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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64)화 (564/1,004)

564화 아주 괜찮은 사람

이 말을 들은 장군왕 세자는 그만 화가 났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넌 내가 오고 싶어 온 줄 아는 거야! 우리 아버지 때문이지! 어제부터 나더러 널 찾아가라고 하도 재촉을 하셔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분은 이렇게 쌓는 것이라며 나더러 일이 없으면 널 찾아 함께 놀라고 하셨단 말이야.

여러 번 다니다 보면 익숙해질 테고 나중에는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는 막역한 사이가 될 것이라고. 나중에 내가 무슨 일이 생기거나 최일처럼 중독되기라도 하면 네가 목숨을 살려 줄 수도 있다고 말이야."

장군왕 세자는 아주 철저하게 장군왕을 팔아먹었다.

"우리 아버지는 네가 폐하나 최씨 가문보다 훨씬 믿음직하다고 하셨어. 폐하와 최씨 가문은 이번에 정말…….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니 이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다 수군거린대. 폐하와 최씨 가문이 이번에 체면이고 뭐고 전부 잃었다고. 황실과 세가가 월령안 이 기댈 데 없는 어린 여자애보다도 못하다고."

장군왕 세자는 말할수록 신이 나서 해야 할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전부 말해 버렸다.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팔아먹는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나서서 열정적으로, 또 스스로 깨닫지도 못 하면서 팔아먹는 꼴은 본 적이 없었다.

'장군왕은 참 쉽지 않겠군. 아니, 지금 쉽지 않은 사람은 나야. 장군왕 세자 이 협력자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장군왕 세자의 말을 들어 보니, 장군왕은 자기 아들을 나한테 맡기려는 거야? 내가 지금 약속을 깨뜨리고 장군왕부와 협력을 끊어도 되는가?'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가 오늘 자기 아버지를 엿 먹이는 것처럼 나중에 자기도 엿 먹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하고 싶지 않았지만 협력을 중단할 수도 없고. 그렇다면……."

가늘게 뜬 월령안의 눈에 위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서 아저씨께 맡겨? 아니면 최 숙부님께?'

서 선생의 수단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직접 두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독왕 아포처럼 멍청한 사람도 서 선생의 손에서 하룻밤 만에 고분고분해졌다. 이건 서 선생의 능력이었다.

다만 서 선생의 수단은 잔혹하고 폭력적이라 세자가 너무 나약하여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녀는 비록 최 대학사의 수단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최일을 이토록 훌륭하게 키워낸 것을 보면 결코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자의 신분 때문에 그녀는 최 대학사가 독하게 손을 쓰지 못할까 두려웠다.

'참 어느 것도 난감하군.'

월령안은 턱을 만지작거리면서 수심에 찼다.

장군왕 세자는 비록 똑똑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위험에 아주 민감했다.

월령안의 시선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자 장군왕 세자는 바로 입을 다물고 뒤로 몸을 사렸다. 그리고 경계의 눈빛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령, 령안, 너 괜찮아?"

월령안은 그의 시선이 마치 죽음을 기다리는 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요."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가 이토록 예민할 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장군왕 세자에게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아무 일도 없는 척, 시선을 거두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물었다.

"술이 곧 올 텐데 술 가게의 장식이 어떻게 되었나요? 개업 시간을 정하셨어요? 개업 날에 어떤 수를 써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지는 생각해 두었어요?"

장군왕 세자는 역시 그다지 영리하지 못했다. 월령안이 묻자 그는 바로 방금 전의 경계를 늦추고 신이 나서 말했다.

"생각했지! 만약 우리가 최씨 가문의 설개연에 술을 공급할 수 있다면 우리는 최씨 가문이 설개연을 여는 그날에 맞춰서 개업을 할 거야. 안 된다면 아무 날이나 잡아서 우리 아버지더러 종실 친왕 몇 분 모셔서 자리를 빛내 달라고 하면 되지. 또 그들이 크게 주문을 하게 해서 우리 인기를 올리는 거야. 어때?"

