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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33)화 (533/1,004)

533화 령안에게는 그가 있었다

청주와 서남은 모두 조정과 대립하고 있었다. 청주와 서남의 문제는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쌍방은 반드시 전쟁을 치러야 했고 그 전쟁은 언제 시작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수서 나씨와 조정 간의 화해는 더욱 불가능했다.

당시 앞장서서 반란한 이가 수서 나씨였다. 육장봉이 황제더러 등요 공주를 나씨 가문 아들에게 시집보내라고 하는 것은 그녀를 빨리 죽이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황제는 등요 공주를 의미 없이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만일 어쩔 수 없이 그러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이유가 육장봉의 이기심을 위해서일 수는 없었다.

육장봉을 단념시키기 위해 황제는 억지로 불만을 억누르고 좋은 말로 설득했다.

"장봉아, 서남 사대 세가와 청주의 그 노친네들은 서로 협력하면서도 견제하고 있다. 내부 상황이 너무 복잡해. 월령안 같이 세상 물정에 훤한 사람이 서남에 가더라도 안전하게 몸을 뺄 수가 없단 말이다. 등요가 그곳에 시집가면 아무 의미 없이 희생되는 것밖에는 안되지 않겠느냐."

육장봉이 계속하여 밀어붙일까 두려워 황제는 아예 딱 잘라 말했다.

"등요를 서남에 시집보내는 일은 이제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짐은 아직 공주의 희생으로 서남의 반란을 진압해야 할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다."

"폐하, 제 어머니는 주나라의 적장 공주였습니다. 그분이 주나라의 종사를 위해 희생되고 북요에서 이십여 년 동안 잠입해 있습니다. 등요 공주가 서남으로 시집가는 건 그래도 폐하의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희생입니까?"

육장봉은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되물었다.

맞다. 육장봉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음산하기 이를 데 없어 황제는 왠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황제는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초조감이 밀려왔다. 말투에도 불쾌감이 서려 있었다.

"장봉, 지금 월령안을 위해 화풀이를 하는 것이냐 아니면 현음 고모를 위해 불평을 하는 것이냐?"

황제도 사실 육장봉이 왜 등요를 서남으로 시집보내고 태후를 강녕부로 보내려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그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던 건 육장봉의 체면을 세워 주고 서로 난감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지금 나를 바보로 보는 건가?'

"그게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육장봉은 냉소적으로 되물었다.

"육장봉! 짐을 너무 실망시키는 구나!"

황제는 육장봉의 제멋대로인 언행에 화가 치밀었다. 그는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리고 벌떡 일어서며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네가 월령안을 좋아하는 건 짐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고 상관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기억하거라. 조정의 큰일에 너의 개인 감정을 곁들이지 말거라. 조정의 큰일을 빌려 네 사적인 욕심을 챙기려 하지 말라는 말이다. 짐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육장봉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앉아 차분하게 황제를 바라봤다.

"신의 사심이 많은 겁니까, 폐하의 사심이 많으신 겁니까? 신이 등요 공주가 아닌 다른 사람을 수서 나씨 가문에 시집보내라고 제안했다면 폐하께서는 그때도 똑같이 단호하게 거절하실 겁니까?

이는 수서 나씨 가문에 첩자를 심고 서남의 사대 세가를 위로하며 그들과 청주 연맹을 이간질할 좋은 기회라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지금 수서 나씨 가문이 조정과 등지려고 하지 않는 한 그들은 폐하의 혼인 권유를 절대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남은 주나라의 영토여서 주나라 관리의 지배를 받을 뿐이다. 서남의 사대 세가가 이렇게 오랫동안 창궐해 왔으니 이제 그들의 시대는 끝났다. 짐은 그들을 위로할 필요가 없다. 짐은 그들을 굴복시킬 것이다!"

황제는 냉담한 표정으로 추호도 물러서지 않았다.

육장봉이 비아냥거렸다.

"폐하께서는 서남 사대 세가 사람들을 전멸시키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신이 명을 받들겠습니다. 폐하께서 신에게 십만 군대를 주시면 신이 알아서 군량과 급료를 마련할 것입니다. 그리고 제 머리를 걸고 약속드립니다. 오 년 안에 폐하를 위해 서남 사대 세가의 모든 사람들을 죽이겠습니다!"

황제는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서남은 북요와 달랐다. 북요는 적국이고 오랑캐였다. 그가 북요인들을 몽땅 죽이라고 명령한다면 주나라의 백성들은 두 손 들어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서남은 주나라의 영토로서 비록 조정의 지배를 받지는 않지만 주나라의 백성들의 눈에는 서남도 주나라의 백성이었다. 군대를 보내 서남의 백성들을 학살하면 다른 곳의 백성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서남 일대는 산에서 숨어 사는 일부 화전민들을 제외하면 모두 사대 세가의 사람들이었다. 만약 이 사대 씨족의 사람들을 모두 죽여 서남에 사람이 없어지면 서남을 되찾는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폐하께서는 서남의 사대 세가를 위로하셔야 하고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거 아니십니까?"

육장봉은 황제에게 손톱만큼의 체면도 주지 않고 그냥 짓밟아 버렸다.

"육장봉, 무엄하다."

황제는 얼굴빛이 검붉게 되어 육장봉을 삿대질했다. 그는 분노하여 치를 떨며 말했다.

"짐이 정말로 네 죄를 다스리지 못할 줄 아느냐?"

"폐하, 충언이어서 귀에 거슬리는 겁니다."

