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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75)화 (575/1,004)

575화 여긴 진짜로 제 집이에요

"허 언니, 저 여자가…… 저를 놀려요."

안 낭자는 눈이 새빨개서 억울해하며 말했다.

그녀는 분명 허 언니의 말을 듣고 그녀를 도와 월령안을 괴롭혔다. 왜 허 언니가 자신을 돕기는커녕 질책하는지 알 수 없었다.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은 차갑고 도도하게 말했다.

"됐다. 너는 지체 높은 가문의 여식이잖니. 자기 신분을 스스로 낮춰서 하인과 따지지 말아."

그녀는 말하면서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월령안을 쓸어보더니 냉담하고 차갑게 말했다.

"까짓 아무것도 아닌 물건이야. 성낼 필요 전혀 없어. 그녀의 아버지는 왕년에 개처럼 내 아버지 발치에 꿇어앉아 개 노릇을 했지. 그리고 그녀의 오라버니가 내 오라버니의 말 노릇을 하고 있을 적에 저 여자는 어디에 있었는지도 몰라. 그냥 그저 그런 물건일 뿐인데 네가 성낼 필요가 어디에 있겠니."

탁!

월령안의 손에 들었던 잔이 깨졌다. 두 눈은 사람을 잡아먹을 듯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을 노려보았다.

'허씨 가문!'

정원의 분위기는 순간 굳어지고 말았다. 규수들은 저도 모르게 멍해져서 하나같이 서로 마주 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들은 듣지 말아야 할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안 낭자는 마치 정원의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듯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의 팔을 안은 채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했다.

"허 언니, 언니가 얘기한 물건이란 거 월령안 맞죠? 월령안의 그 상인 아버지가 개 같고, 그 비천한……."

월령안은 도저히 들어 줄 수가 없어 탁자를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봐라! 이 두 물건을 내보내거라!"

"네가 감히!"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은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그녀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렸다. 마침 입구에서 급히 다가오는 최 부인이 보였다. 그녀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떠올렸다.

'미래의 최씨 가문 가주 부인은 나여야만 해.'

최일의 부인은 반드시 그녀가 될 것이다. 월령안이 그녀와 그 자리를 다투려면 아마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월령안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북요에서 변고를 당했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그 두 사람은 그녀의 역린임을 알고 있었다. 말을 꺼내는 것도 조심스러워하는데 많은 이들 앞에서 모욕하고 짓밟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허국공부의 아가씨는 말로 월령안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모욕했다. 이는 기회를 타서 그녀를 격노시키고 남들 앞에서 품위를 잃게 함으로써 빌미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자리에 있던 아가씨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몰랐다.

허 낭자는 더구나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최 부인이 오는 것을 보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붙는 불에 기름을 부었다.

"월 낭자, 이는 최씨 가문 설개연이에요. 당신 아버지와 오라버니의 얘기를 들으려면 연회가 끝난 다음 다시 찾아오세요. 당신 개인 일과 사적 은원 때문에 최씨 가문의 설개연에 누를 끼치면 안 되죠."

허 낭자가 여러 차례 언사로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모욕하자 월령안은 확실히 격노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설개연에서 허 낭자와 시비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을 불러 그녀를 데려가라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허 낭자는 그녀의 호의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가 인정사정없다고 탓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월령안은 허 낭자를 냉랭하게 바라봤다.

"허 낭자, 조정의 국고 수입원 중에서 삼 할이 시박사에서 온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물론 알죠. 제 아버지께서 바로 시박사 제거(提擧)예요."

허 낭자는 일부러 담담한 척했지만 얼굴에 나타난 거만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그녀는 허국공부 출신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실권을 잡고 있었다. 또한 아버지는 천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심복이기도 했다.

"허 낭자는 알고 있나요? 십이 년 전 당신 아버지께서 시박사에 처음 갔을 때 자신의 고귀한 출신을 믿고 거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했어요. 그래서 모든 현지 대상인들의 미움을 샀었죠. 때문에 그해 해상(海商)들은 모두 출항하지 않았어요. 따라서 그해 시박사의 세수(稅收)는 그전의 일 할조차도 안 되었어요."

월령안은 말을 마치고 허 낭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 변화도 없었다. 이 고귀한 태생의 여인은 안방에 갇혀 있어 안목이 안방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안목이 근시안적이고 변경의 대다수 아가씨들보다도 못했다.

그러니까 이렇게 건방질 수 있는 것이다.

월령안은 눈 속의 예리함을 감추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말했다.

"허 낭자는 당신 아버지께서 그 구멍을 어떻게 막고 또 어떻게 시박사 제거 자리에 붙박이가 되었는지 아시나요?"

질문이 끝나고 허 낭자가 말하기도 전에 월령안이 의미심장하게 말을 이었다.

"바로 당신 어머니께서 가가호호(家家戶戶) 찾아다니며 홀로 대상인들과 서재에서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어서 바꾼 거예요."

"밤을 지새워…… 이야기를 나눠요?"

"혼자서…… 내가 생각하는 거랑 같은 의미인가?"

"어머나, 월 언니는 정말 못 하는 말이 없네요."

자리에 있던 아가씨들은 월령안의 말속에 뜻을 알아듣고 하나같이 얼굴을 감싸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최 부인은 누군가 월령안을 괴롭힌다는 하인의 말을 듣고 급히 달려왔다. 그녀는 월령안이 결코 손해를 입지 않은 것을 보고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또한 그녀를 알아본 아가씨에게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인사할 필요가 없음을 알렸다.

그녀도 남편이나 아들이 그토록 높이 사는 아가씨가 도대체 어떤 매력이 있는지 한번 보고 싶었다.

