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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70)화 (570/1,004)

570화 작위는 작위, 권리는 권리일 뿐

육장봉은 일어서서 손을 마주쳤다.

"폐하, 구리파의 사건이 시급하여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육장봉은 황제가 반응하기도 전에 돌아서서 떠나갔다.

황제는 육장봉을 불러 세우고 싶었지만 입만 달싹일 뿐, 한 글자도 내뱉을 수 없었다.

황제를 등진 육장봉은 비웃는 얼굴을 드러냈다.

장씨 가문이 황제가 월령안에 대한 불신과 경계를 이용하여 황제가 최 대학사를 수상으로 임명할 가능성을 없애려고 했다. 그도 황제가 청주를 중시하는 것을 이용하여 최 대학사를 수상으로 임명하지 않으면 안 되게 했다.

황제가 월령안더러 그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게 하고 싶다면 먼저 성의를 보여야 한다.

최 대학사를 수상으로 임명하는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

이번에 황제는 아주 빠르게 일을 추진했다.

이튿날 바로 이부에 명령해 최 대학사를 수상으로 임명한다는 것을 발표하게 했다.

이부상서는 잠깐 멍해졌다가 공손하게 명을 받고 황제의 요구대로 공문을 작성했다.

물론, 이부상서는 아랫사람이 장 부승상에게 말을 전하는 것 또한 막지 않았다.

이부상서는 지위가 높고 권력이 센 자리였다. 그는 장 부승상에게 아부를 떨 필요는 없었으나 장 부승상과 원한도 없었다. 그는 장 부승상의 편을 들어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랫사람이 장 부승상에게 치우치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결국, 장씨 가문이 조정에 있는 이상, 조정에서는 장 부승상에게 협력하는 관리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관계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어도 그러기 힘들었다.

마찬가지로, 최 대학사가 수상이 된다면 이부에서도 최 대학사에게 아부를 떨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황제의 명령이 내려지고 이부의 공문도 나오기 전에 장 부승상과 최 대학사는 소식을 받고 황제의 결정을 알게 되었다.

장 부승상의 안색은 실망한 기색이 없이 평온했다. 심지어 웃으며 연신 여러 번 칭찬하기까지 했다. 장 부승상에게 말을 전한 이부의 관리는 어리둥절해졌다. 장 부승상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반대로, 오공자는 썩 기분이 좋지 못했다. 이부의 관리가 있을 때도 그의 표정은 관리하기 어려웠다. 이부의 관리가 떠나자마자 오공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할아버지, 제가 잘못한 건가요?"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장 부승상이 반문했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네가 그제에 월령안을 만나러 갔고 폐하께서 오늘에 최 대학사를 수상으로 임명하셨는데 저의 그 말 때문인 것이 맞나요?"

만약 상관이 없다고 하면 그는 믿지 않을 것이다.

너무 공교로웠다.

장 부승상은 고개를 저었다.

"다섯째야, 네 그 말은 너도 생각해 낼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겠느냐? 넌 단지 일을 추진했을 뿐이다. 넌 아직 조정의 바람을 좌지우지할 힘이 없다."

장 부승상은 오공자에게 타격을 주고 싶지 않았으나 사실이 이러했다. 그는 손자를 위로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오공자는 잠깐 멍해졌다가 고개를 숙이고 씁쓸하게 말했다.

"제…… 제가 너무 자신을 높이 봤나 봐요."

"그래! 넌 너무 네 자신을 높이 보았단다! 수상의 다툼에서 너는 작은 졸병일 뿐이다. 너뿐만 아니라 네 할아비인 나도 일개 졸병일 뿐이다."

장 부승상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진작에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이십 년 동안의 노력과 기대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내려놓는다고 해서 내려놓아 지는 것이 아니었고 신경 쓰지 말자고 해서 신경이 안 써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최 대학사처럼 소탈하지 못했다.

오공자는 고개를 숙이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 * *

거의 동시에, 최 대학사도 황제가 이부를 명해 그를 수상으로 임명한다는 공문을 발표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 대학사는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구나, 사직을 하지 못했으니."

