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0화 알면서 나한테는 왜 그랬나?
염 황숙이 말도 없이 떠난 이후로 월령안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안정감마저 사라졌다.
그는 염 황숙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육장봉은 최일과 얘기를 나눌 마음이 사라졌다. 그는 빠른 속도로 말했다.
"이 일은 당신과 최씨 가문 모두에게 좋은 점이 있네. 잘 생각해 보게. 자기의 이익만 생각해. 나와 월령안의 생각은 고려할 필요는 없네. 나도 자네가 지금 결정 내리길 바라는 것은 아니니 집으로 돌아가서 최 대학사와 상의해 보게. 그리고 집으로 돌아간 뒤, 최 대학사에게 잊지 말고 월령안이 나한테 그를 추천한 것이라고 말하게. 만약 월령안이 입을 열지 않았더라면 난 자네 아버지를 추천하지 않았을 거네."
마지막 말을 마치지 않았는데도 육장봉은 일어서서 급한 기색으로 말했다.
"갑자기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떠올랐네. 난 먼저 가야겠군. 자네는 마음대로 하도록."
말을 마친 육장봉은 최일이 생각할 시간을 전혀 주지 않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멀리 가 버렸다.
최일은 일어서서 급히 떠나는 육장봉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월령안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이 둘은…… 떠날 때도 똑같이 깔끔하고 머뭇거림이 없구나. 그리고 이 일은 정말로 잘 생각해 보아야겠어.'
최일은 아주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눈매가 휘어질 때, 그의 시선에 드리운 우울한 기색도 옅어졌다. 반짝이는 불빛 아래서 그는 마치 빛을 발하는 것처럼 황성사의 어둡고 잔혹한 기운을 몰아내고 있었다.
* * *
밤이었다. 육장봉은 금군을 피해 궁으로 잠입했다. 그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연복궁에 나타났다.
연복궁에 도착한 육장봉은 무모하게 노인의 침소로 쳐들어가지 않고 일부러 소리를 내어 노인에게 사람이 왔다는 것을 알렸다.
이 각 뒤,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너라."
"황숙."
육장봉은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노인에게 예를 올렸다.
"무슨 일이냐?"
노인은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육장봉은 진작에 노인의 차가움에 익숙한지라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는 태연자약하게 노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황숙, 언제 시간이 되시면 제가 황숙과 월령안이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질문도, 부탁도 아닌 통보였다.
노인은 냉소를 지었다.
"왜? 최일이 령안에게 구혼한 일이 널 자극했느냐?"
육장봉은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께서 아셨나요?"
'폐하의 사람이 줄곧 월령안을 지켜보나?'
"흥."
노인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육장봉을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육장봉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침착하고 차분하게 물었다.
"최일은 월령안의 능력을 과소평가했고 폐하 마음속에서의 월령안의 가치도 과소평가했습니다. 청주의 일이 끝나지 않는다면 폐하께서는 절대 월령안이 시집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꺼지거라! 난 너희들을 보고 싶지 않다!"
노인은 탁자 위의 찻잔을 들고 육장봉에게 던졌다.
육장봉은 피할 수 있었지만 피하지 않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찻잔은 육장봉의 이마에 부딪히고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자기 조각이 바닥에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육장봉의 이마에도 피가 흘렀다.
노인은 육장봉을 힐끗 흘겨보고 차갑게 비꼬았다.
"왜? 또 고육지책을 쓰게?"
육장봉은 해명하지 않고 옅은 하늘색 손수건을 꺼내 얼굴의 핏자국을 닦았다.
"황숙, 령안이는 외로워요. 황숙께서 떠나시고 그녀에게는 자기 자신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녀는 혼자서…… 아주 힘들어요."
손수건의 한쪽 자락에 하얀 배꽃이 수놓아져 있었다. 배꽃 아래에는 '장봉' 두 글자가 있었다. 하지만 '봉'자는 마무리가 되지 못했다. 마지막 한 획이 부족했다.