육장봉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문관들이 간언할 때의 모습 그대로 황제에게 정중하게 읍하면서 의젓하게 말했다.

"신이 폐하께 간언하는 것은 주나라의 종사와 폐하의 백년대계를 위해서입니다. 폐하께서는 일찍 결단을 내리셔야 할 겁니다. 사적인 감정을 정무에 곁들이지 마시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종사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되옵니다."

육장봉은 황제가 자신에게 한 비난을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황제에게 돌려주었다.

지금 황제는 얼굴빛만 어두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당장 살인하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두 눈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육장봉을 쏘아보았다.

"육장봉, 사는 게 싫은 것이냐?"

황제는 누가 봐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크게 노했다. 자칫 잘못하면 황제가 정말 거리낌 없이 마구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

조계안이 지난번 황제가 두 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걸 보았을 때는 대황자가 죽었을 때였다.

그때 황형은 황후궁의 내관과 궁녀를 모두 죽였다.

오늘 조계안은 황형이 화가 치민 나머지 이성을 잃은 결정을 내릴까 두려웠다.

조계안은 가만 앉아 있지 못하고 연신 육장봉에게 한 걸음 물러서라고 눈짓했다.

시간이 아직 많은데 지금 이 일 때문에 황형에게 죽기 살기로 덤빌 필요는 없었다.

서남 토사의 일은 하루 이틀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등요 공주를 혼내 주기 위해 멀리 시집보낸다 해도 꼭 서남에 시집보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 육장봉은 약을 잘못 먹은 사람같이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화가 난 황제 앞에서 옷자락을 젖히고 무릎을 꿇었다.

"주나라의 강산과 종사를 위해 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하고자 합니다."

'육장봉, 미친 거 아니야?'

조계안은 막으려 했지만 한발 늦어 눈을 뻔히 뜨고 육장봉이 무릎을 꿇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황제는 그 어느 때보다 화가 치솟은 것 같았다.

"육장봉, 지금 짐에게 퇴위를 강요하는 것이냐?"

"신이 어찌 감히."

육장봉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대답하고는 부드럽게 또박또박 말했다.

"신은 폐하께서 잊지 않으시길 바라고 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등요 공주의 오라버니일 뿐만 아니라 주나라의 폐하이시고 주나라 모든 백성의 군주이십니다. 신은 폐하께서 지니신 여동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이해합니다. 여동생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으신 것도 이해됩니다.

이 세상에 누군들 사심이 없겠습니까. 폐하께서 친누이 동생은 희생시키기 아까워 남의 여동생, 남의 여식을 희생시키는 것…… 신은 모두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천하의 군주시니 천하는 모두 폐하의 것입니다. 신도 폐하께서 잘못이 있으시다고 감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육장봉!"

황제는 화가 나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이 들었다.

육장봉이니 이 정도지 그가 아니 다른 사람이었다면, 혹은 육장봉이 부상당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는 금군에 명하여 사람을 끌어내어 한바탕 두들기라고 했을 것이다.

육장봉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계속하여 말을 이어 갔다.

"신은 다만 폐하께서 남을 희생하실 때 그 사람의 부모, 그 사람의 형제를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들……."

육장봉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갑자기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눈에는 비웃음으로 가득 찼다.

육장봉은 좀 전의 무표정하고 위엄 있는 표정을 바꾸었다. 황제를 냉담하게 바라보더니 거만하고 경멸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폐하!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인간으로 태어나 부모가 키운 것입니다. 비록 부모가 없는 고아라 할지라도 그들 역시 부모가 낳았고 키웠습니다. 그리고 아껴 주던 형제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등요 공주를 희생시키기 아까워하십니다. 그럼 폐하께서는 주나라를 위해 희생된 사람들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들이 희생될 때 그들의 부모, 형제간, 남편, 가족, 친구도 모두 가슴이 아플 것입니다."

황제는 등요 공주를 헛되이 희생시키는 것을 아까워했다. 그래서 그의 령안은 버려진 바둑알이 되어 청주에 가서 그 노친네들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가.

등요 공주가 아껴 주는 오라버니가 있다면 그의 령안에게는 그가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있는 건 그의 령안에게도 있어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없는 것도 그의 령안에게는 있어야 한다.

새빨간 피가 육장봉의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그의 옷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전혀 느끼지 못한 듯 무릎을 꿇고 있었다. 등을 곧게 펴고 냉랭하게 황제를 마주 보며 한 걸음도 물러서려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더욱 바투 들이대었다.

그의 말처럼 그는 지금 죽기를 각오하고 간언하고 있었다.

황제가 그를 죽이려고 손을 써도 괜찮았다.

'여기서 끝을 볼 것이다.'

조계안은 본래 한 걸음 물러서라고 육장봉을 설득하려 했다. 이럴 때 황형과 다투는 것은 하등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육장봉의 말을 듣자 조계안은 더 이상 설득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는 육장봉이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공평무사하지도 않고 한마음으로 나랏일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의 이 말들은 모두 월령안을 위해 한 말이었다.

등요는 그들의 여동생이었다. 그들도 싫어하지만 그녀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고 서남 위험한 곳에 내던지기도 싫었다.

그렇다면 염 황숙은?

월령안의 죽은 부모님과 오라버니는?

육장봉은?

그리고 자신은?

그는 월령안을 핍박하여 청주의 가주 쟁탈전에 참가시키면서도 속이 편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대로 했다.

주나라의 강산과 사직을 위해, 주나라의 안정을 위해 그들은 모두 희생되고 피를 흘리며 가슴 저린 아픔을 참아내야만 했다.

그럼 황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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