소식을 받은 후, 미리 최 대학사에게 축하해 주러 온 관리들은 이 말을 듣고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서로 바라보며 부러움에 찬 시선을 했다. 더욱 많기는 씁쓸함이었다.

'역시, 복이 있는 사람은 서두를 필요가 없고, 복이 없는 사람은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뛰어다니는구나.'

옆 사람들은 수십 년을 바삐 보냈는데도 가질 수 없는 수상의 자리를 최 대학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덥석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하지도 않았다.

씁쓸한 것은 씁쓸한 것이고, 축하할 것은 여전히 축하해야 하고 아부할 것은 그래도 아부해야 했다.

최 대학사는 황제가 직접 정한 수상이었다. 최 대학사가 화를 자초하지 않는 이상, 황제는 자기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쉽사리 최 대학사를 갈아치우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수십 년의 조정 대권은 모두 최 대학사의 손에 있게 될 터였다. 그들이 질투하고 쓸씁하게 여긴다 해도 내색하지 말아야 했다. 최 대학사가 알아채게 해서는 안 되었다.

황제는 장 부승상과 최 대학사의 반응을 가장 먼저 알게 되었다.

장 부승상의 반응은 황제의 예상대로였다.

장 부승상은 줄곧 이랬다. 희비가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마치 그가 감정을 드러낼 일은 없는 듯했다. 이것 또한 황제가 장 부승상을 꺼리는 이유이기도 했다.

장 부승상은 속셈이 너무 깊고 수단이 너무 독했다. 심지어 자기의 가족마저도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버렸다. 비록 능력이 있으나 황제는 그를 쓰기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특히 장 부승상이 너무 세력이 강해서 그는 장 부승상이 수상이 되면 황제인 그는 바로 꼭두각시가 되어 무슨 일이든지 장 부승상의 말을 듣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최 대학사의 반응은 황제를 기쁘게 했다.

"짐은 이번에는 틀리지 않은 듯하구나."

황제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루 종일 억눌렀던 우울한 기분이 순식간에 감쪽같이 사라졌다.

황제는 최 대학사를 수상으로 임명한 것을 큰 모험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최 대학사를 수상으로 임명한 것은 최 대학사 이 사람 때문이 아니었다. 육장봉의 말을 듣고 월령안이 걱정이 없이 청주로 가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때, 최 대학사의 반응을 알게 된 황제는 조마조마했던 마음을 비로소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는 세력이 강한 승상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말을 잘 듣는 승상만 있으면 되었다. 만약 능력이 있는 것과 고분고분한 것 중에서 고르라고 한다면 그는 지체하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다.

지금까지 최 대학사가 보인 반응은 그가 승상에 대한 첫 번째 요구에 부합되었다.

* * *

최 대학사가 승상이 된 뒤, 최씨 가문의 지위도 점차 올라갔다.

최씨 가문의 사람과 친분을 쌓으려는 사람들도 수없이 많아졌다. 최씨 가문의 설개연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라는 것을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이 관계를 총동원하여 설개연의 초대장을 얻려고 했다.

최 대학사는 비록 고상하고 소탈한 인물이었지만 통속적인 사람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승상은 고귀하고 권리가 강했지만 조정 대신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벼슬을 하고 있다면 누구든지 동료들과 반드시 교류를 해야 했다. 교류를 하지 않더라도 미움을 사면 안 되었다.

또 찾아온 사람들의 신분이 대체로 낮지 않았다. 스스로 설개연에 참가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최씨 가문도 거절하기 난감하여 연회의 규모를 확장하고 초대 손님들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낙원이 충분히 커서 수백 명의 연회도 수용할 수 있었다. 다만 장군왕 세자가 고생할 뿐이었다. 짧디짧은 이틀 안에 최씨 가문에서 요구하는 술과 선물의 양이 두 배로 되었다. 그가 전에 찾았던 공방은 짧은 시간 안에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장군왕 세자는 하는 수 없이 육 대장군에게 혼날 각오를 하고 명월산장으로 가서 월령안에게 도움을 청했다.

