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화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어
떠나려고 하던 월령안은 문득, 오늘 밤 그녀를 위해 마차를 몰았던 육이 장군이 떠올랐다.
돌아오는 길에 육이가 차를 몰 때, 비틀거리지만 않았더라면 그녀는 어쩌면 육장봉에게 완전히 휘둘렸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두어 걸음 걸어서 다가가 육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육이 장군께서 마차를 모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어……. 월 낭자, 별말씀을요."
육이는 과분한 감사에 어쩔 줄 몰랐지만 월령안이 비꼬거나 불만이 없이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자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오늘 밤에 월 낭자에게 밉보인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반전이 생겼다. 월 낭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감사의 뜻까지 표했다.
이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육이의 기쁨은 이 초를 버티지 못했다.
그는 육 대장군에게서의 죽일 것 같은 시선을 받고 있었다.
육이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아니, 대체 내가 뭘 했는데!'
이미 한밤중이었다. 지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기운을 차리고 최일을 보러 약방으로 갔다.
육장봉은 당연하다는 듯이 함께 따라갔다.
이유조차 방금 전에 둘러댄 것이었다. 최일이 해독약을 먹은 뒤, 그도 최일을 보지 못했으니 아주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월령안은 거절할 수 없어 그냥 두었다.
약방에 거의 도착할 때쯤, 월령안은 미리 얼굴을 꼬집아 자기의 안색이 좋아 보이게 하고 또 숨을 여러 번 들이쉬었다. 그리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아주 명랑하고 활기차 보였다. 방금 전의 지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월령안이 너무 지쳐서 걸으면서도 잠들 것만 같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월령안을 만날 때마다 월령안 얼굴의 자신감과 여유가 넘치던 미소를 떠올렸다.
'혹시 월령안은 날 만나기 전에도 이렇게 한 것인가? 모든 슬픔과 무력감을 환한 웃음 뒤에 감추고, 모든 압력을 마음속 깊은 곳에 누르고 혼자서 감당한 것인가?'
월령안은 육장봉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려 그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장군, 오해하지 마세요. 전 단지 최 아저씨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을 뿐이에요."
월령안의 목소리는 전처럼 갈라지고 피곤한 기색이 없이 밝고 쾌활했다.
"그래, 알겠소."
육장봉은 갑갑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월령안이 눈을 휘며 활짝 웃는 얼굴을 보자 자꾸만 뭔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는 길거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 월령안은 초라하기 그지없으면서도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고 그의 앞에서 눈물을 떨구려고도 하지 않던 것이 떠올랐다.
월씨 저택에서 다시 만났을 때, 월령안이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황숙의 발치에 앉아 어떻게 보일지 신경도 쓰지 않고 통곡을 하며 어린애처럼 슬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월령안이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릴 때, 눈물이 방울방울 눈가에서 흘러나와 얼굴에 떨어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슬프면서도 참는 듯했던 모습이 염 황숙 앞에서 개의치 않고 통곡하던 모습과 너무 달랐다.
그는 예전에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월령안이 고집이 세고 심지가 강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그는 알았다. 월령안은 염 황숙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갑옷을 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의 슬픔과 무력감, 그녀의 당황스러움과 나약함, 그녀의 두려움과 유약함 및 그녀가 흘렸던 슬픔의 눈물, 무기력한 절망, 그녀가 갑옷 아래에 숨긴 연약함은 모두 염 황숙만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그 역시 그녀의 솔직한 모습을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본 것도 역시 갑옷을 두르고 모든 연약함을 숨긴 채, 자신만만하고 강하며 속으로 계획이 있고, 무슨 일에서나 당황하지 않는 월령안이었다.
월령안의 환한 미소를 보고, 명랑하고 쾌활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처음으로 가슴을 바늘로 찌르는 고통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또 왜 염 황숙, 최 대학사, 서 선생, 심지어 성미가 고약한 손불사까지도 월령안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월령안은 모든 압력과 우울감을 자기에게 남기고 다른 사람에게는 영원히 따스함과 햇빛만 가져다주었다.
염 황숙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인생사에 통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어찌 월령안의 배려를 모를가. 하지만 바로 알기 때문에 월령안을 그토록 좋아하는 것이고 아끼는 것이었다.
마치 지금 그의 기분처럼 말이다.
그는 월령안과 기쁘지 않을 때 웃을 필요가 없고, 피곤하면 자고, 싫어지면 팽개치고, 무서우면 자기와 말하고, 슬프면 울고, 화나면 말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한다 해도 월령안은 마음에 새기지 않고 진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진담으로 여겨도 월령안은 그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은 진작부터 자신을 가문을 일으켜세워야 하는 가주로 여겼고 진작에 주변 사람들을 위해 비바람을 막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같은 나이의 다른 소녀들은 옷 한 벌, 장신구 하나로 토라지고 있을 때, 그의 령안은 이미 홀로 가문을 지탱하고 전사처럼 상업계에서 싸우고 있었다.
다른 소녀들이 미래의 남편감 때문에 걱정하고 부모의 편애에 서러워하며 부모가 준 것이 부족하다고 속상해하고 있을 때, 그의 령안은 이미 큰 나무로 성장하여 아끼는 사람을 자기의 그늘 아래에 보호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번 다짐했었다. 남에게 있는 것은 그의 령안이 있어야 하고 남에게 없는 것도 그의 령안은 있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는 너무 늦게 왔다.
마치 전의 열여덟 번 생일 선물처럼 그는 보충해 줄 수만 있지 과거 월령안의 힘들었던 시간을 함께 보낼 수는 없었다.