"어떻긴요!"

월령안은 퉁명스럽게 장군왕 세자를 흘겨보았다.

"최씨 가문의 설개연은 경중 태반의 귀족 여인과 공자들의 이목을 끌고 있어요. 그날에 개업을 한다면 와서 흥을 돋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럼 세자의 술 가게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확신해요?"

장군왕 세자는 기 죽지 않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럼 설개연 전에 여는 거야! 아버지더러 아저씨 몇 분과 거상 몇 분이 와서 술을 많이 사라고 하고 명성을 날리는 거야. 명성을 날리지 못해도 우리 아버지가 끌어온 사람들이 분명 우리한테 이익을 남겨 줄 거야. 손해 보지 않을 거라고."

말을 마친 장군왕 세자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우쭐거리며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나 아주 대단하지'라고 써 놓은 꼴이었다.

월령안은 아버지를 엿 먹일 줄밖에 모르는 장군왕 세자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던 터라 지금 화도 나지 않았다.

칭찬만 바라는 세자를 무시하며 월령안은 침착하게 말했다.

"자기 사람의 돈을 버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해요. 첫날에 군왕께서 홍보해 주기를 부탁하는 것은 물론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군왕의 사람만 가지고 흥을 돋우기에는 기세가 작아요. 사람들의 이목도 끌지 못할 거고요."

"그……. 그럼 어떡하지?"

제안을 연속 두 개나 월령안에게 거절당한 장군왕 세자는 순식간에 풀이 죽었다. 가련한 얼굴로 월령안을 바라보며 물기 어린 시선에는 도움을 바라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하는 수 없었다. 그는 두 가지 방법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더는 없었다.

월령안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설개연에 술을 공급하는 일을 최대한 많이 따내세요. 가격 쪽으로는 손해 보지 않기만 한다면 다른 것은 다 상의할 수 있어요. 따낸 뒤, 바로 잘 아는 공방을 찾아 설개연의 술을 위해 술 주전자를 주문하세요. 술 주전자는 반드시 정교하고 품위가 있어야 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지는 최씨 가문 사람들과 상의해도 돼요. 최씨 가문의 안목은 세가 귀족의 안목을 대표하는 거예요. 그들이 괜찮다면 정말로 괜찮은 거예요.

술 주전자의 모양을 주문하고 나서 선물 상자도 주문하세요. 선물 상자 안에는 각각 다른 술 세 가지를 넣을 수 있어야 해요. 술 주전자는 최씨 가문 설개연의 술 주전자와 같은 모양인데 크기는 삼 분의 일 정도면 돼요.

이 선물 상자는 인사로 선물할 거예요. 그날 연회를 참가하러 최씨 저택으로 온 사람들에게 주세요. 선물 상자 안에 정교하고 얇은 동 엽서를 넣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정면에는 '설개연 특별 공급' 몇 자를 쓰고 뒷면에는 술 가게의 개업 날짜를 쓰세요. 그리고 개업하는 날에 술을 살 때, 동 엽서를 보이면 시장 가격보다 일 할 싼 가격에 살 수 있다고 하세요. 그리고 그날 술을 가장 많이 산 열 명은 평생 일 할 싼 가격을 누릴 수 있다는 등 문구를 써 넣으시고요."

월령안은 별로 생각을 거치지 않고 바로 홍보하는 방법을 나열했다. 그녀가 말을 마치지도 않았는데 장군왕 세자는 멍해졌다.

"이, 이래도 되나?"

"왜 안 되겠어요? 최씨 가문의 설개연이 뒤를 봐주는데 두려울 것이 뭐가 있겠어요?"

월령안은 반문하며 웃었다.

"또 설개연 말고도 저한테 비장의 무기가 있어요."

"어떤 비장의 무기?"

장군왕 세자가 물었다.

"대장군부의 주문이죠!"

월령안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최씨 가문의 설개연은 성 밖에서 열려요. 술을 성안으로 운반했다가 또 성 밖으로 운반하면 너무 의도적인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성 밖에서 장군왕부로 운반하면 어떻게 해도 의도적으로 보이지 않죠."

