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화 이 생각은 참 좋은 듯합니다
이 모습을 본 회색 옷의 하인은 월령안이 난각에서 일부러 흘린 얘기를 들려주었다.
태후의 신분을 밝히며 그녀가 가진 권세와 편리, 그리고 황제가 대신과 다투는 결정적인 시각에 태후가 장 부승상 일파에게 넘어가게 되면 황제가 마주해야 할 어려움을 일일이 얘기해 준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노인에게 들려주었다.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은 이야기꾼이 아니었다. 그의 어투는 아주 무미건조하고 전혀 재미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마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듯, 더없이 기쁘고 흥미진진하다는 태도로 집중했다.
회색 옷의 하인이 말을 끝내자 노인은 겸손한 척하며 자랑했다.
"고 계집애가 얼마나 약삭빠른데! 이 수는 남의 힘을 빌려 상대를 공격하는 거야. 아주 정확하게 요점을 파악하고 빠르게 파고들었구나. 폐하께서는 태후 마마가 얼마나 많은 비들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올랐던 것인지 신경 쓰지 않을 거거든. 하지만 태후 마마가 조정을 장악하는 데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결코 허락하지 않지."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은 무미건조하게 한마디 대답했다.
"월 낭자는 아주 영리합니다. 주인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인님께서 손을 쓰지 않으셔도 태후 마마는 권세를 잃을 겁니다. 태후 마마에게 미안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식을 백 살까지 키우면 아흔아홉 살까지도 걱정한다고 하잖냐. 걔가 아무리 영리해도 내 눈에는 나를 끌어안고 우는 어린애일 뿐이야. 내가 어떻게 마음을 놓을 수 있겠느냐."
정말 그가 마음을 놓을 때는 아마 그가 죽는 날일 것이다.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내게 남은 시간이 길었다면, 난 그 녀석이 그렇게 영리하지 않길 바랐을 거야."
만약 그가 꼬마 령안을 한평생 보호할 수 있다면 그녀를 이렇게 영리하고 뛰어나게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수만 있었다면 그는 마냥 그녀를 총애 했을 것이다. 백 살, 천 살이 되어도 천진난만하고 어리숙한 여자애와 같이 영원히 즐겁고 근심 걱정이 없게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정이든 가족과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세상은 그의 꼬마 령안에게 특히 잔인했다.
그는 심지어 꼬마 령안이 다 자랄 때까지도 함께할 수 없었다.
노인은 눈을 감았다. 그날 연복궁에서 월령안이 막막하고 억울해하며 울면서 하소연하던 모습을 떠올리자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는 결국 그녀를 실망시켰다.
* * *
같은 시각, 육장봉은 선의궁에 도착했다.
황제와 조계안은 내관의 보고를 믿지 못했다. 심지어 내관이 전해 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초조하게 일어나 밖으로 나가 육장봉을 맞아들였다.
육장봉이 성큼성큼 다가오자 황제는 기뻐하며 말했다.
"장봉아, 깨어났구나."
"부상당해서 죽기 일보 직전이라며? 어떻게 벌써 깨어난 거야? 꾀병을 부렸던 건 아니겠지?"
조계안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눈은 담담하게 웃고 있었다.
육장봉이 깨어났으니 그도 당연히 기뻤다.
그가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육장봉 이 밉상이 월령안에게 고육지책을 쓰는 점이었다.
'일부러 아픈 모습을 보여서 마음을 돌리려 들다니.'
육장봉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황제에게 가볍게 포권했다.
"폐하께 감사드립니다. 손 신의의 약이 아주 좋더군요."
설옥고보다 훨씬 좋은 약이었다.
그때 정신을 잃었었기에 손 신의가 무슨 약을 썼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을 때 상처를 한번 살펴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
그는 부상을 입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상처 회복에 대해서 의원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을 치르는 삼 년 동안 가슴 앞에 그런 칼자국이 백 개는 아니더라도 열몇 개 내지 스무 개는 있었다. 다만 그때는 급소를 다쳤던 것이 아니라 가슴 앞의 그 상처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손 신의의 의술은 정말 훌륭하더구나. 태후 마마가 중풍으로 몸 절반을 움직일 수 없었어. 모든 어의뿐만 아니라 송 원정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런데 손 신의는 딱 보더니 아무 문제도 아니라고 하더라. 다만 치료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했어."
