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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15)화 (515/1,004)

515화 신은 죄를 청하러 왔습니다!

황제는 어진 새색시처럼 궁전에 꿇어앉은 월령안의 모습에 그만 기가 막혔다.

'월령안, 이건 분명 알면서도 고의로 저러는 거잖아! 내가 모를 줄 알아! 일부러!'

"월령안, 또 재간이 늘었느냐! 이젠 짐도 안중에 없구나."

황제는 화가 치밀어 탁자 위에 있던 문진을 들었다가 월령안의 얇은 몸매를 한번 보고는 이를 악물고 내려놓았다.

'월령안을 상하게 하면 상처를 치료해야 하고 그러면 나를 위해 일을 할 수 없잖아.'

하지만 월령안을 혼내 주지 않으면 화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됐어, 상주서로 바꾸자!'

상주서에 맞으면 기껏해야 조금 부어오를 뿐 월령안이 그를 위해 일하는 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난 역시 신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자상한 황제야!'

황제가 상주서를 들어 내던지려는 순간 내관이 갑자기 들어왔다.

"폐하, 대장군께서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장봉?"

황제는 기뻐하며 월령안을 벌하려던 것도 잊어버리고 즉시 상주서를 내려놓고 재촉했다.

"어서 대장군께 들어오라고 해라."

'육장봉? 괜찮은 건가?'

월령안은 땅바닥에 꿇어앉아 한쪽에 드리운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녀는 육장봉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황제를 힐끗 보았다. 황제가 흥분되어 그녀의 존재를 깡그리 잊어버린 것을 보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육장봉을 보고 싶지 않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난각 밖에 있던 육장봉은 황제의 말을 듣고 내관이 나가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난각에 들어서니 땅바닥에 무릎을 꿇은 월령안이 보였다. 육장봉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바로 월령안 때문에 왔던 것이다.

그는 입궁하자마자 월령안이 난각에서 황제를 노하게 한 것 같다는 소식을 들었다.

"장봉, 어떻느냐? 괜찮느냐?"

황제는 일어서서 육장봉의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것을 보고는 관심 어린 얼굴로 물었다.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지난번 바로 난각에서 그가 가볍게 툭 치자 육장봉은 쓰러졌던 것을.

그때 그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리고 이 강대한 대장군도 약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신은 무사합니다."

육장봉은 월령안의 곁에 걸어가서 무릎을 꿇었다.

"폐하, 신은 죄를 청하러 왔습니다."

"장봉, 이게 무슨 짓이냐? 어서 일어나거라……. 이반반, 자리를 드리거라."

황제는 깜짝 놀랐다. 급히 이반반에게 육장봉을 부축하라고 분부했다.

황제는 물론 월령안도 깜짝 놀랐다.

육장봉은 대전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 특권이 있었다. 갑자기 무릎을 꿇으면서 그것도 그녀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육장봉, 이건 또 무슨 짓이지? 그것도 왜 하필 내 옆에?'

월령안은 참지 못하고 슬며시 육장봉을 힐끗 보았다.

월령안은 자신이 아주 은밀하게 행동한 줄 알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육장봉의 확고한 감정이 실린 눈동자와 마주쳤다.

'무서워 마시오. 내가 있잖소.'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며 말없이 위로했다.

월령안은 잠깐 멍해졌다가 육장봉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다음에는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더는 육장봉을 보지 않았다.

이반반이 다가서서 육장봉을 부축하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육장봉은 황제에게 포권하며 다시 한번 말했다.

"폐하, 신은 죄를 청하러 왔습니다!"

"무슨 죄를 청한단 말이냐? 일단 일어나서 이야기하거라."

황제는 약이 바싹 올랐다. 이반반이 육장봉을 부축하지 못하자 자신이 직접 걸어왔다.

하지만 황제가 다가오기도 전에 육장봉은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이 북요 황태자 야율융진을 불구로 만들었습니다."

"뭐라고?"

