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화 거대한 누에 번데기
육장봉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생각처럼 그렇게 이기적인 소인배가 아니었다. 그는 재차 황제와 등요 공주를 서남에 시집보내라고 청한 것은 등요 공주에게 복수를 하기 위함도, 월령안을 위해 화풀이를 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가 만약 등요 공주에게 복수하고 싶었다면 이렇게 돌아갈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의 신분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등요 공주의 따귀를 때려도 아무도 감히 그가 잘못했다고 말하지 못한다.
또 이 변경에는 넘치는 것이 겉은 멀쩡하나 속은 썩어 문드러진 부잣집 자제들이었다. 등요 공주를 아무 부잣집 자제에게 시집보내도 등요 공주는 평생 처참하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황제와 해명할 필요도, 황제가 알게 할 필요도 없었다.
육장봉은 황제 앞에서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황제에게 읍했다.
"폐하, 신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황제가 허락을 하든 말든 신경을 쓰지 않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갔다.
황제는 눈을 크게 뜨고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차마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제왕이었다!
천하의 왕이었다!
제왕인 그가 양보하고, 고개를 숙이며, 타협도 하고 해명도 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이렇게 가 버린 것이다!
'육장봉,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황제는 다시 화가 나서 눈으로 불을 뿜으며 온몸을 떨었다. 입으로 끊임없이 '짐은 저 녀석을 때려죽일 수 없다!'를 되뇌었다.
'짐은 현음 고모께 미안한 짓을 할 수 없다! 짐은 현음 고모의 체면을 봐주는 것이다!'
"너…… 괜찮겠어?"
조계안은 육장봉 뒤에 서서 육장봉이 가는 길을 막았다.
육장봉은 멈칫했다. 이를 본 황제는 기쁜 내색을 했다. 그는 육장봉이 고개를 돌리고 자신에게 제대로 사과하기만 한다면 자신은 영명하고 대범한 황제로서 육장봉의 잘못을 책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렇다, 그는 이렇게 대범한 제왕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실망했다.
육장봉은 조계안 앞에서 잠깐 멈춰 서더니 '비켜'라고만 말했다. 조계안이 길을 비킬 생각이 없어 보이자 육장봉은 조계안을 돌아서 밖으로 걸어갔다.
"지, 진짜로 이렇게 간다고?"
황제는 육장봉의 멀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화가 나 말도 하지 못했다.
조계안은 고개를 젓고 일부러 홀가분하게 말했다.
"황형, 신경 쓰지 마세요. 육장봉도 선을 지킬 거예요."
"짐이 양보도 했는데 쟤는 도대체 뭘 더 원하는 것이냐? 짐은 이미 등요를 희생시키는 게 마음 아픈 것이 아니라 등요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해명도 했지 않느냐!"
"황형, 육장봉은 진심으로 등요를 서남에 시집보내려는 게 아니라 황형을 놀리는 거예요."
황제는 자기의 딸이 아직 어린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아니었으면 오늘 육장봉이 핑계로 내세운 사람은 등요 공주가 아니라 황형의 친딸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별로 탐탁지 않은 이복 여동생과 자신의 친딸 중에서는 자신의 친딸이 더욱 소중할 것이다.
황제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는 씩씩거리며 돌아가 앉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등요도 참, 다른 사람도 아닌 육장봉을 건드려서는!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육장봉을 좋아하는 것이냐."
"황형, 날이 밝았으니 장씨 가문으로 가서 사람을 잡아들일게요. 태후께 유씨 가문 여식을 비로 맞이할 거라고 말씀드리는 것을 잊지 마세요."
조계안은 동정의 시선으로 황제를 힐끔 보고 양심이 없이 떠나갔다.
그는 등요의 일이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육장봉은 사내대장부였다. 등요 이 어린 여자애를 물고 늘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염 황숙은 여인을 애지중지하고, 여인에게 손을 쓰지 않는 착한 사람이 아니었다.
