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황제는 난각 밖으로 나오자마자 월령안 앞에서의 거만함을 거두고 풀이 죽어 탄식했다.
이반반은 황제가 육장봉의 안위를 걱정한다 싶어 친절하게 위로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월…… 흠흠, 대장군이 계시는 한 월 낭자는 무사할 겁니다."
"짐은 월 낭자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녀가 죽든 말든 짐과 무슨 상관이냐!"
월령안이 무사해도 그녀는 궁중에 남아서 후궁 업무를 처리하지 않을 것이다.
황제는 화가 나서 콧방귀를 뀌고는 소매를 젖히고 가 버렸다.
이반반은 황제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몰래 감탄했다.
'폐하는 역시 폐하시네. 깊게 멀리 내다보신다니까!'
그런데 표정, 말투, 태도 그리고 그 한마디…… 어찌 봐도 황제가 삐진 것 같았다. 결코 그가 말한 것처럼 월령안을 걱정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난각 밖에서의 황제의 모습이 밖으로 전해지자 제삼자는 모두 황제가 월령안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이렇게 되자 월령안의 병이 심해 움직이기 어려운 것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그녀를 난각에 남겨 두어 '요양'하게 한다는 말이 통하게 되었다.
황제는 고집스럽게 월령안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한 것에 대해 변명할 필요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누군가 말을 보태 황제가 대장군을 질투해 말과 마음이 다르다고 말해 줄 것이다.
이러면 육 대장군이 왜 굳이 난각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혐의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황제가 월령안을 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렇지 않으면 월령안 한 여인이 황제의 난각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은 남의 눈에 명분이 없더라도 황제의 여자가 되는 것으로 비칠 것이었다.
하지만 육 대장군이 함께하면 달랐다.
황제는 과연 황제였다. 참으로 영명했다.
* * *
난각 안,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재채기를 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코를 막고 자연스럽게 뒤로 젖혔다. 팔꿈치가 움직이자마자 육장봉이 손을 꼭 잡았다.
월령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육장봉의 입술이 조금씩 움직였다. 허약하면서도 애처롭게 간절히 부탁했다.
"가지 마시오……. 제발 가지 마……."
평소의 차갑고 거만하며 위압적이었던 모습과 달리 지금 육장봉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형언할 수 없는 연약함과 무기력함을 띠고 있었다.
그가 아직도 깨어나지 못했기에 이것은 혼수 상태에서의 잠꼬대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월령안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월령안은 여태까지 육장봉이 남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 육장봉이 그녀에게 애원조로 말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 남자는 그녀 앞에서 줄곧 강압적이며 제멋대로 굴었다. 무엇을 하든지 그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모습이었다.
설령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열여덟 해 동안의 생일 선물을 보충해 줄 때도 거절할 수 없는 거만함이 있었다.
비록 의식이 없다고는 하나, 육장봉이 자세를 낮춰 그녀에게 이렇게 애원하는 건 처음이었다.
또한 처음으로 간절한 말투로 그녀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월령안은 자신의 기분을 형용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육장봉을 바라보다가 한동안 넋을 잃고 말았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육장봉이 깨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와 마주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 아무 반응을 보여 주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에게는 육장봉 때문에 심란해진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 * *
황제와 이반반이 나란히 난각을 떠나자 송 원정은 묵묵히 한 곳을 찾아가 앉았다. 육장봉과 월령안과 가장 먼 곳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이렇게 해도 송 원정은 여전히 불편했다. 어떻게 앉든 불편하고 괴롭기만 했다. 세 사람밖에 없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난각이 너무 작아 붐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이 여기서 필요 없는 사람은 그였다.
송 원정은 구석으로 더 옮겨 가며 존재감을 낮추려 했다.
하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 두 사람은 그의 존재를 완전히 무시했다.
"가지 마시오……. 제발 가지 마……."
혼미한 상태의 육 대장군이 연약하고 가련하게 월령안에게 애원했다. 이제는 혼미한 상태의 육 대장군이 오히려 월령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 모습들을 보면서 송 원정은 저도 모르게 자기가 왜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왜 손 신의가 떠나기 전에 한발 앞서 난각에서 나가지 않았을까.
남이 정을 나누는 것을 방해하면 벼락을 맞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는 자신이 육 대장군을 방해하면 그분이 아는 순간 큰 벌을 내릴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나가면 괜찮을까?'
송 원정은 몰래 눈을 뜨고 보았다. 월령안은 의자 위에 멍하니 앉아 손깍지 낀 두 사람의 손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보니 육 대장군은 잠꼬대한 것으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를 보자 그는 자신이 나갈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이 난각은 너무 작았다. 그같이 필요 없는 사람이 있을 공간이 없었다.
송 원정은 월령안에게 말하지 않고 의료함을 들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갔다. 문도 가볍게 조용히 열었다.
나가기 직전, 그는 한 걸음 멈추고 힐끔 뒤돌아보고는 묵묵히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나? 방 안의 두 사람이 내가 나가는 걸 알아차릴 수가 있겠어? 아마 저 두 사람은 내 존재조차 전혀 알지 못할걸!'
송 원정은 마음이 씁쓰레했다. 하지만 육 대장군에게 혹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멀리 가지 못했다. 내관에게 낮은 걸상 하나를 찾아 달라고 부탁해 가련하게 문밖에 앉아 있었다. 육 대장군과 월령안을 위해 그저 문앞을 지켰다.
금군과 내관들은 멀리에서 문밖을 지키는 송 원정을 보고도 감히 다가가지 못했다. 잠자코 도대체 월령안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황제가 난각을 내주었는지 짐작할 뿐이었다.
