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5화 다만 이미 실의에 빠졌을 뿐
월령안은 드디어 왜 요 며칠 옥죽이 늘 깨름칙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는지 알게 되었다.
이반반이 그녀가 영복궁에 없는 틈을 타서 그녀의 물건을 몽땅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반반은 시퍼런 대낮에 그녀가 쓰고 입는 것, 심지어 먹고 마시는 것까지도 모두 바꾸었다.
하지만 영복궁의 옥죽을 제외한, 궁녀와 내관 들은 모두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월령안은 이 모든 것을 떠올리자 등골이 오싹했다.
황궁은 너무 무서운 곳이었다.
이번에는 육장봉이 이반반에게 옷을 바꾸도록 했다. 그럼 다음에는?
그녀의 목숨을 바꾸는 것조차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게 될 수도 있었다.
월령안은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양손을 주먹 쥐고 가슴속의 당황함을 억누르고 물었다.
"이반반, 저에게 출궁 영패를 주고 연복궁으로 갔다 오라고 한 것도 역시 대장군이 강요해서 한 것인가요?"
"그건…… 소인 역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반반은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으로는 후회막급이었다.
그는 이 일을 그냥 넘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어쩜 정말 어쩔 수 없으셨군요."
월령안은 크게 웃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엄숙한 얼굴로 이반반에게 읍하였다.
"반반의 큰 은혜를 꼭 기억할 것입니다."
"월 낭자, 소인은 별다른 뜻이 없었습니다. 소인은 그저……."
이반반은 거의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월령안, 이거 정말 화난 건가?'
"그분은 저의…… 유일한 가족이에요."
월령안은 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서서 이반반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반반은 그녀를 어떻게 해코지해도 되었다. 그녀를 아무리 참담하게 만들더라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남보다 재주가 못하면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반반이 노인을 도구로 이용한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주나라의 염 황숙은 수십 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하루아침에 되돌아오자 모습을 드러내 보일 필요도 없이 이름 하나만으로 황성사를 아무 문제 없이 재가동할 수 있었다. 단 이름 하나만으로도 황성사를 통솔하고 조계안의 윗사람이 되었다.
조계안이 음지에서 가진 신분은 황제를 위해 떳떳지 못한 일을 모두 처리하는 암황이었다. 그렇다면 노인의 신분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없었다.
월령안은 이반반이 노인의 신분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또 그가 자신을 연복궁에 보낸 데에 다른 속뜻이 없다고 믿지 않았다.
이반반은 고의적이었다.
이반반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일을 얼버무려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울상이 되어 변명했다.
"월 낭자, 이 일은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소인을 벌하셨습니다. 또 염 황숙께 찾아가서 사죄도 했습니다."
"저는 옷을 갈아입으러 가야겠네요. 이반반께서 좀 편의를 봐주세요."
월령안은 못 들은 척하며 탁자 위의 보자기를 들고 내실로 들어갔다.
일이 폭로된 뒤에 하는 해명은, 해명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월령안은 이반반의 체면을 조금도 봐주지 않고 몸을 돌려 가 버렸다.
이반반은 갑자기 당황했다.
"월 낭자……!"
이반반은 쫓아가서 해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손불사가 와락 잡아당겼다.
"월은 무슨 월…… 우리 집 꼬마 령안이가 듣기 싫다고 하잖습니까. 우물쭈물거리며 사람 귀찮게 굴지 마십시오."
"손 신의, 월 낭자가 오해했습니다. 월 낭자한테 해명해야 한다고요."
이반반은 손불사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하지만 손불사가 어떻게 잡았는지 분명 그렇게 힘을 준 것도 아닌데 아무래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반반은 월령안이 내실에 들어가는 것을 빤히 보면서 울먹울먹거렸다.
왠지 자신이 끝장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용없습니다!"
손불사는 경험자의 말투로 이반반에게 말했다.
"용의 역린을 건드린 자는 죽어야만 하는 법. 어르신은 월령안의 유일한 역린입니다. 당신이 저 애를 괴롭혀도 괜찮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르신에게 꼼수를 쓰려고 하면 폐하 옆의 내시 총관이 아니라……."
손불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반반을 놓아 주었다. 다시 육장봉을 가리키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저분 보셨죠? 월령안이 왜 갑자기 육장봉을 거들떠보지 않고 멀리하면서 적으로 취급하는지 아십니까?"
"왜? 어째서 입니까?"
이반반은 직감적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묻고 나서 후회되었다.
그는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지금 바로 돌아서 나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되돌릴 수는 없을까?'
하지만 손불사는 이반반에게 후회할 기회를 주지 않고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장군은 월령안이 어르신을 위해 준비해 둔 약을 건드렸습니다. 그 약은 어르신에게 큰 쓸모가 없지만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할 수는 있었죠. 그 사람이 육장봉이더라도 월령안은 결코 용서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제 어르신이 월령안의 마음속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만하겠습니까?"
손불사는 이반반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말투에는 형언할 수 없는 의기소침함과 무기력함이 묻어 있었다.
이반반은 대담하게 추측했다.
"손 신의, 약에 손을 댄 사람은 대장군뿐만 아니라 당신도 있으시죠?"
손불사는 부인하지 않고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도 있죠. 그러니까 보십시오. 저하고도 내외하잖습니까."
분명 그가 만든 연고가 마음에 들면서도 그에게 입을 열어 요구하지 않았다.
그의 꼬마 령안은 정말로 그와 소원해졌다.
'정말 슬프단 말이야.'
손불사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괴로워지면서 당장 눈물을 보일 것만 같았다.
이반반은 갑자기 머리 위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만 같았다.