황제는 육장봉이 이렇게 빨리 정신을 차린 것이 기뻤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인정을 알아 주는 것이 더욱 기뻤다.
비록 손 신의가 육장봉을 치료했지만 바로 황제가 손 신의를 강요하여 직접 치료하게 했으니까.
"폐하, 태후 마마의 병이 심합니까?"
육장봉이 물었다.
선의궁에 오기 전에 그는 이미 자신이 의식불명 상태에 처해 있던 시간 동안 궁중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똑똑히 묻고 왔다.
"손 신의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했어. 태후께서 평온하게 요양을 하시고 치료에 협조를 잘 하신다면 일 년 내에 회복될 수 있다고 했다. 다만 태후 마마께서 재발하지 않도록 더는 화를 돋우면 안 된다고 했어."
여기까지 생각하자 황제는 저도 모르게 머리가 아팠다.
태후의 병은 좋아져도 그에게는 족쇄였다. 앞으로 무슨 일에나 그녀의 뜻에 따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태후가 재차 중풍을 맞으면 문관들은 기회를 잡았다 싶어 그를 욕할 게 뻔했다.
육장봉은 냉혹한 미소를 떠올렸다.
"폐하, 태후 마마께서 이 병을 잘 치료하시려면 기분이나 환경 모두 중요합니다. 폐하께서는 태후 마마를 강녕부(江寧府)로 보내어 요양하게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강녕부에 가는 순간, 태후는 평생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황제는 태후를 황궁에서 내보내는 것이 영구적인 해법이라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결과를 떠올리자 주저했다.
황실에는 사소한 일이 없었다. 황제로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세상 사람들의 귀감이 된다. 그의 모든 행동은 확대 해석되고 설령 다른 뜻이 없더라도 수많은 깊은 뜻으로 읽히게 될 것이다.
그가 태후를 내보내면 많은 이들이 집안의 노인을 멀리 보내거나 심지어는 버릴 것이다.
모든 선 가운데 효도가 으뜸이다. 그런데 자녀가 불효하면 노인들이 실망할 것이고 주나라에 대해서도 실망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폭동을 초래할 수 있었다.
누구나 반드시 늙기 마련인 것이다.
효도 문제에 있어서 그는 한 걸음도 잘못 내디디면 안 되었다. 대신들에게 꼬투리를 잡혀서는 안 되고, 간사한 자들에게 부모를 봉양하지 않으려 하는 핑계가 되지 않아야 했다.
태후를 내보내는 것은 좋은 수가 아니었다.
육장봉은 황제의 마음이 동한 것도, 또 한편 우려하는 문제도 알고 있었다. 황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다시 말했다.
"폐하, 만약 태후 마마께서 스스로 가시려고 한다면요?"
"태후께서 어떻게 스스로 강녕부로 갈 수 있겠느냐. 농담하지 말거라."
변경이야말로 주나라 권력의 중심이었다. 태후는 변경에 있어야만 명부(命婦 - 봉작을 받은 부인의 통칭), 관리, 종실과 왕래하면서 수중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강녕부에 가면 태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기를 가서 누구를 만나겠는가? 강녕지부 부인을 만나겠는가?
태후가 강녕부행을 어찌 달가워할 수 있겠는가.
"태후께서는 자발적으로 가실 겁니다."
육장봉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황제가 막 반박하려는데 육장봉이 다시 말했다.
"좀 전에 이반반이 어린 궁녀를 데리고 난각으로 왔었습니다. 그 궁녀는 담이 보통 큰 게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용모도 빼어났지요. 폐하께서 그 궁녀를 조사해 보시기 바랍니다. 궁중에서는 누군가의 보호를 받지 않으면 용모가 빼어난 어린 궁녀가 살아서 이반반 곁에까지 갈 기회가 없잖습니까."