사실은 월령안이 아니라 육장봉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추측한 사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낮에 육 대장군은 성문 밖에서 한 발에 북요 대황자 야율융진을 불구로 만드는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육 대장군이 그때 보였던 힘찬 몸짓, 날카로운 눈빛, 도도한 기세 그리고 어떤 큰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방자한 모습은 결코 부상을 당한 모습이 아니었다.
후궁 여러 궁의 비빈들은 황제가 월령안을 위해 난각을 비운 것을 알고 모두 얼굴빛이 검푸르게 변했다.
난각이 어떤 곳인가.
그곳은 황제가 공무를 처리하는 곳이었다. 평소 후궁의 비빈은커녕 태후와 황후라도 조서를 받지 못하면 난각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일개 여 상인으로 신분이 비천할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 데도 난각을 자유로이 드나들면서 그녀들 모두의 체면을 짓밟았다.
당연히도 지금은 더욱 봐주기 힘들었다. 황제는 그녀를 위해 난각을 비우고 편전으로 자리를 옮겨 공무를 보았다.
육 대장군의 체면까지 있어서 황제가 전례를 깨뜨리고 월령안을 난각에 머물면서 요양하게 했을 것이라는 걸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무슨 큰일이 생겼을 거라는 추측이 들어도 황제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을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그녀들도 도리는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분이 찝찝하고 여전히 질투가 났다. 월령안을 당장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월령안 이전에 황제는 한 번도 어느 여인을 위해 전례를 깨뜨린 적이 없었다.
월령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감히 황제나 육 대장군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 감히 소란을 피우지 못하고 가슴속에 월령안에 대한 원한을 새길 수밖에 없었다.
비빈들은 감히 나서지 못했지만 태후는 두렵지 않았다.
황제가 월령안을 난각에 남겨 두는 것은 조상의 제도를 위반한 것이었다. 그녀는 태후로서 황제를 혼낼 이유가 충분했다.
황제가 불쾌해하면?
전에 황제가 월령안을 도와 나이가 많은 궁녀와 내관을 강제로 출궁시킨 일에 대해 그녀 역시 불쾌했었다.
황제가 그녀의 체면을 봐주지 않는데 그녀가 왜 황제의 체면을 봐주겠는가.
태후는 냉담한 표정으로 내관더러 즉시 가서 황제를 모셔 오라고 했다.
하지만 어린 내관이 대답하고 미처 돌아설 겨를도 없이 한 늙은 내관이 급하게 걸어 들어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마마, 마마, 큰일 났습니다!"
"왜 당황하는 것이냐! 내가 여기에 있다. 이 내가 태후인데 황궁에서 뭐가 큰일 날 일이 있다는 것이냐!"
태후의 얼굴에는 위엄이 서려 있고 눈매에서는 느긋함이 엿보였다. 늙은 내관의 말에 영향받지 않은 것이다.
월령안은 그 자신에게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수중의 후궁 업무를 내려놓아야 한다. 황제가 새 황후를 봉하기 전에 후궁전에서 후궁 업무를 주관할 자격을 따지면 그녀가 가장 우세였다.
그녀는 지금 기분이 아주 좋았다.
"마마, 황제의 곁에 있는 이반반이 금군을 데리고 상의국으로 가서 상의국의 설 상궁을 잡아들였습니다."
늙은 내관은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재빨리 말했다.
"소인이 자세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설 상궁은 황후의 사람으로 곽씨 가문과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너…… 너 다시 한번 말하거라. 설 상궁이 누구의 사람이라고?"
태후는 갑자기 놀라 얼굴이 하얗게 질려 늙은 내관을 바라보았다.
"황후의 사람입니다."
늙은 내관은 태후의 모습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반반이 몰래 소인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폐하의 수중에 설 상궁이 곽씨 가문을 위해 일을 했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합니다!"
설 상궁은 상의국을 관리했다. 후궁의 모든 사람, 황제부터 청소하는 내관, 궁녀에 이르기까지 입는 옷을 모두 상의국에서 만들었다.
황궁에서 옷감에 손을 댄다면 절대적으로 설 상궁을 피할 수 없었다.
설 상궁은 태후의 사람으로 일찍부터 태후를 도와 적지 않은 일을 했다. 손에 피도 묻혔었다.
황제 앞에서 태후는 줄곧 대범하며 도리를 아는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지금 태후를 위해 일하던 설 상궁이 이반반에게 끌려갔다. 만일 설 상궁이 뭐라도 털어놓는다면 황제가 앞으로 태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폐하께, 어서……. 아니, 내가 폐하를 만나야겠다."
태후는 한순간 하늘과 땅이 빙빙 도는 것 같았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정신을 잃기 전, 태후는 눈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설 상궁은 그녀의 사람이 아니므로 그녀를 위해 비밀을 지켜 주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녀를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그녀가 황제 앞에서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습들이 전부 가짜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어의! 어서, 어서 어의를 부르거라."
태후가 갑자기 쓰러졌다. 궁중의 내관, 궁녀들도 깜짝 놀라 황급히 황제와 어의를 모시러 뛰어갔다.
황제는 가까스로 마음속의 초조함을 가라앉히고 밀린 공무를 처리하려 했다. 상주서를 쥐자마자 내관이 와서 태후가 실신했다고 보고했다.
사태의 엄중성을 알리고자 내관은 울먹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폐하, 태후 마마 옆의 주(朱) 어의가 말씀하셨습니다. 태후 마마의 상태가 좋지 않아 자칫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