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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13)화 (513/1,004)

513화 내가 책임지겠다

이기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다부지게 생긴 내관을 수십 명이나 데리고 왔다. 그들은 얼핏 보기에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낭자, 이 사람들은 다 믿을 만해요."

이기는 감히 월령안에게 아부하지 못하고 묵묵히 거리를 유지했다.

월령안은 그를 힐끗 흘겨보았다.

"이렇게 능력이 대단한 걸 보니 너는 분명 육장봉의 사람은 아니구나."

"낭자……!"

이기는 울상이 되었다.

'난 정말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가자."

월령안은 더는 추궁하지 않고 사람을 이끌고 곧장 상의국으로 갔다.

* * *

상의국의 행수 상궁은 소식을 듣고 잽싸게 나와 맞이하였다. 월령안이 기세등등하게 달려와도 당황하지 않고 의젓하게 예를 올렸다.

"월 낭자께서 무슨 일로……?"

"상의국을 봉하거라. 누구도 드나들지 못한다."

월령안은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스쳐 지나갔다.

행수 상궁은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뒤돌아서 월령안을 쫓아갔다.

"월 낭자, 저희 상의국에서 무슨 잘못을 범했기에 사람을 이끌고 와서 봉하는 겁니까?"

"잘못을 저지른 걸 알면 가만있지 못할까?"

월령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행수 상궁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에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지 말게."

행수 상궁은 월령안이 갑자기 멈춰 설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하마터면 월령안을 들이받을 뻔했다.

월령안이 노려보자 행수 상궁은 속이 뜨끔하여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당황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행수 상궁은 강경하게 말했다.

"월 낭자, 상의국 전체가 태후 마마의 생일잔치 복장을 준비하느라 쉴 틈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얘기해 주세요. 만일 태후 마마의 생일잔치에 영향을 끼치면 당신이나 저나 모두 책임을 질 수 없잖습니까."

"태후 마마로 나를 짓누르려고?"

월령안은 환하게 웃었다.

"소인이 어찌 감히."

행수 상궁은 입으로 자신을 낮추고 있었으나 표정에는 거만함이 어려 있었다. 월령안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월령안은 코웃음을 쳤다.

"감히 못 하겠으면 입 다물고 있어."

월령안은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손을 흔들어 사람을 떼어 놓고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이기, 명부대로 출석을 부르거라. 반 시진 뒤에 상의국 모든 사람을 내 앞에 세우거라!"

"네, 낭자!"

이기는 공손히 대답하고 허리를 굽혀 월령안을 배웅했다. 월령안이 멀리 간 다음에야 몸을 일으켰다.

뒤돌아서 여러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직 앳된 얼굴에 얼마간의 스산한 기운이 배어 있었다. 어렴풋하게나마 이반반의 풍채가 엿보였다.

"월 낭자의 얘기 다 들었나? 잔머리를 굴리지 말고 고분고분하게 잘 따르거라. 그렇지 않아서 내가 월 낭자가 분부한 일을 제대로 못해 욕을 먹으면 너희들 누구도 도망치지 못할 거다."

이기는 오만방자한 얼굴에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득세한 이의 '소인배 모습'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황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황궁에서는 착한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다. 권세를 얻어도 나대지 않으면 업신여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상의국의 침모들은 방금 전 한 무리의 내관들에게 쫓겨나와 놀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기의 말을 듣자 젊은이든, 나이 든 이든 모두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보건대 매우 공손했다.

이기도 그녀들이 정말로 공손한지 아니면 공손한 척하는지 따지지 않았다. 그는 이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말만 잘 들으면 되었다.

명부대로 출석을 한 번 부르니 다섯 사람이 적어진 것을 발견했다. 이기는 이름에 동그라미를 친 다음 행수 상궁을 불러 물었다. 그녀들이 후궁의 주인에게 옷을 가져다주러 갔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내관 다섯 명을 지명하여 밖으로 나가 찾게 했다.

"잘 기억해. 월 낭자가 반 시진을 주었다. 반 시진 내에 꼭 사람을 찾아야 한다."

이기는 '사람'을 강조했는데 그 뜻은 자명했다.

황궁에서 조금이라도 소문이 나면 사람들은 다 알게 된다. 월령안은 조금도 숨기지 않고 기세등등하게 사람을 이끌고 와서 상의국을 봉했다. 조금이라도 신경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만약 상의국에 정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입막음으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반 시진이 지나 사람을 찾으러 나갔던 내관이 돌아와 복명했다.

이기가 예상했던 대로 누군가 시신 한 구를 가져왔다.

"이 공공, 사망자는 상의국의 수고(秀姑)입니다. 소인은 찾아다니다가 청월궁(淸月宮)의 마른 우물에서 이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소인이 찾았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청월궁은 이름이 우아하나 실제로는 냉궁이었다.

황제는 인자해 잘못을 범한 비빈에 대해서도 항상 너그럽게 대했다. 지금 냉궁에는 머무는 비빈이 없으므로 평소에 지키는 사람도 없었다. 이곳에서 사람이 죽으면 목격자조차도 없게 되는 것이다.

"알겠다! 이 사람들을 지키거라. 서로 이야기 나누지 못하게 해."