등요는 난각 밖에서 월령안을 비천한 상인이라고 욕했다. 그녀의 말에는 온통 월령안에 대한 원망뿐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염 황숙은 등요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염 황숙이 반드시 손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염 황숙은 절대 등요를 궁에 남겨 두지도, 그녀가 성장하고 강해질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다.
적수를 요람에서 압살하는 것은 예로부터 황숙의 수법이었다.
* * *
육장봉은 가슴이 칼로 찔리는 듯 아팠고 두 다리에 힘이 빠져 제대로 걸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힘든 것이 아니었다.
가장 힘든 것은 그의 의식이 점차 흐릿해지는 것이었다. 그는 눈앞이 흐릿해지며 앞의 길을 볼 수 없었다. 또 자신의 몸이 앞으로 가는 것을 통제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해하는 것으로 의식을 유지하기도 힘들었다.
다행히, 아직 날이 밝기 전이라 궁에는 순찰하는 금군과 밤을 지키는 내관 말고는 다른 사람이 없었다.
아니면 그의 지금 모습으로 선의궁을 지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이상한 점을 들켰을 것이다.
겨우 선의궁과 어느 정도 떨어졌을 때, 육장봉은 황제와 조계안이 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옆으로 가서 벽을 짚고 잠깐 서 있었다.
하지만 잠깐 서 있는 중에도 육장봉은 하마터면 쓰러질 뻔했다.
자기의 몸이 이토록 허약하다는 것을 발견한 육장봉은 더는 멈추지도, 더 쉬지도 못했다. 특히 눈을 붙일 생각도 못했다.
그는 잠시 눈을 붙였다가 다시 깨나지 못할까 두려웠다.
'내가 만약 다시 깨나지 못한다면 월령안은 어떡하지?'
태후가 아직 궁에 있었다. 그 여인이 만약 미쳐 날뛴다면 무슨 일을 벌일지 누구도 몰랐다.
태후가 만약 정말 월령안을 어찌한다면 황제도 월령안을 위해 태후에게 맞서지 않을 것이다. 설사 그렇게 한다 해도 뭐가 달라질까?
청희 장공주는 지금 냉궁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월령안이 성문 입구에서 청희 장공주에게 맞았던 등의 상처가 아프지 않았던 게 되는 건 아니다.
여기까지 생각한 육장봉은 몸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남몰래 숨을 들이쉬고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그 후로, 아무리 걷는 것이 힘들어도 그는 다시 멈춰 서서 쉬지 않았다. 한 걸음씩 꿋꿋하게 난각으로 걸어갔다.
조계안은 선의궁에서 나온 뒤, 육장봉을 쫓아갔다. 하지만 그는 육장봉에게 다가가지 않고 어두운 곳에 서서 지켜보았다.
육장봉이 힘들게 앞으로 걷는 것, 육장봉이 벽을 짚어서야 제대로 설 수 있는 것, 그리고 육장봉이 언제든지 무너질 것 같은 몸뚱이를 끌고 난각까지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은 난각 부근에 다다르자 갑자기 분위기가 변하더니 기세를 내뿜었다. 가면을 벗은 조계안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감돌았다.
"이게 바로 황숙께서 네가 나보다 더 그녀와 어울린다고 했던 이유였나?"
그는 자기도 월령안을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마음속에서 월령안은 영리하고 능력이 있었으며 무엇이든 스스로 이겨내는 사람이었다.
월령안은 여린 꽃송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하늘 높이 솟은 나무였다.
그는 월령안을 보호할 수는 있었다. 월령안이 위험할 때, 나서서 월령안의 안전을 보호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는 육장봉처럼 세세하게 생각하지는 못했다.
육장봉처럼 사사건건 월령안을 우선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육장봉이 난각에 다가가는 것을 본 조계안은 살며시 눈을 감는 것으로 시선에 드리운 쓸쓸함을 감췄다. 그리고 돌아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에는 음산한 섬뜩함만 남았다.