이 손수건은 월령안이 버림받기 전에 육장봉을 위해 수놓던 손수건이었다. 그때 월령안은 서재에 있었다. 그녀는 이 손수건을 방으로 가져가는 것을 잊은 탓에 육장봉이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손수건에 수놓는 것을 마치지도 못하고 그녀는 육씨 저택을 떠났다. 이 손수건도 마무리될 기회가 없었다.
"아껴야 할 때는 안 아끼고. 넌…… 자업자득이야!"
노인은 육장봉 손에 든 손수건과 한쪽 귀퉁이에 덜 수놓인 글자를 보았다.
육장봉은 얼굴의 피를 닦고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접었다.
"황숙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껴야 할 때 반드시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잃은 뒤에야 후회하면 안 되죠."
"네가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
노인은 비꼬며 코웃음을 쳤다.
육장봉은 손수건을 잘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시 한번 부탁했다.
"황숙, 월령안을 만나세요. 그녀는 얼마 전에 염명경 귀시에서 돌아왔습니다. 그녀 혼자서 아주 지치고 힘든 상황이에요. 그녀는 황숙 말고는 누구에게도 자기가 얼마나 많은 위험을 겪었는지,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당했는지 토로하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녀는 홀로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어요. 시간이 오래 지나면 그녀에게 속병이 날까 걱정됩니다."
노인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애는 누구에게도 자기가 얼마나 많은 위험을 당했는지 서러움을 토로하거나 알려 줄 필요가 없단다. 너희는 령안이의 빛나고 멋지고 호기로운 면만 보면 된다. 나는……."
노인은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난 령안이를 만나러 가지 않을 것이다. 그 애는 혼자인 것에 익숙해져야 해."
"모든 일을 잘 배치하고 절대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육장봉은 재차 말했다.
그러나 노인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만나지 않을 것이다!"
'만난들 또 무엇 하리? 내가 령안이와 얼마나 더 함께할 수 있겠어? 령안이는 결국 언젠가 혼자인 것에 익숙해져야 해. 그리고 한 번 보고 헤어질 때, 령안은 또 울 것이고 또 슬퍼할 것이며 또 아파할 것이야. 그때마다 나도 마음 아플 것이고.'
"만나지 않으시겠으면 그녀에게 편지를 쓰세요. 제가 직접 그녀에게 가져다주겠습니다. 그녀가 다 보고 난 뒤, 바로 찢어 버리게 할 겁니다."
육장봉은 한걸음 물러서며 다른 것을 요구했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목표였다.
염 황숙이 월령안을 만나게 하는 것은 장기적인 계획이 아니었다.
"넌 꺼져도 된다!"
노인은 차갑게 육장봉을 쫓아냈다.
"황숙, 월령안이 말한 것인데 등요 공주가 너무 멍청하여 서남에 시집간다면 그녀에게 오히려 역효과만 내올 수 있다고 합니다. 등요 공주를 태후와 함께 강녕부로 보내서 폐하 대신 효도하게 하는 것이 어떨까요?"
육장봉은 노인의 공격을 피하며 말했다.
"그건 령안이의 말이 맞다."
노인은 사람을 쫓던 동작을 잠깐 멈췄다. 육장봉은 그 틈을 타서 내실로 들어갔다.
"황숙 말씀대로 월령안의 말이 맞습니다. 황숙, 저는 지위가 낮고 말에 힘이 없어서 폐하 앞에서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황숙, 폐하께 글을 좀 써 주세요. 황숙의 말 한마디는 저의 그 어떤 말보다 더 효과 있습니다."
노인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육장봉은 지금 감출 수 없다고 감추지 않는 건가?'
"황숙께서 만약 유일무이한 분이 아니었다면 저도 부탁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육장봉은 노인을 바라보며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모든 것이 황숙과 상관이 없습니다. 아닙니까?"
노인은 육장봉을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육장봉은 노인이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됐어. 종이와 붓을 가져오너라."
"황숙, 걱정하지 마십시오. 앞으로는 제가 있습니다."
육장봉은 나갔다가 무려 이각이 지난 뒤에야 돌아왔다.
