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6화 은혜는 은혜고, 원한은 원한이죠
육씨 저택에서 육비우에게 쫓겨나는 순간 그녀는 애당초의 모든 아름다운 환상은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더는 육 부인이 아니게 되었는데 이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게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따뜻함도, 갑갑함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가소롭고 풍자적이라고 생각되었다.
가소로운 운명이고 가소로운 황권이었다!
월령안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고 차츰 평온해졌다.
그녀는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있는 육장봉을 보며 웃었다.
"역시 시간은 가장 좋은 약이군요. 아무리 깊은 정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옅어지네요. 예전에는 육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그때의 기대와 그에 따른 절망을 떠올리면 저는 정말 오랫동안 괴로웠어요.
심장을 칼로 에는 것 같아 울 힘도 없을 정도였어요. 영감님이 어떻게 위로해도 안 되었어요. 지금 육씨 가문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지만 그건 떠올리고 있을 때 찰나의 순간 뿐이에요. 지나간 건 지나간 거죠."
월령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씁쓸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신이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시간 뿐 아니라 곁에 노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다시는 노인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녀는 자신이 마음껏 울고, 마음껏 억울함을 털어놓을 기회를 잃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강대해져야 했다. 단지 힘뿐만이 아니라 마음가짐도 강대해져야 했다. 강대해져서 어떤 풍파도, 어떤 상처도, 어떤 상실도 모두 이겨 낼 수 있어야 했다.
월령안은 눈이 시큰시큰해짐을 느꼈다. 손수건을 꺼내 찬물을 부어 눈에 얹었다.
그녀는 남들이 비웃거나 야유하는 것도, 체면을 구기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에게 자신의 나약함을 보여 주는 것은 두려웠다.
그녀는 남, 특히 황궁의 사람들이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 * *
이반반은 따뜻한 음식과 이미 베껴 놓은 유일본 의서를 들고 왔다. 월령안은 이미 눈을 식힌 후라서 두 눈이 맑게 빛났다. 울었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나른하게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본래 얹었던 긴 머리는 풀어 헤쳐져 약간 물기가 남은 상태로 등 뒤에 늘어뜨렸다. 그녀가 앉은 자세를 따라 머리가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디서 찾았는지 모를 책 한 권을 들고 매우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입구에서 들리는 소리에도 그냥 고개를 들어 바라보기만 하고 곧 눈길을 거두었다.
이반반은 걸어 들어오는 순간, 미인이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비스듬히 누워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반반은 월령안을 처음 보는 게 아니었다. 제대로 옷을 차려입은 모습도 보았었다. 하지만 오늘 이전까지, 아니 좀 전까지만 해도 그는 월령안의 용모에 놀라거나 가슴이 두근거린 적이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반반은 넋을 잃었다.
'어디 아픈 건가?'
"이반반?"
월령안은 손에 가는 대로 책을 한쪽에 놓아두었다. 이반반이 한참 동안 다가오지 않는 것을 보고 이름을 불러 주의를 주었다.
이반반은 정신을 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더는 월령안을 볼 엄두도 못 내고 고개를 숙인 채 음식 함을 들고 와서는 그 안에 담긴 음식을 하나하나 꺼내어 그녀의 앞에 놓았다.
마음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월 낭자는 정말 요정이구나. 남자로 지낸 일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 고혹적인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육 대장군과 조왕 전하께서 월령안을 좋아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군.'
월령안이 아주 아름답거나 경국지색이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용모는 그냥 출중할 뿐 미인이라 할 수는 있지만 이반반이 한눈에 놀라 찬탄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반반은 황궁에서 별의별 미인을 다 만나 보았다. 고종 황제가 총애하던 비의 어린 시절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경국지색이었다. 그 아름다움이 빛나는 외모에 놀라 찬탄할 지경이었다.
월령안은 달랐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뼛속에, 영혼에 있으며 그녀가 경계심을 풀고 무의식중에 드러내는 독특하고 고혹스러운 분위기에 있었다.
고종 황제 비의 아름다움은 사람마다 볼 수 있었다.
월령안의 아름다움은 뼛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와 가까운 사람만이 볼 수 있게, 그녀의 남편만이 발견할 수 있게 깊이 숨겨져 있었다.
그는 비록 완전한 남자는 아니지만 지고무상한 남자들을 잘 알고 있었다.
권력의 정상에 선 남자들에게 있어서 오직 혼자만이 알고 남은 알지 못하는 월령안의 숨겨진 아름다움이야말로 그들의 독점욕을 더욱 만족시킬 수 있었다.
이반반은 황제가 월령안이 경계심을 풀었을 때의, 고혹적인 모습을 못 본 것이 무척이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황제가 지금처럼 월령안을 싫어하고 전혀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점심부터 지금까지 쌀 한 톨도 먹지 못했다. 실제로 정말 배가 고팠다. 특히 음식 냄새를 맡으니 더욱 배고팠다.
"월 낭자, 이건 황궁에 소장되어 있던 유일본 의서의 필사본입니다. 일전에 대장군께서 소인에게 명해 모든 유일본 의서를 한 부씩 베껴 낭자에게 보내라고 했습니다. 오늘 마침 다 베꼈습니다. 월 낭자, 보시렵니까?"
