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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12)화 (512/1,004)

512화 사람이 살아만 있으면 된다

월령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황제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폐하, 여기는 저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폐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취원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청희 장공주는 당황해서 절박하게 말했다.

"폐하,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는 황실의 공주입니다. 일개 여 상인이 저를 모욕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황실의 체면을 어찌하시려는 겁니까? 종실 친왕과 문무백관이 알면 필히 폐하를 꾸짖을 것입니다."

"폐하, 일이 생겼습니다! 북요 황태자 야율융진이 성문 입구에서 수성(守城) 병사들과 충돌이 생겼습니다. 수성……."

어린 내관이 황급히 뛰어 들어와 급하게 보고했다.

"폐하……!"

청희 장공주는 속으로 아차 싶어 큰소리로 내관의 말을 중단시켰다.

"입 닥치시오!"

황제는 청희 장공주를 노려보며 청희 장공주의 따귀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눌렀다.

청희 장공주는 무서워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황제는 고개를 돌려 어린 내관에게 말했다.

"계속해서 말하거라. 무슨 일이냐?"

내관은 감히 머뭇거리지 못하고 재빠르게 말했다.

"수성 장병들이 실수로 삼황자 야율헌일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 일로 삼황자는 크게 다쳤습니다. 저희쪽에서 치료를 권했지만 북요인들은 삼황자를 치료할 것을 거부하고 성문 앞에 주둔해 있습니다.

그들은 대장군을 지목하여 신의를 데리고 와서 삼황자를 구하라고 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성문 입구를 막고 있겠다고 합니다. 북요 황태자 야율융진은 엄포를 놓았습니다. 만약 삼황자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북요에서 현음 장공주를 능지처참할 것이라고 합니다."

"대단해! 야율융진 대단하군!"

황제는 낯빛이 변하더니 곧 야율융진의 의도를 파악했다.

야율융진은 육장봉을 유인하여 그의 부상 여부를 확인하려 하는 것이다. 그를 위해서 현음 장공주를 내세워 육장봉을 압박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월령안, 여기는 너한테 맡긴다. 짐을 실망시키지 말거라!"

나랏일과 비교하면 청희 장공주가 '유산'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방금 전 청희 장공주가 경중의 분별도 없이 내관의 말을 끊고 끼어들었던 그 순간, 황제는 그녀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다.

"네, 폐하."

월령안은 청희 장공주를 동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청희 장공주가 망하는 것은 하늘의 뜻인가 보다!'

청희 장공주는 아직 좀 전의 두려움에서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부들부들 떨면서 말했다.

"폐, 폐하…… 부황! 부황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유지(遺旨)를 남겼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만약 저를 학대하시면 저는 폐하를 폐위시킬 수 있습니다."

이는 그녀의 마지막 버팀목이자 그녀가 황위를 쟁탈하려고 했던 저력이기도 했다.

그녀의 수중에는 고종 황제가 남겨 준 황제를 폐위시킬 수 있는 유지가 있었다.

그녀는 원래 암암리에 힘을 축적한 다음 조정의 대신들과 연합하여 유지를 근거로 황제를 폐위시키고 자기 아들을 황위에 올리려 했다.

하지만 뜻밖에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황제에게 들키고 말았다.

황제가 그녀의 진면목과 야심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도 죽고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다. 지금 그녀는 오직 월령안을 끌고서 같이 죽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그녀는 어떤 대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유지요? 하, 그것 때문에 고모께서 감히 황위를 넘보셨군요. 알고 보니 황조부께서 남긴 유언이 있으셨어요. 황조부께서는 참말로 고모를 아끼셨던 것 같습니다."

황제는 처음으로 유지에 대해 들었다.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잠깐의 충격일 뿐 두려움 같은 것 없었다.

그는 지금 갓 등극하여 아직 아무 기반도 다지지 못한 때가 아니었다. 청희 장공주도 영녕후와 북요 남원 대왕의 지원을 받던 시절이 아니었다. 청희 장공주가 지금 그를 폐위시키려는 것은 백일몽과 같은 것이었다.

"폐하께 그 유지를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러니 제발 월령안을 죽여 주세요!"

그 유지는 그녀의 손에서 이미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만약 그 유지로 월령안의 목숨을 바꿔 그녀의 아들 그리고 그녀 자신을 위해 복수할 수만 있다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쓸모를 다하는 것이었다.

영취원에 갇혀 있는 동안 그녀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전에 있었던 일들을 곰곰이 되새겨 보니, 그녀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은 모두 월령안 때문이었다.

일개 여 상인으로 인해 서른여 해 동안 그녀가 잠자코 힘을 기르며 준비해 온 모든 것이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녀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일개 여 상인에게 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은 빈털터리가 되어 버렸는데 월령안 이 여 상인이 후궁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월령안이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

설령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월령안이 죽기를 바랐다.

청희 장공주의 눈은 온통 광기로 뒤덮였다.

'월령안, 오늘은 네 기일이 될 것이다!'

월령안의 목숨과 황제를 폐위시킬 수 있는 유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황제가 미색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은 이상 어떻게 선택해야 할지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청희 장공주는 실망하고 말았다.

황제는 대답하지 않고 냉소하며 되물었다.