최씨, 월씨 두 가문은 앞으로 한배에 탈 수밖에 없었다. 만일 뜻밖의 일이 없다면 앞으로 월령안과 가장 많이 교제하게 될 사람은 틀림없이 그녀였다. 사전에 월령안을 조금쯤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다.

허 낭자는 이미 최 부인 앞에서 잘 보이려던 것도 잊고 말았다. 화가 나서 얼굴이 뒤틀린 채 다짜고짜 탁자를 치며 일어섰다.

"월령안, 건방지군요. 조정의 명부(命婦)를 모함하면 무슨 죄인지는 아세요?"

"제가 뭐라고 모함했는데요?"

허 낭자에 비해 월령안은 오히려 얼굴이 평온했다. 심지어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허 낭자는 화가 나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내 어머니를 모욕했잖아요! 월령안, 자기가 말한 걸 인정하지도 않으려고 하네요."

"모욕이 아니에요!"

월령안은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에 묻은 차 자국을 가볍게 닦았다. 경멸하는 표정이지만 얼굴에는 달콤한 미소를 띠었다.

"제가 직접 본 거예요. 십이 년 전, 당신 어머니께서 제 아버지 서재로 들어가는 것을 직접 보았어요. 안타깝게도 제 아버지는 공처가이셔서 놀라 뛰쳐나오고 집사를 시켜 처리하게 했죠. 이튿날 아버지께서 돈을 빌려주겠다고 대답했어요. 믿기 어려우면 여러분은 십이 년 전에 허 제거께서 우리 가문에 큰돈을 빌린 적이 있는지 조사해 보셔도 됩니다."

"월령안, 허튼소리 하지 마세요. 증거가 있나요? 증거가 없으면 제가 폐하 앞에 가서 당신을 고발할 거예요! 폐하 앞에서 당신이 무슨 변명을 하는지 보고 싶군요."

허 낭자의 아버지는 황제의 심복이었다. 그녀는 황제가 월령안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월령안은 얼굴에서 웃음을 거두고 음침하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

"허 낭자가 제 아버지와 오라버니에 대해 말한 건 증거가 있나요? 증거가 없으면 저를 탓하지 마세요. 허국공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당신을 내던져 버릴 거니까요!"

"제가 직접 봤어요."

허 낭자는 꿋꿋하게 가슴을 쭉 펴고 눈동자를 굴리더니 거만하게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감히 제 어머니를 모욕하다니.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사과하세요.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오라버니가 개, 돼지보다 못하다고 말하세요. 오늘 설개연 자리인 만큼 제가 당신과 따지지 않을게요."

"흥."

월령안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반나절 말해도 증거가 없는 거잖아. 그렇다면 허 낭자 제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고 탓하지 마세요."

월령안은 손수건을 거두고 냉담하게 명령했다.

"여봐라, 허 낭자를 자리에서 내보내거라."

허 낭자는 지금 이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최 부인이 옆에 있는 것도,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것도 모두 잊어버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나보고 나가라고? 월령안, 이는 최씨 가문 설개연이에요. 당신은 여기가 당신 집인 줄 알아요? 나를 어떻게 내보내? 당신에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죄송하군요. 여긴 진짜로 제 집이에요. 이제 저한테 충분히 자격 있죠?"

월령안은 허 낭자에게 빙긋 웃어 보이며 몸을 돌려 쌀쌀한 얼굴로 하인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가만히 앉아서 뭣들하는 것이냐?"

하인은 잠깐 망설이다가 울며 겨자 먹기로 앞으로 나아갔다.

"네, 월 낭자."

"월령안, 당신이 감히!"

허 낭자는 하인이 정말로 다가오자 어쩔 줄을 몰랐다.

당당한 국공부의 여식이 일개 여 상인에게 내쫓기다니 무슨 낯으로 사람을 만난단 말인가.

"허 낭자, 자……."

하인은 자기 집 주인이 여러 차례 주의를 주던 일이 떠올랐다. 월령안을 주인으로 간주하고 그녀의 명령이 곧 최씨 주인의 명령이라고 했었다. 하인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냉담한 얼굴로 다가갔다.

"허 낭자께서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인이 무력을 사용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최씨 가문은 이렇게 손님 접대를 하는가요?"

허 낭자는 화가 나서 피를 토할 뻔했다. 그녀는 문득 좀 전에 최 부인이 오는 것을 봤던 게 생각났다. 최 부인이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한쪽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허 낭자는 마음속의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말했다.

"당신들 부인을 만나야겠어요!"

"허 낭자, 여기 있습니다."

최 부인은 줄곧 입구에 서서 특별히 티를 내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지금 허 낭자가 입을 열자 최 부인도 물러서지 않고 대범하게 나섰다.

"부인, 저를 위해 억울함을 풀어 주세요."

허 낭자는 최 부인을 보자마자 금세 눈이 새빨개졌다. 마치 무척이나 괴롭힘을 당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허 낭자께서 억울한 일을 당했군요. 저희 최씨 가문에서 접대가 변변치 못했습니다."

최 부인은 얼굴에 부드럽고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허 낭자는 처음에는 억울한 척을 한 것이었지만 최 부인의 자애로운 모습을 보자 마음속의 억울함이 정말로 걷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더니 마치 새끼 제비가 숲에 날아들듯 최 부인에게 안겨들며 울면서 말했다.

"부인, 끝내 오셨군요. 좀만 더 늦게 오셨으면…… 저는 저 여 상인에게 구박당해 죽을 뻔했어요."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아가씨가 울면 눈이 빨갛게 돼 예쁘지 않아요."

최 부인은 먼저 손을 뻗어 허 낭자를 부축하며 그녀가 품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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