저를 소오(小五)라고 불러요. 여러분들도 소오라고 불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