월령안은 불쌍한 장군왕 세자의 몰골을 보고 귀찮았지만 또 웃음이 나기도 했다.

"얼마나 큰일이라고 이렇게 급해 하시나요?"

최 대학사가 임명되자 월령안의 기분은 무척 좋아졌다. 저절로 장군왕 세자 또한 좋게 보였다.

월령안은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공방에서 작은 술병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몇 가지 선물을 더 준비하세요. 손님의 수를 정확히 통계하여 남, 녀의 선물을 구분해서 만드는 거예요. 남자들한테는 술을 주고, 여인들한테는 은양당의 꽃을 주는 것이죠. 정 안 될 것 같으면 미인방의 장신구를 줘도 됩니다."

장군왕 세자가 잘 처리하지 못할까 걱정된 월령안은 또 다른 방법도 내놓았다.

"만약 이렇게도 하기 힘드실 거 같다면 정교한 선물 함을 준비하세요. 선물 함 안에 값어치가 크게 안 나가는 비단 조화를 넣고 또 엽서를 두 장 넣으세요. 한 장은 그 술을 사면 일 할 깎아 주는 엽서고 다른 한 장은 그 엽서로 술 가게가 개업하는 날, 설개연의 술과 같은 것을 가져갈 수 있는 거예요."

말을 마친 월령안은 또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이 방법은 사람들에게 불만을 일으킬 수 있어요. 가장 좋은 선물은 사람마다 다르게 만들어서 각자의 마음에 쏙 들게 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을 때는 같은 위치였던 사람들도, 부탁을 하기 시작하면 낮아지게 된다.

장군왕 세자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처럼 다른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은 말을 하자마자 이상함을 느끼고 제때 멈췄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했다.

"당신은 장군왕 세자시니 그들과 평등한 관계지요. 이토록 자세하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장군왕 세자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사를 하는 것에 있어서는 아무리 자세해도 과한 게 아니지."

장군왕 세자는 다급히 설개연에 초대된 손님들의 명단을 내놓았다.

"한 가지 일에 두 주인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 법. 이 사람들의 선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좀 봐 줘."

"당신은 장군왕 세자세요. 그들은 당신의 선물을 받았을 때, 기뻐하기만 할 뿐, 불만이 없을 거예요."

월령안은 명단을 들고 바로 찾아보지 않고 오히려 장군왕 세자를 설득했다.

장군왕 세자는 손을 내저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장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상업계의 규칙대로 해야지.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너한테서 잘 배우라고. 모든 것은 상업계의 규칙대로 해야지 신분으로 사람을 깔아뭉개면 안 된다고. 자기가 장군왕부 세자라고 대단하게 여기지 말라고.

신분이란 말이야…… 뭐라고 했더라? 아,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어. 장군왕부가 내 손에까지 물려 내려올 때쯤이면 겨우 국공부가 될지도 모르고 그다음에는 후부, 또 몇 대를 걸치면 작위도 없어질지도 모르는 거야."

장군왕 세자는 확 트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작위는 작위고, 권리는 권리일 뿐이야. 이 경중에 공부, 후부가 얼마나 많은지 넌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멀리도 말고 영녕후부만 해도 그래. 전에 청희 장공주 손에 있는 병권을 믿고 있을 때, 경중에서 누가 감히 그들을 난감하게 했어? 우리 집은 군왕부라고 해도 그들의 물 탄 술에 밀려 술 장사도 못했고 말이야.

그런데 지금은? 지금 누가 아직도 영녕후부를 안중에 두고 있어? 물론, 난 신분을 핑계로 사람을 괴롭히지 않지만 다른 사람이 우리를 괴롭히게 두지도 않지. 우리가 장사할 때, 규칙을 지킨다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따라 규칙을 지킬 거야. 누가 감히 그른 길로 가려고 한다면 내가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우리 아버지는 놔주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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