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8화 최일도 나쁘지 않아
회색 옷의 하인 서씨는 소식을 받고 나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서씨는 지금 월령안의 집사였다.
월씨 가문의 집사가 아닌, 월령안 한 사람만의 집사였다. 앞으로 월령안이 어디를 가든지 서씨도 따라갈 것이다.
"손 신의, 육 대장군께서는 서쪽 뜰에 계십니다. 제가 사람을 시켜 신의를 모셔가겠습니다."
서씨는 손 신의에 대해 그나마 태도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 공손함은 손불사를 남으로 여기는 데서 오는 것이 분명했다.
손불사는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아직 월령안의 용서를 받지 못한 사실이 떠오르자 아무리 기분이 안 좋아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라고 월령안이 그 노인네를 그렇게까지 중히 여길 줄 알았겠는가?
물론 그는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는 의원이었기 때문이다!
손불사를 보내고 서 선생은 돌아서서 최일에게 말했다.
"최 대인, 아가씨께서 아직 깨지 않으셨습니다. 수고스러우신 대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서 선생은 최일도 똑같이 예의 바르게 대했지만 조금 더 상냥하게 굴었다. 최일은 이 미묘한 차이를 알아챘다. 비록 이유는 몰랐으나 속으로는 퍽 기뻐했다.
'이건 월령안이 날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그렇지?'
최일 얼굴의 미소가 다시 온화해졌다.
"제가 불쑥 찾아온 것입니다. 령안을 깨울 필요는 없어요. 령안이 그동안 잘 자지 못했을 테니 더 자게 놔두세요 령안이 푹 자고 나서 얘기하지요."
궁이 어떤 상황이었던지 그는 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월령안은 신분이 불분명한 채로 후궁에 들어갔다. 월령안이 궁에 들어가자마자 황제는 태후, 황후와 다른 비빈들을 건너뛰고 그녀에게 공무를 관리하라고 했다.
월령안을 벼랑 끝으로 내몬 셈이었다. 다행히도 월령안에게 능력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아니면 그녀는 진작에 시신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대장군께서 우리 아가씨가 잘 쉬지 못할까 걱정하셔서 아가씨의 수면 혈을 찌르신 것입니다. 시간을 계산해 보니 아가씨께서 깨실 때가 되셨습니다. 여기서 더 많이 쉬시면 밤에 잠들지 못하실 겁니다."
서 선생은 잡담하듯 입을 열었다. 육 대장군 얘기를 꺼낼 때도 익숙한 사람 얘기를 하듯 했다. 마치 자기네 집 손아랫사람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전혀 육 대장군을 남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최일의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왠지 노림당한 기분인데?'
최일은 서 선생을 바라보았다. 서 선생은 발견했지만 눈치채지 못한 듯, 덤덤하게 그를 마주 보았다.
서 선생은 평온한 얼굴을 했고 표정도 평소와 같았다. 자기가 하인이고 최일이 대갓집 공자라고 해서 고개를 숙이거나 공손하게 굽신거리지 않았다.
반대로, 서 선생이 최일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치 손윗사람이 훌륭한 손아랫사람을 바라보는 것처럼 자애로웠다.
'이 서 선생은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절대 보통 하인이 아니야. 서 선생은 어쩌면 우리 가문의 어른을 알 수도 있겠어.'
이것은 최일이 서 선생과 마주친 다음 가장 먼저 느낀 직감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스스로의 생각이 과했다고 여겼다.
서 선생은 그를 손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것뿐이었다.
최일은 시름을 놓고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서 선생의 안내를 받으며 월령안이 묵는 곳으로 향했다.
물론, 최일도 그저 화청에서 기다리기만 할 뿐이지 더는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최일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지난번, 명월산장에 왔을 때 월씨 가문의 하인들은 그를 평범한 방문객으로 생각했다. 그는 앞뜰의 거실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그가 관복을 입고도 앞뜰을 가로질러 월령안이 머무는 낙원에 도착했다. 서 선생은 그를 월령안의 친구로 대하는 것이 분명했다.
'역시, 전에는 내가 생각이 과한 것이었군. 서 선생은 나한테 날을 세우려는 뜻이 없었군.'
최일은 조금이라도 빠르게 월령안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고 조용히 앉아 기다렸다. 겉으로 보아서는 침착하고 여유로운 것이 짜증 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서 선생은 어두운 곳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최언소(崔彥昭)의 아들은 역시 그 사람처럼 군자로군. 주인님은 역시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나시다니까. 최일은…… 만약 아가씨께서 진정으로 육장봉을 좋아하지 않으시고 육장봉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으신다면 생각해 볼 만하겠군."
그는 원래 현음 공주로 인해 육장봉 쪽으로 마음이 더 쏠렸었다. 하지만 육장봉의 몸속에 절반은 그 고얀 놈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하면 서 선생은 육장봉이 자기 주인이 애지중지 키운 보배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다.
최일 이 사람을 조사한 뒤, 그와 주인은 모두 내키지 않기는커녕 퍽 마음에 들어했다.
육장봉은 훌륭하지만 최일도 나쁘지 않았다.
육장봉에게는 병권이 있었고 최일에게는 최씨 가문이 있었다.
육장봉에게 있는 병사들은 아가씨를 보호할 수 있었다. 최일 배후의 최씨 가문은 아가씨가 청주의 그 진흙탕에서 철저히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비록 그의 주인이 육장봉을 선택했지만 아가씨가 좋아한다면 언제든지 사람을 바꿀 수 있었다.
아가씨가 좋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었다!
서 선생은 최일에 대한 만족감을 품고 월령안의 혈을 풀었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월령안을 깨웠다.