황제가 발걸음을 멈추고 한 손으로 탁자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이반반을 가리키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불구로 만들었다는 게 무슨 뜻이냐? 짐이 생각하는 그 뜻이냐? 이반반처럼 말이냐?"

육장봉은 황제가 가리키는 대로 이반반을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반반은 어이가 없었다.

'가만히 있던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거야?'

"너…… 너……!"

황제는 육장봉을 가리키며 거의 졸도하기 직전의 반응을 보였다. 한참 동안 손가락질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리고 화가 나서 말했다.

"손을 쓸 때 좀 어지간히 정도껏 하면 안 되냐! 야율융진은 어찌 됐든 북요 황태자다. 북요가 아무리 체면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고 해도 그를 위해 나설 것이다."

'야율융진을 직접 죽여 버리는 것이 불구로 만드는 것보다 나을 것인데!'

죽이면 북요인들은 야율융진의 죽음으로 이익만을 챙기려 할 것이다. 어차피 사람이 죽었고 야율융진은 후대도 없다. 이익을 충분히 주면 북요인들은 자연히 입을 다물 것이다.

하지만 불구로 만드는 것은 다르다.

불구가 된 야율융진은 육장봉에게 죽기 살기로 덤빌 것이다.

"신…… 쿨럭……."

육장봉의 거친 기침 소리가 터졌다. 그는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기침을 억누르려 했다. 하지만 기침은 점점 더 심해졌다.

월령안은 자기 자신에게 육장봉의 병세를 신경 쓰지 말라고 되뇌었다.

육장봉 정도면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잘 돌볼 것이다.

하지만 육장봉의 기침은 시작되자 끝이 없었다. 가면 갈수록 기침이 더 심해져 마치 내장을 다 토해낼 것만 같았다.

'뭐가 이렇게 심하지?

육장봉의 부상은 전보다 더 심해진 건가?'

"장봉, 괜찮으냐?"

황제는 깜짝 놀라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육장봉을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육장봉이 밀어냈다.

"폐하, 신…… 큭…… 괜찮습니다."

"아직도 괜찮다니. 이게 뭐냐…… 기침을 왜 이렇게 많이 해."

황제는 육장봉의 뜻을 무시하고 강제로 잡아당겼다.

"이반반, 어서, 장봉에게 물을 가져다주거라. 또 사람을 보내 손 신의를 모시거라. 어서 오라고 하거라!"

"네, 폐하."

이반반은 황제의 명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일순간 먼저 물을 따라야 할지 아니면 손 신의를 찾아가야 할지를 몰랐다.

"폐하, 신은 정말……."

이번에 육장봉은 밀어내지 않고 황제가 부축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일어서는 순간 갑자기 월령안에게 쓰러졌다.

"육장봉!"

월령안은 깜짝 놀랐다. 몸은 머리보다 반응이 빨랐다. 멍한 상태에서 몸을 일으켜 육장봉을 받았다.

육장봉이 온몸의 무게로 월령안을 짓누르는 바람에 그녀는 도저히 버티지 못했다. 두 사람은 땅바닥에 세차게 넘어졌다.

월령안은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육장봉은 그녀의 몸에 기댄 채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월령안에게 꼭 달라붙었다.

월령안의 부름 소리를 들은 듯 육장봉은 간신히 두 눈을 뜨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눈가에는 죄책감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미안하오…… 나는 좀 피곤한 것 같소."

말이 떨어지자 육장봉은 눈을 감았다. 동시에 입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월령안은 허둥지둥 피를 닦아 냈지만 닦을수록 더 많아졌다.

"육장봉, 당신…… 당신 절 놀라게 하지 마세요!"

월령안은 쩔쩔매며 일순간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다.

육장봉은 그녀 앞에서 영원히 강압적이고 난폭하며 도도했고, 또 만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육장봉의 이처럼 연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더럭 겁이 났다.

"그만 조용히 하거라."