육장봉이 가져온 종이와 붓은 척, 보아도 황제가 쓰는 것이었다. 노인은 힐끗 훑어보고 속으로 육장봉의 섬세함에 찬사를 보냈다.
"황숙."
육장봉은 옆으로 서서 살뜰하게 노인을 위해 먹을 갈았다.
노인은 붓을 들고 등요 공주에 대한 글을 썼다.
"나는 글을 마칠 때, 마지막 한 획에 붓의 가는 털을 놓고 먹으로 덮는 버릇이 있단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지."
말을 마친 노인은 직접 시범을 보였다. 끝마치고 나서 노인은 육장봉과 자세히 보았냐고 묻지도 않고 붓을 던지고 그더러 꺼지라고 했다.
바라던 바를 이룬 육장봉도 남아서 신경을 거스르지 않고 노인이 쓴 종이를 든 채, 황제를 만나러 난각으로 갔다.
* * *
금군은 난각에서 십여 걸음 밖을 지키고 있었다. 난각에서 퍽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반반은 난각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육장봉이 다가오더니 금군에게 물었다.
"대장군께 아룁니다. 조왕 전하께서 난각에 계십니다."
수비하고 있던 금군은 또 두위였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난각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난각 안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짐은 네가 궁을 나갈 수 없다고 말했다! 궁을 나갈 수 없다. 무슨 뜻인지 모르냐?"
"대……."
이반반은 멀리서부터 육장봉을 보고는 본능적으로 높이 소리를 지르려고 했다. 황제와 조왕이 들을 수 있도록 미리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반이 입을 여는 순간, 육 대장군이 내뿜는 죽음의 시선을 받고 말았다.
이반반은 순간 깜짝 놀라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육장봉은 그의 곁을 지나며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이반반은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다. 육장봉이 멀리 가서야 이반반이 자신이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올해 분명 신령님을 노하게 한 게 틀림없어. 올해 정말 운이 없다고!'
난각 안에서는 황제와 조계안이 아직도 다투고 있었다.
조계안은 포악함으로 가득 차서 소리를 질렀다.
"전 오늘 황형이 제 다리를 분지르지 않는 한, 반드시 궁을 나갈 겁니다! 아니, 다리만 분질러도 안 되지요. 다리가 없으면 전 기어서라도 궁을 나갈 수 있으니까요. 황형, 아니면 바로 절 때려 죽이세요. 그러면 제가 궁을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거예요."
"짐이 몇 번이나 말했느냐? 월령안이 최일을 거절했다고, 최일의 청혼을 승낙하지 않았다고. 그런데 네가 최일을 괴롭히러 가면 재미있겠느냐?"
"당연히 재미있죠! 전 그에게 친구로서 그래고 되는 거냐고 물을 겁니다! 친구의 아내는 건드리지 말고, 친구가 좋아하는 여인도 건드리지 말아야죠. 저는 그더러 월령안을 돌보라고 했지 월령안에게 구애를 하라고 하지는 않았다고요! 그더러 월령안과 청혼하라고 한 것은 더욱 아니고요. 그는 분명 알고 있으면서……."
"뭘 분명히 알고 있다는 것인데?"
육장봉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한데 엉켜 싸우고 있는 황제와 조계안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차가운 비웃음이 들어 있었다.
'조계안이 친구가 뭔지를 아네. 또 친구의 아내를 건드리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아주 좋아! 이 빚을 드디어 갚을 수 있겠군!'
"육장봉?"
황제와 몸싸움을 벌이며 황제를 깔아뭉개던 조계안은 육장봉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것도 잊고 멍해졌다.
"육장봉, 네가 어떻게 왔어? 이반반은? 왜 전달하는 사람이 없었느냐?"
"친구의 아내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친구가 좋아하는 여인도 건드리면 안 된다고?"
육장봉은 말하는 사이 벌써 난각으로 들어섰다.
그는 조계안에게 눌려 바닥에 있는 황제를 보지 못한 듯, 다가와 바로 조계안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힘을 쓰더니 조계안을 끌어올렸다.
"넌 이 이치를 알고 있었군. 알면서 나한테는 왜 그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