월령안은 대장군과 손 신의마저도 안중에 두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그는 내관일 뿐이다. 그런데 월령안의 원한을 사다니, 살아서 내일의 해돋이를 볼 수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반반은 투실투실한 자신의 몸뚱이를 가슴 아프다는 듯이 꼭 안아 주었다. 어리석은 잘못을 저지른 자신을 위해 한바탕 울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고, 이제 기억나네. 전에 월 낭자가 요구했던 고본 의서를 거의 다 베꼈을 텐데. 내가 지금 가서 월 낭자를 위해 가져와야지!"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반반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날듯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밖으로 나갔다.
"유일본 의서?"
손불사의 눈도 한층 밝아졌다. 빠른 걸음으로 이반반을 따라나섰다.
"아니 나한테도 알려 주시지요. 월령안이 요구한 유일본 의서면 어차비 나한테 주려는 거 아닙니까?"
월령안은 다시 단장을 하고 이반반이 가져온 옷으로 갈아입었다. 더러운 옷을 잘 싸서 본래는 이반반더러 옥죽에게 가져다주어 처리하게 하려 했다. 나오자마자 손불사의 위세 높은 모습이 보였다.
그의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월령안은 웃었다.
보아하니 손불사 수중의 약은 틀림없이 그녀의 것이 될 것이다.
월령안은 더러운 옷을 한쪽에 놓고 스스로 물을 한 잔 따랐다. 그러다가 육장봉의 갈라 터진 입술을 떠올렸다. 그녀는 멈칫하고 마시지 않고 잔을 들고 육장봉의 곁으로 갔다. 얼마간의 물을 손가락에 부은 뒤 육장봉의 입술을 가볍게 적셨다.
육장봉은 두 입술이 모두 갈라 터지고 피가 나 껍질이 일었다. 손가락이 그의 입술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월령안은 어찌 된 영문인지 육장봉이 그녀의 손바닥을 쓰다듬던 촉감이 떠올랐다.
그녀는 손가락이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고 마치 불에 타는 것 같아 와락 손을 거둬들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정말 미쳤나 보다!"
월령안은 이마를 탁 쳤다. 정말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다.
그녀가 잔 속의 물을 한입에 털어 넣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을 조금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육장봉의 여전히 갈라 터지고 피가 흐르는 입술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좀 있다 어떻게 물을 먹일지 손불사에게 물어봐야겠군요. 좀 더 참으세요."
월령안은 탁자 옆에 걸어가 또 물을 두 잔이나 부어 마시고 나서야 마음의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고개를 들어 육장봉을 바라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전 역시 당신과 조금 떨어져 있어야 당신의 영향을 받지 않는군요. 당신과 멀리 떨어져 있어야 나 자신이 될 수 있네요."
월령안은 눈을 감고 오른손을 가슴 앞으로 하여 자신의 왼팔을 꼭 부여잡고 있다가 한참 만에야 비로소 풀었다.
눈을 뜨니 왼쪽 옷소매에 주름이 생긴 것이 보였다. 그녀는 손을 내밀어 주름을 펴려다가 문득 입고 있는 옷의 옷감이 아주 눈에 익다는 것을 발견했다.
월령안은 옷소매를 치켜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웃고 말았다. 웃다 보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옷감은 그녀가 육 부인이었을 때, 육씨 가문의 안식구들을 위해 사들인 여름 옷감이었다.
그때 그녀는 이 옷감이 마음에 들어 적지 않게 사들였다. 육씨 가문 몇몇 아가씨들의 혼수로 얼마간 보내고 나머지는 자신과 육장봉의 여름옷을 지으려고 했었다.
그녀는 설맞이 물건을 살 때 이 옷감들을 샀었다.
그때 전선에서 육장봉이 또 한차례의 승리를 거두었고 주나라와 북요 간의 전쟁이 내년에 끝날 것이라는 좋은 소식이 전해 왔다.
육씨 가문에 축하 인사를 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고관과 귀인도 있었고 일반 백성들도 있었다. 육씨 가문의 안주인으로서 안팎으로 많은 일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분주히 들락날락하며 매일 두 시진밖에 자지 못했다. 하지만 날을 새어 눈이 새빨개지고 목이 잠겨도 그녀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고 불만도 없었다. 매일 열정이 넘쳐났고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이 옷감을 살 때 그녀는 마음이 마치 꿀물을 마신 것처럼 달기만 했다.
육장봉에 돌아온 후 그들 부부는 한집에서 함께 지내게 된다. 그러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서로를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부부의 관계는 많이 가까워질 것이고 지금처럼 소원하고 냉랭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육장봉이 자신의 편지에 답장을 하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육장봉이 그녀가 손수 지은 옷을 입지 않았다고 속상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육장봉이 돌아오게 되면 그녀는 편지를 쓰지 않고 그와 직접 대화하면 되었다. 그녀는 손수 지은 옷을 직접 육장봉의 옷 상자에 넣을 수 있으니 그가 입지 않을까 걱정하지도 될 것이다.
그녀는 또 그와 같은 색깔, 같은 양식의 옷을 입을 것이다. 그러면 함께 걸어 나가면 그들이 부부임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앞으로 더는 혼자 설을 맞이하지도, 혼자 섣달그믐을 보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앞으로는 육장봉이 그녀와 함께 섣달그믐을 보내고, 함께 설을 맞을 것이다. 심지어 앞으로 아이가 생기고 아이의 아이가 생기고…….
"이 정은 지나면 추억으로 남으련만, 다만 이미 실의에 빠졌을 뿐.(此情可待成追憶 只是當時已惘然)"
월령안은 눈을 감고 손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