"네 얘기는 태후 마마라는 얘기인 것이냐?"
황제는 무거운 표정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태후 마마께서…… 그럴 필요가 없잖느냐."
육장봉이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조계안이 급한 어투로 말했다.
"황형이 태후 마마를 존경하고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분은 어쨌든 태후 마마입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분에게 기대려 하고 그분을 부추기려고 한다는 뜻입니다.
지금은 태후 마마가 설득되지 않았지만 내일을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모레은 어떻습니까? 그 이후는요? 게다가 태후 마마가 정말 황형에게 불만이 전혀 없으시리라는 보장도 없어요."
조계안은 차갑고 거만한 얼굴로 황제에게 더 많은 생각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곧 자문자답했다.
"설 상궁의 일만 봅시다. 설 상궁에게 문제가 생겼는데 정말 태후 마마가 마음속에 응어리 없이 이전과 똑같이 황형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유씨 가문 큰딸은 이미 열여덟, 열아홉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시집가지 않았습니다.
분명 황형을 위해서 키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황형은 이전부터 계속 유씨 가문의 여식을 비로 받아들이지 않고 유씨 가문 사람과도 가까이 지내려 하지 않습니다. 태후 마마가 이를 어떻게 생각할 것 같습니까."
"짐은……."
그가 유씨 가문의 여식을 후궁에 들이지 않는 것은 후궁의 안정을 위해서였다.
태후의 조카딸인 유씨 가문 여식이 입궁하면 후궁은 틀림없이 평온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전조(前朝)의 정무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시간과 정력을 후궁의 일에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조부나 부황처럼 후궁에 별의별 여인을 다 들여 비빈들이 날마다 죽기 살기로 싸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황궁의 황자, 공주들도 전전긍긍하며 잠시도 조용히 지낼 수가 없었다.
그는 다만 조용한 후궁과 안정된 집을 원할 뿐이었다. 이것도 잘못이란 말인가.
조계안은 황제의 생각과 고민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로서 어떤 일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조계안은 부드럽게 설득했다.
"황형, 태후 마마는 권세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황형하고는 모자간의 정도 갖고 계십니다. 사실 그분은 그렇게 큰 야심이 없습니다. 그분은 다만 자신의 친정을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그분은 황형께서 유씨 가문 여식을 황후로 봉하기를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냥 비로 맞아들이고 황형과 유씨 가문의 관계를 더 가깝게 해 주려고 하는 겁니다. 그분의 사후에도 황형이 유씨 가문을 조금이라도 보살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유씨 가문의 여식을 비로 맞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짐은 유씨 가문을 돌볼 것이다. 짐은 태후 마마께 유씨 가문은 영원히 짐의 외삼촌 댁이라고 약속했다."
'천자로서 내가 직접 약속한 것도 부족하단 말인가?'
조계안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황형, 태후 마마는 황형의 생모가 아닙니다. 황형이 그분을 친모처럼 대해 주고 그분도 황형을 아들처럼 대해 주지만 혈연관계가 없으면 정말 진정으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약속한다고 해도 유씨 가문의 여식을 비로 들이고 황궁에 유씨 가문 피를 물려받은 아이가 있는 것보다는 못하죠. 그게 공주라도 괜찮습니다."
"짐의 약속이 안 된……."
조계안은 손을 들어 황제의 말을 끊어 버렸다.
"황형, 제 말을 들어 보세요! 믿든 안 믿든, 지금 태후 마마께 가셔서 유씨 가문의 여식을 비로 맞아들이고 아이를 한 명 가지게 하겠다고 말해 보세요. 그리고 태후 마마께서 자발적으로 강녕부에 요양하러 가시겠다고 하는지 안 하는지 지켜보세요."
"폐하, 조왕 전하의 이 생각은 참 좋은 듯합니다."
육장봉이 적절하게 입을 열어 조계안의 말에 동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