이기는 얼굴을 굳히고 한마디 훈계한 뒤, 뒤돌아서 상의국 정전에 들어갔다. 월령안은 상석에 앉아 손에 무엇인가 들고 뒤적거리고 있었다. 이기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겨 조심스레 월령안의 옆으로 다가가서는 허리를 굽혀 말했다.

"낭자, 상의국의 수고가 죽었습니다."

"수고? 어제 상의국에서 모두 일곱 명이 외출했어. 그중 수고라는 이름은 없었다."

월령안은 손에 쥔 책자를 내려놓고서 차갑게 웃었다.

"네, 수고라는 이름은 없습니다."

이기는 고개를 떨구고 월령안이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책자를 얼핏 스쳐보았다. 월령안이 왜 상의국의 상반년 사용 옷감 등기부를 보는지 궁금했다.

이기는 감히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한 눈으로 힐끗 훑어보고 시선을 거두었다. 정신을 다른 데 팔다가 월령안에게 발견될까 두려웠다.

"어제 외출했던 일곱 명을 끌고 가거라. 그리고 수고와 한 침실을 쓰는 침모들도 모두 끌고 간다."

월령안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네, 낭자."

이기는 월령안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 상의국에서 이렇게 많은 침모를 끌고 가면 상의국의 정상적인 운행에 영향을 줄 것이다.

상의국이 태후 생일잔치의 길복(吉服)을 제때 만들어 내지 못하면 태후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기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되삼키고 말았다.

이 일은 그가 일깨워 주지 않아도 되었다. 상의국의 행수 상궁이 태후를 들먹여 월 낭자에게 한발 물러서게 강요할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상의국의 행수 상궁이 월령안이 침모 수십 명을 끌고 가겠다고 하자 곧바로 월령안을 막고 나섰다.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월 낭자, 당신은 후궁 업무를 책임진 큰 인물입니다. 소인은 감히 그 명령을 의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끌고 가는 침모는 모두 태후 마마의 길복을 짓는 침모입니다. 그녀들을 끌고 가면 태후 마마 생일잔치 길복은 어떻게 할 겁니까?"

"내 명령을 의심하지 못하면 그냥 길 비켜."

월령안은 차갑고 거만한 표정을 지은 채 추호도 양보하지 않았다.

행수 상궁은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월 낭자, 태후 마마의 길복……."

"내가 책임진다."

월령안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언짢아하며 이기를 불렀다.

"이기!"

이기가 나서서 행수 상궁을 가로막았다.

"설 상궁, 죄송하지만 비켜 주시죠. 길 막지 말고!"

행수 상궁은 이기에게 떠밀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화가 나서 온몸을 떨면서 말했다.

"그래! 좋아! 내가 지켜보겠어요. 월 낭자 당신이 어떻게 책임지는지!"

월령안은 그녀를 흘끔 쳐다보고 아무 말도 없이 성큼성큼 나가 버렸다.

이기는 근심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갔다. 상의국을 벗어나자마자 참지 못하고 귀띔했다.

"월 낭자, 설 상궁은 틀림없이 일부러 못된 짓을 할 겁니다. 태후 마마 생일잔치 길복에는 일말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지 않고 태후 마마께서 책망하시게 된다면 우리 모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월령안은 표정에 변함이 없이 유유히 앞으로 걸어갔다.

"내 기억에 숙 태비 옆에 있던 옥직(玉織) 낭자가 상의국 출신이던 것 같은데. 맞나?"

그녀는 후궁의 모든 궁녀, 내관 명부를 정리했다. 그로 인해 매개 주인 옆에 있는 궁녀들이 뭘 잘하는지, 궁중에서 어떤 경력이 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월 낭자, 설 상궁은 태후 마마의 사람입니다."

이기의 수려한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말이냐?"

"아닙니다. 별일 아닙니다."

이기는 고개를 떨구고 마음속으로 불안에 떨었다.

황후는 여러 해 동안 후궁의 권력을 잡고 대황자마저 낳았지만 감히 태후의 사람을 건드리지 못했었다. 월 낭자는 입궁한 지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는데 태후의 사람을 건드린 것이다.

'이 담력, 이 기백……!'

이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또 그럴 시간도 없었다.

월령안은 상의국에서 끌고 온 침모를 전부 이기에게 맡겼다. 그리고 그에게 심문하게 했다.

갑자기 이렇게 큰일을 맡게 되자 이기는 정신 없이 바빠 별로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심문하는 일을 이기에게 넘겨주고 월령안은 숙 태비를 찾아갔다. 그녀에게 궁녀 옥직을 상의국 행수 상궁으로 보낼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숙 태비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곧 빙긋 웃었다.

"내가 어부지리를 얻었구나."

"태비 마마 농담하지 마세요. 제가 태비 마마의 보호가 필요해서 그럽니다."

월령안은 자신이 황궁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후궁 모든 이들의 미움을 사더라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숙 태비는 달랐다.

이변이 없는 한, 숙 태비는 궁중에서 늙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숙 태비는 그녀 때문에 정세에 휘말리게 되었고 태후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황궁에서 나간 다음 태후가 숙 태비를 건드리지 못하게 숙 태비를 위해 길을 닦아 놓아야 했다.

"행수 상궁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을 거야. 태후 마마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니까.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거네."

숙 태비가 나직이 귀띔했다.

"상의국의 행수 상궁은 태후 마마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는 준비 없는 싸움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감히 손쓸 수 있는 건 모든 걸 확실하게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응?"

숙 태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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