이반반은 뜻밖에 월령안이 깊게 숨겨 둔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다. 곧 마음속으로 육 대장군이 월령안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앞으로 월령안을 이전과 똑같이 그냥 육 대장군이 호기심을 가지는 여 상인으로만 보아서는 안 되었다. 이변이 없는 한, 대장군 부인의 이름은 오직 월령안만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대단히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예의를 차려 감사의 말을 한마디 하고는 받아 두었다.
목소리나 말투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반의 큰 은혜를 꼭 기억할게요'라고 말하던 그녀와는 완판 다른 사람이었다.
이반반은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월령안이 의서을 받아 두는 것을 보고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받은 대우는 그런대로 손 신의보다 나았다. 월령안은 손 신의와 소원해져 분명 손 신의 수중의 연고가 마음에 들면서도 예전과 같이 직접 입을 열어 요구하지 않았다.
따로 알아볼 필요가 없이 손 신의가 줄곧 난각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충분히 문제를 설명해 주었다.
손 신의를 떠올리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월령안은 염 황숙의 약 한 첩 때문에 그녀가 장장 십 년 동안 좋아했던 육 대장군을 멀리한다고 했다. 이반반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월 낭자, 폐하께서 방금 소인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설 상궁을 심문할 필요 없이 바로 죽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월령안의 젓가락을 잡은 손이 잠깐 굳어졌다.
그녀는 이반반이 자신의 비위를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코앞에 가져다 바치는 이익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는 마음속으로 이반반의 원한을 기억해 두는 것과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태후 마마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폐하께서 송 원정을 데리고 갔을 때 태후 마마의 상황은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송 원정이 제때 도착해 태후 마마를 구했지만 태후 마마는 반쪽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소인은 그사이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폐하께서 태후마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오늘에 설 상궁을 심문하지 않고 죽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반반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태후의 체면과 연관된 일이기에 월령안이 묻지 않으면 당연히 먼저 말하지 않았다.
비위를 맞추는 것도 역시 기교가 필요하다. 무엇이든 너무 쉽게 얻게 해서는 안 된다. 너무 쉽게 얻으면 싸고 중요해 보이지도 않으므로 감사하게 여기지도, 인정으로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반반은 실망하고 말았다. 월령안은 단 한마디만 했다.
"태후 마마의 이 병은…… 참 안타깝군요."
그러고는 아무 말도 못 들은 것처럼 다시 젓가락을 들고 식사하려 했다.
수라방에서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은 색, 향, 맛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반찬마다 풍기는 향기로운 냄새는 어서 맛보라고 손짓하는 듯싶었다. 가만히 두고 식히면 너무 아까웠다.
월령안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늦은 저녁 식사를 즐겼다.
이반반은 한쪽 옆에 서서 그만 멍해지고 말았다.
'월령안,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되잖아?'
태후가 반쪽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은 월령안이었다.
태후가 죽지 않으면 그녀는 월령안을 찾아 결판을 내려 할 것이다.
월령안이 아무리 자신이 있더라도 어찌 태후의 약점을 미리 잡을 이 기회를 놓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미리 생각해 두었다. 월령안이 입을 열기만 하면 황제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먼저 은밀히 설 상궁을 심문하려고 했다. 그리고 태후의 손에 인명이 걸려 있다는 약점을 들춰내어 그녀에게 알려 주려고 했다.
하지만 생각 밖에 월령안은 아쉽다는 한마디밖에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이 없는 사람같이 식사했다.
'월령안은 간이 큰 건가 아니면 정말로 두렵지 않은 건가? 그리고 그녀의 안타깝다는 한마디는 태후 마마가 병나서 아깝다는 얘기인 건가 아니면 설 상궁이 이대로 죽는 것이 아깝다는 건가?'
이반반은 의문투성이였지만 감히 묻지 못했다.
고개를 돌려 연탑에 누워 있는 육 대장군을 힐끗 바라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월령안 같은 잔악한 여인은 대장군만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거 같군.'
이반반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정말 알고 싶었다. 월령안이 그에게 도움을 청해 설 상궁의 입에서 태후를 협박할 수 있는 빌미를 알아내지 않고 어떻게 태후의 미친 듯한 복수에 대처할 것인지 무척 알고 싶었다.
태후는 깨어나는 순간 원인 제공의 장본인인 월령안을 결코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반반은 월령안이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감히 방해하지 못했다. 옆에서 기다리다가 그녀가 다 먹은 다음 즉시 입가심을 하라고 따뜻한 향명(香茗 - 어린 싹으로 만든 고급 차)을 받쳐 올렸다.
월령안은 차를 건네받고 우습다는 듯이 말했다.
"이반반, 이러실 필요 없어요. 전 본디 은원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은혜는 은혜고, 원한은 원한이죠. 저 하나도 잊지 않고 다 기억하고 있어요."
이반반 얼굴의 미소가 순간 굳어졌다.
그는 끝까지 원한을 기억하고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게 직설적이고 상큼하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이렇게 직접 말하는 게 아무래도 뒤에서 해코지하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
"월 낭자, 어찌 농담을 하십니까."
이반반은 월령안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했다. 월령안이 입가심을 한 다음 잔을 건네받고 깨끗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소인은 결국 누군가를 모시는 노비일 뿐입니다. 월 낭자는 귀인이시니 소인이 당연히 모셔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