"그 말은?"

장군왕 세자의 눈이 빛이 났다.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군께서 동의하시겠어?"

장군왕 세자는 불안한 듯 물었다.

"왜 대장군부 사람들의 허락을 받아야 하죠? 장사는 세자 것이에요. 어느 날에 개업하든, 세자의 뜻에 달렸죠."

'세자는 역시 세자군. 너무 어설프네. 이러니 장군왕이 그에게 도박장 정도만 맡겼지.'

세자의 머리로는 도박장같이 배후 세력만 있으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는 사업만 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세자는 손해만 잔뜩 보았을 것이다.

"대장군부의 사람이 그날 나한테 협조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

장군왕 세자는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월령안은 스스로에게 화를 내지 말자고 다짐했다.

세자는 비록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신분이 훨씬 낮은 그녀를 상대로 골탕 먹이지 않고 물어볼 줄 아는 것만으로도 아주 괜찮은 사람이었다.

월령안은 미소를 유지하며 하나하나 가르쳤다.

"먼저 대장군부의 사람들과 술을 건네주는 날짜를 잡으세요. 흰 종이에 검은 글자로 계약하는 거예요. 개업하는 날짜는 바로 그날로 정하면 됩니다. 두 가지를 정하고 최씨 가문의 설개연에 어떤 사람들을 초대했는지 알아보는 거죠. 명단을 작성하고 신분과 배경도 써야 해요.

그리고 당신 아버지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술 가게가 개업하는 날에 대장군이 가게에서 높은 가격으로 술을 산 일을 아버지께 말씀 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거예요. 큰 예외가 없는 이상, 대장군과 명단의 세가 공자들이 와서 자리를 빛낼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께 부탁드려서 신분이 비슷한 종실 사람들이 오게 하세요. 너무 실례되지 않게요."

"이건 사기……."

장군왕 세자의 얼굴에는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여는 순간, 월령안에게 말이 잘렸다.

"제 말을 끝까지 다 들으세요!"

"들을게, 들을게."

장군왕 세자는 바로 겁을 먹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도 대들지도 않고 고분고분하게 굴어서 월령안은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협력자가 있는데 나더러 더 어떡하라고? 내가 더 신경 쓸 수밖에.'

내려놓기로 마음 먹은 월령안은 장군왕 세자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린다고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장군왕 세자는 비록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고 그다지 똑똑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말은 잘 들었다.

배후가 좀 있는 협력자로서 세자는 무턱대고 그녀더러 감 놔라, 배 놔라 가르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이렇게 순순히 말을 잘 들으니 그녀는 마땅히 만족해야 했다.

월령안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많이 부드러워졌다.

"세자 전하, 아버지께서 전하께 명단을 작성해 준 뒤, 전하는 그 명단과 대장군부와 쓴 계약서, 그리고 우리의 술을 가지고 최씨 저택으로 가서 최 대학사와 설개연에 술을 공급하는 일을 상의하세요.

최 대학사가 술을 시음해 보기 전에 먼저 명단과 계약서를 보여 주는 거예요. 그리고 술 가게가 개업하는 날에 명단의 사람들이 도착할 거라고, 대장군부의 사람도 올 수 있을 거라고 말하세요.

그리고 또 세자가 설개연을 위해 특별히 술 주전자를 주문할 것인데 최씨 가문의 설개연만 위해 쓰겠다고 말하세요. 그리고 설개연에 참가하는 손님들에게 선물도 줄 거라고요. 선물에는 술 말고도 설개연을 위해 특별 제작한 동 엽서가 있는데 이것으로 술을 사면 일 할 싸게 살 수 있다고 하세요."

말을 마친 월령안은 또 한마디 덧붙였다.

"세자는 반드시 최 대학사가 이 동 엽서와 선물은 최씨 가문에 초대받은 손님에게만 제공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제공되지 않을 것을 강조해야 해요. 이 말을 마치고 최 대학사가 시음을 하게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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