육장봉의 생각이 수만 갈래로 얽히며 월령안의 지나온 시간을 가슴 아파하고 있을 때, 월령안은 약방에 들어섰다. 그녀는 쾌활하게 방 안의 사람과 말했다.
"최 아저씨, 자도, 둘 다 안 자고 있었어요? 절 기다리신 거예요?"
"령안이가 돌아왔구나."
최 대학사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묻어 있었다.
"물론 아니죠! 낮에 너무 많이 자서 밤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래서 손 신의의 약방을 좀 정리하고 있었어요."
최일은 여전히 사려심이 깊었다.
육장봉은 들어가서 최일이 몸을 일으키고 월령안을 위해 의자를 젖혀 앉기 편하게 한 것을 보았다. 심지어 상냥하게 월령안을 위해 기댈 것까지 주었다.
"대장군!"
"대장군께서 오셨군요."
육장봉이 들어가자 방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굳었다. 다행히 최 대학사와 최일 모두 보통 사람이 아닌지라 육 대장군의 분위기에 영향받지 않았다.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와 육장봉더러 앉으라고 했다.
"대학사."
육장봉은 최 대학사에게 인사를 하고 월령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월령안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최일에게 말했다.
"잘 회복되었군."
"손 신의의 의술이 뛰어나고 령안이 찾아온 약재가 구전되어서 그래요."
최일은 기분이 썩 좋지 않은 육장봉을 힐끔 보고 또 월령안을 힐끗 보았다, 그의 시선으로 확신이 스쳐 지나갔다.
기분이 좋지 못한 것은 육 대장군뿐이었다. 보아하니 월령안과 충돌이 생긴 것이 아니라 육 대장군이 홀로 토라져서 그녀에게 위로받고 싶어 하고 있는 것이었다.
'참 소심하고도 어색하군.'
최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와 월령안이 모두 있지만 않았어도 그는 정말 물어보고 싶었다.
'육 대장군, 당신은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월령안이 아직도 당신을 달래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최 대학사는 육장봉과 잘 알지 못했다. 평소 조당(朝堂)에서 만날 때, 육장봉은 항상 차갑고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육장봉이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육장봉과 인사를 나눈 후 최 대학사는 줄곧 월령안과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령안아, 방금까지만 해도 자도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단다. 다행히 네가 제때 약재를 가지고 돌아왔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넌 다시 날 보지 못했을 거라고. 넌 이번에 자도의 목숨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내 목숨도 살렸다."
"최 아저씨, 무슨 일이 생겼나요?"
월령안은 긴장된 얼굴로 물었다.
"걱정하지 마. 이제는 괜찮아졌으니."
최 대학사는 가볍게 말했다. 죽을뻔한 것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느긋하게 말했다.
"내가 가려고 했던 농갓집 말이다. 듣건대 그 농갓집이 서역에서 장사하는 사람들과 아는 사이라고 하더군. 집에 서역의 약재도 있다고 하니 난 혹시나 하고 거길 가 보려고 했단다.
그런데 그때, 마침 자도가 보낸 편지를 받고 네가 약재를 찾았다는 말에 원래의 계획을 포기하고 바로 성으로 돌아갔었어. 오늘 오후에 이 일이 생각나서 사람을 보내 그 농갓집에 선물을 가져다주라고 했는데……."
"함정이었군요!"
"맞아, 함정이었어!"
최 대학사는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역시 늙긴 늙었나 보다. 서역의 약재를 구하고 있는데 때마침 서역에서 장사하는 상인과 교류가 있는 농가를 만난다? 이렇게 수상한데 난 그때 함정이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월령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최 아저씨는 자도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깐 혼란스러우셨던 거예요. 설사 아저씨께서 눈치채셨고 속으로 십중팔구는 함정이라고 여겼어도 자도를 위해 모험을 하셨을 거예요. 일말의 희망을 놓치지 않으시려고요."
그녀는 최 대학사의 기분을 알고 있었다.
염명경 귀시가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약재를 찾을 가능성이 일 할밖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갔다.
아무리 희망이 없었다 해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 대학사와 최일은 모두 섬세한 사람이었다.
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월령안은 보기에는 기운이 넘친 것 같았지만 최 대학사는 그래도 일찍 화제를 끝마치고 월령안을 오래도록 잡아 두지 않았다. 다만 월령안이 떠나기 전에 월령안에게 초대장을 한 장 주면서 정중하게 월령안을 최씨 가문의 설개연에 초대했다.
전에 최일이 월령안을 초대했을 때, 월령안은 즉시 응했었다. 하지만 그 후에 최일의 마음을 눈치챈 월령안은 가려는 마음을 접었다.
이유도 다 생각해 두었다. 그 전에 미리 청주로 떠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최 대학사가 직접 그녀에게 초대장을 주자 월령안은 거절하기 난감했다. 그녀는 잠깐 사색에 잠겼다가 미소를 지으며 받았다.
'내일 꼭 최일을 만나서 잘 얘기해야겠어.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육장봉의 시선은 월령안의 손에 든 초대장에 떨어졌다. 그의 차가운 눈빛은 살기를 띠고 있었다.
최일은 육장봉을 힐끔 보고 묵묵히 옆으로 반 걸음 물러서며 농을 건넸다.
"아버지께서 사람을 보내 설개연의 초대장을 가져오게 한 것이 령안을 초대하기 위해서였군요. 전 또 아버지께서 육 대장군을 설개연에 초대하시려는 줄로 알고 있었네요. 대장군께서 거절하시면 어떻게 아버지의 체면을 살릴까 제가 괜히 고민하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