염 황숙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들처럼 어두운 곳에 있는 도살자는 정상적인 생활을 누릴 자격이 없었다.
만약 누려도 그것은 훔친 것이니 언젠가는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
마치 염 황숙처럼!
* * *
난각 안.
육장봉은 연탑 근처에서 무릎 한쪽을 꿇고 앉아 월령안의 달콤히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차갑게 굳어 있던 표정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윽하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에 옅은 미소가 드리웠다.
선의궁에서 난각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길을 유독 힘들게 걸었다. 예전에 그와 조계안이 무모하게 북요로 갔다가 초라하게 돌아왔을 때에 버금가는 정도로 힘들었다.
하지만 월령안을 데리고 순조롭게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은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육장봉은 연탑에 잠깐 기대 잠시 숨을 돌린 뒤,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월령안을 덮고 있던 얇은 이불과 함께 안아 올렸다.
육장봉의 행동은 아주 느리고 안정적이었다. 그가 부상당했다는 것을 전혀 알아볼 수도, 그가 아주 힘들다는 것을 눈치챌 수도 없었다.
그는 월령안을 안고 밖으로 걸어갔다.
"월령안, 내가 당신을 데리고 집으로 가겠소."
월령안의 얼굴은 육장봉의 가슴팍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넓은 이불이 월령안의 온몸을 덮고 있었다.
새벽녘이라 어둠은 점점 물러가고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난각의 문이 다시 크게 열렸다. 그때는 마침 날이 밝기 전, 가장 어두울 때였다.
육장봉이 월령안을 안고 난각에서 걸어 나왔다. 한 줄기의 햇살이 대지를 비추면서 두 사람의 몸을 비췄다.
멀지 않은 곳을 지키고 있던 금군은 육 대장군이 거대한…… 누에 번데기를 안고 나오는 것을 보고 모두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육 대장군이 그 '거대한 누에 번데기'를 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또 장엄하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절세의 보배 검을 든 것처럼, 장엄하고 숙연한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금군은 그저 장중하고 위엄 있는 기운이 밀려오는 것만 느꼈을 뿐, 감히 힐끔거리며 훑어보지 못했다. 그대로 서서 육장봉을 향해 군례를 하고 정중하게 검열을 받는 대군처럼 행동하였다.
그러나 육장봉은 그들을 위해 머무르지도 않았고 심지어 쳐다보지도 않았다.
육 대장군은 '거대한 누에 번데기'를 안고 금군 옆을 지나며 한눈팔지 않고 천천히 궁문 밖으로 걸어갔다.
육장봉의 모습은 점점 멀어졌지만 금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군 최고의 의례(儀禮)로 육 대장군을 떠나보냈다.
육 대장군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아서야 금군은 몰래 숨을 돌렸다. 간이 큰 금군 하나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방금 전, 커다란……."
"소리를 내지 말거라!"
하지만 입을 열자마자 두위의 호통에 멈춰 버렸다.
난각 밖은 조용했다.
난각 밖의 금군 말고도 길을 따라 순시하던 금군은 육 대장군이 '거대한 누에 번데기'를 안고 궁을 나가는 것을 보고는 모두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육 대장군에게 예를 올렸다. 그것도 군에서 최고의 예의를 올리며 대장군이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이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육 대장군의 기세가 너무 강해 그들을 숨도 쉬지 못하게 억눌렀다. 그들은 엄숙하고 진지해질 수밖에 없었다.
육 대장군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본 금군들은 하나같이 서로서로 바라보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추측했다.
'육 대장군이 화가 난 것 같은데? 온몸으로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기운을 내뿜고 있잖아. 그리고 육 대장군이 안은 '거대한 누에 번데기'는 월령안인가?'
하지만 금군들도 시선으로만 주고받을 뿐 더는 묻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