이미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황제는 월령안보다 많이 침착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육장봉을 부축하려 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황제가 눈썹을 찡그리고 월령안에게 명했다.

"먼저 짐을 도와 장봉이를 부축해서 바로 눕히거라. 몸을 이렇게 웅크리고 있으면 불편해."

월령안 즉시 그대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육장봉에게 꽉 잡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손 신의와 송 원정은 금군에 업혀 난각 밖으로 왔다. 금군이 급하게 둘을 내려 주자 미처 몸을 가누지 못한 두 사람은 뒤에서 바짝 따라오던 이반반에게 밀려 휘청거리며 난각으로 들어섰다.

"신의 두 분, 빨리 행동해 주세요. 월 낭자가 두 분이 살려 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약 월 낭자가 잘못되면 대장군께서 화를 내실 겁니다. 그러면 폐하께서도 말리시기 힘들다니까요."

이런 순간에도 이반반은 육장봉의 부상을 감추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일부러 큰 소리로 다 들리게 월령안이 부상당했다고 말했다.

"재촉은 왜 해. 그깟 졸도한 걸 가지고. 죽지도 않을 텐데 무슨 걱정이야."

손 신의와 송 원정은 모두 내막을 아는 사람들이라 당연히 믿지 않았다. 손 신의는 심지어 기회를 틈타 비꼬기까지 했다.

그는 의원으로서 육장봉처럼 의원의 치료 성과를 조금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걸핏하면 목숨을 내거는 환자를 가장 싫어했다.

육장봉은 자기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얼마나 좋은 약을 많이 썼는지 알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뛰쳐나가서 싸움을 했다.

'이건 원 사는 게 싫은 건가 아니면 의원이 너무 한가한 게 싫은 건가?'

밉보여서는 안 되는 상대였으니 가만히 있는 것이지 아니었다면 그는 진작에 손을 떼고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이 손불사가 황제가 주는 그 정도의 돈이 아까워서 이러는 줄 아나.'

송 원정은 조정의 봉록을 받는 사람이라 감히 소홀히 하지 못했다. 손불사가 푸념하는 동안, 송 원정은 먼저 난각에 발을 들여놓았다.

눈앞의 광경에 송 원정은 깜짝 놀랐다.

"손 신의, 어서 오세요……. 썩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왜……"

손불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월령안을 보고는 놀라서 의료함을 땅에 떨어뜨릴 뻔했다.

"왜 무슨 피가 이렇게 많아! 빨리, 빨리 비켜……."

손불사는 급히 의료함을 들고 달려가서는 육장봉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황제를 와락 밀쳐 버렸다.

"여기서 쭈그리고 앉아 방해하지 마. 사람 구하는 데 방해되지 말라고."

황제는 완전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손불사에게 밀쳐져 땅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어리둥절해져서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너, 너…… 무엄하다!"

황제는 손불사를 삿대질하며 화가 나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손불사는 하극상을 일으킨 것이었다. 황제는 방금 전 행동 하나만으로도 그는 손불사를 죽일 수 있었다.

손불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재빨리 육장봉의 맥박을 잡으면서 표정이 굳어졌다.

"폐하, 땅바닥이 차갑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이반반은 태의서까지 뛰어갔다가 다시 뛰어오다 보니 힘이 들어 숨을 헐떡이고 있다. 황제가 멍하니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고 급히 다가가서 황제를 부축했다. 동시에 손불사를 위해 변명했다.

"폐하, 손 신의는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급했던 것뿐입니다. 절대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흠, 그래. 짐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다."

황제는 얼굴색이 살짝 변하더니 도도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살면서 여태까지 처음으로 이렇게 담이 크고 발칙한 사람을 만났다. 육장봉이 손불사가 살려 주길 기다리고 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엄벌했을 것이다.

이반반은 묵묵히 황제의 속내를 폭로하지 않고 대신 영리하게 말을 돌렸다.

"폐하, 대장군은 도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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