"고모, 황숙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아시나요?"

청희 장공주의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황숙이 계시는 한, 짐이 그 유지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입니다."

황제는 담담하게 눈길을 거두어 월령안에게 옮기더니 경고가 어린 말투로 말했다.

"월령안, 이곳은 너에게 맡긴다. 짐은 오늘 일이 밖으로 새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소문도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느냐?"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월령안은 마음속 당황스러움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되도록 평온을 유지하면서 황제께 읍하였다.

'폐하의 뜻을 알고 있습니다!'

"폐하, 폐하…… 목숨 살려 주세요! 목숨만 살려 주세요."

월령안뿐만 아니라 영취원의 궁인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들은 미친 듯이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황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뒤돌아서 떠나갔다.

청희 장공주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 황제를 쫓아갔다.

"폐하, 폐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저를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폐하…… 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

이번에 월령안은 더는 자제하지 않고 청희 장공주를 발로 걷어찼다.

"월령안, 네가 감히!"

청희 장공주는 두 눈이 벌게져 사람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찰싹!

월령안은 청희 장공주의 따귀를 후려치고 사납게 말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

바로 청희 장공주가 말이 너무 많아 영취원의 모든 사람이 다 죽게 되었다. 그것도 모두 월령안 그녀의 손에 죽게 되었다.

"너……!"

청희 장공주는 맞아서 침대에 쓰러진 채 눈을 커다랗게 뜨고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월령안은 냉랭하게 그녀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뒤돌아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뒤로는 영취원 궁인들의 절망적인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영취원은 냉궁(冷宮)과 가까울 뿐만 아니라 후궁의 각 궁전들과도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밖에는 금군이 지키고 있으므로 평소에 감히 접근하는 사람이 없었다.

영취원은 문을 꾹 닫아걸고 몇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불을 놓아 태워 버려도 일시에 후궁의 사람들은 알 수가 없었다.

영취원의 하인을 처리한 다음 월령안은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금군에게 분부했다.

"시신은 먼저 들어 내가지 마. 날이 저문 다음 다시 처리하거라. 영취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돼. 알겠느냐?"

"소인 알겠습니다."

금군은 몸에 아직 피 냄새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 앞에서 감히 경망스럽게 행동하지 못하고 겸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수십 명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중 대부분은 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죽은 후에도 월령안은 일말의 불안함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건대 눈앞의 연약해 보이는 이 여인은 마음이 어지간히 독한 게 아니었다. 그들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공주를 잘 지켜보거라. 죽어서는 안 된다. 물론 입을 열게 해서도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몇 명이 더 죽을지도 모른다."

월령안의 목소리는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무심한 듯한 나태함까지 띠고 있었다. 하지만 금군은 등골이 서늘했다.

"월, 월 낭자, 장공주 그분은……."

'그분이 말을 하는 걸 저희가 어떻게 막을 수가 있나요.'

"난 그냥 사람이 살아만 있으면 된다."

월령안은 금군을 다루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말을 끝까지 해 줄 수는 없었다.

'과정은 상관없고 결과만 요구한다고!'

월령안은 금군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고 분부한 다음 떠나갔다.

걸음걸이가 침착하고 표정이 평온하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영복궁으로 돌아와서도 그녀는 태연자약하게 하인에게 목욕하게 물을 준비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하인이 나가자마자 그녀는 다리에 힘이 빠져 의자에 주저앉았다. 얼굴빛이 창백하고 두 손을 모아 손깍지를 끼고는 크게 숨을 골랐다.

제왕이 화를 내면 시체가 천 리까지 널린다.

그녀는 오늘에야 황제가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황궁의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지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월령안이고 그래도 아직 쓸모가 있다는 데에 대해 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 역시 영취원에서 죽어야 할 것이다.

청희 장공주는 고의로 유지에 대해 말한 것이 분명했다.

황제가 그녀의 목숨으로 유지를 바꾸지 않아도 그녀가 유지의 존재를 아는 한 언젠가 황제는 그녀를 죽여 입을 막을 것이다.

"다행히도 모두 지나갔어."

월령안은 눈을 감고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청희 장공주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정말 지독하군!'

"당신을 도와 나를 모함한 사람은 누구지?"

후궁에서 청희 장공주를 도와준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다는 걸 떠올리자 월령안은 재빨리 투지를 회복했다.

적수를 아직 깨끗하게 척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녀는 쓰러질 수 없었다.

월령안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상의국으로 가자!"

"낭자, 물이 벌써……."

"놔두세요!"

이 순간 한가하게 목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몸에 피비린내가 난다고 죽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청희 장공주와 손을 잡은 사람을 찾아내지 못하면 그녀가 상대방에게 죽을 가능성이 컸다.

월령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옥죽은 겨우 기회를 찾아 월령안에게 하사받은 옷을 바꿔치기 한 사실을 보고하려 했다.

그런데 또 한발 늦어 버렸다. 그녀는 월령안이 떠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월령안은 궁중에 적수를 적지 않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홀몸으로 상의국으로 가지 않았다. 이기더러 무력 행사를 할 수 있는 내관들을 부르게 했다.

월령안은 이기가 누구의 사람인지 몰랐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이 사람을 쓸 수 있다는 것만 알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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