월령안은 깨고 나서 한참이나 멍하니 있은 뒤에야 자기는 이미 궁을 나왔고, 지금 명월 산장에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하지만 그녀는 그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녀의 모든 기억은 육장봉 그 몹쓸 녀석이 그녀의 미간에 입을 맞춘 것에 멈춰 있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월령안은 화를 내며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남이 위급할 때를 노려 일을 저지르는 소인배!'
그녀가 전에 육장봉을 좋아할 때도 그가 잠들거나 기절한 틈을 타서 무언가를 하려 한 적이 없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그럴 기회조차 없었긴 했다.
미간이 뜨거워지도록 문지른 뒤에야 월령안은 손을 거두고 서 선생에게 물었다.
"서 아저씨, 저는 어떻게 궁을 나온 건가요?"
"주인님께서 저더러 아가씨를 궁 밖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육 대장군께서 먼저 아가씨를 궁문 입구까지 안아서 가셨지요."
서 선생은 그저 있는 그대로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는 현음 공주 때문에 육장봉의 편을 들어 아가씨에게 그릇된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 주인과 약속했다.
"주인……. 영감님은, 잘 계시나요?"
월령안은 노인 얘기가 나오자 코가 시큰거리고 눈물이 말을 듣지 않고 찔끔, 흘러나왔다.
그녀도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님께서는 아주 잘 지내십니다. 물고기에게 먹이도 주시고, 바둑도 두시고, 화초도 키우시면서요. 또 하인들이 아가씨의 일상을 보고하는 것도 들으시고는 허풍도 떠십니다. 하루하루 아주 즐겁게 보내세요."
서 선생은 월령안이 걱정할 만한 모든 말을 지웠다. 그는 노인이 감당하고 있는 병마와 압력에 대해 한마디도 꺼내지 않고 고요하고 평안한 부분만 얘기했다.
"영감님이 또 다른 사람과 허풍도 쳐요?"
월령안은 듣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웃다가 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서 선생이 그녀를 속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인은 분명 매일 물고기를 먹이고, 바둑을 두고, 꽃을 기르고, 하인들에게서 그녀의 얘기를 들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노인의 삶 중 일부일 뿐이었다. 이건 단지 노인이 그녀를 위해 보내는 나날들이었다.
그녀는 노인이 늙으면 봉양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영감님, 나중에 늙으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세요. 할 일이 없으면 바둑도 두고, 물고기도 먹이고, 꽃도 기르고. 기분이 좋다면 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놀면서 다른 노인들과 허풍도 치고……."
그러나 그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노인은 해냈다.
아이가 없는 것만 빼고는.
"주인님께서는 아가씨 얘기를 꺼내실 때마다 참지 못하시고 아가씨를 자랑하시지요. 주인님 마음속에 아가씨보다 더 뛰어난 사람은 없어요."
서 선생은 애써 활짝 웃으며 자기의 미소로 월령안을 위로하려고 했다.
월령안도 확실히 위로를 받았다. 그녀는 울음을 멈추고 웃으면서 원기를 회복했다.
최일이 관복을 입고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월령안은 어렴풋이 무슨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자신을 추스르고 최일을 만나러 나갔다.
월령안이 문을 나서려고 할 때, 곁눈질로 탁자 위에 놓인 옥패를 바라보고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탁, 쳤다.
'나 이 돌머리하고는!
하마터면 큰일을 잊어 버릴 뻔했네.'
월령안은 방으로 돌아와 최일의 옥패를 들고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답례를 아직 준비 못 했는데. 정말 엉망진창이구나."
그녀는 이렇게 갑자기 궁을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또 최일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도 예상하지 못해 전혀 준비를 하지 못했다. 정말 실례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최일이 이미 찾아왔는데 그녀가 지금 옥패를 돌려주지 않는 것도 좋지 않았다.
월령안은 옥패를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걸으면서 어떤 선물을 준비해야 할지 실례가 안 될지 생각하고 있었다.
"아가씨, 손 신의께서 오셨습니다. 서쪽 뜰에서 대장군을 보살펴 주시고 계십니다."
서 선생은 마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월령안이 최씨 가문의 옥패를 손에 쥐고 얼굴을 찡그리고 생각에 잠겨 있자 서 선생은 월령안이 어떤 고민이 있는지 알아챘다.
그의 아가씨는 언제나 은혜를 알고 보답하려 했다. 그녀는 최일의 보살핌을 당연히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최일에게서 큰 은혜를 입었으니 당연히 뭐라도 하려고 할 것이다.
큰 선물을 하는 것은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최일에게 그가 도와준 것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손불사가 궁을 나왔어요?"
월령안은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또 침묵하다가 어딘가 어색하게 물었다.
"육장봉은…… 괜찮아요?"
"대장군께서는 괜찮으십니다. 젊은이가 몸이 좋아서 심한 상처를 입어도 하루 이틀 누워 있으면 일어설 수 있다고 합니다."
하루 이틀이 최선이었다. 시간이 더 들면 그의 주인이 기분 나빠할 것이다.
월 삼낭은 장군부에서 도망쳤다. 월 삼낭이 아가씨를 다치게 한다면 주인은 절대 대장군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괜찮으면 됐어요."
육장봉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것을 알고 월령안은 다시 묻지 않았다. 그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서 아저씨, 서쪽 뜰에 가서 제 심부름 좀 해 주세요. 손불사에게서 설옥고 두 병을 가져오시고 또 그더러 귀중하고 희소한 약 두 병을 골라 달라고 하세요. 구제적으로 무슨 약인지는 알아서 하라고 하시고요. 전 그가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고 믿어요."
"아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해내겠습니다."
서 선생은 월령안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서쪽 뜰로 갔다.
서 선생의 이 말에 월령안은 비로소 안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