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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11)화 (511/1,004)

511화 머리 박고 죽을 겁니다!

"낭자, 상황은 이러합니다."

이기는 말을 마치자 고개를 숙이고 눈매를 다소곳이 했다. 공손하고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 궁중의 여느 어린 내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이기를 더는 평범한 내관으로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이기를 한참 동안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이기는 긴장하고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마음속으로 짐작하면서도 감히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뒤 월령안은 시선을 거두었다. 이기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쉰 다음 어떻게 월령안의 의구심을 가라앉히고 몸을 뺄지 궁리했다. 이때 월령안이 간단명료하게 물어 왔다.

"너는 누구의 사람이냐?"

"낭, 낭자……."

이기는 할 말을 가득 준비했지만 이 한마디에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폐하의 사람?"

월령안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기는 털썩 무릎을 꿇고 말했다.

"낭자, 소인은……."

"조왕의 사람?"

월령안이 또 물었다. 이기가 미처 반응하기 전에 또 물었다.

"그럼 육장봉의 사람이냐?"

이기는 혀끝까지 밀려온 말을 끝내 내뱉을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가볍게 웃으며 장난하듯 말했다.

"다 아니야? 그럼 너는…… 염 황숙의 사람?"

이기는 말문이 막혔다.

'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요!'

이기는 울상이 되었다. 자신의 뺨을 치고 싶었다.

월령안은 냉담하게 눈길을 거두었다.

"됐다. 일어나거라. 가서 네 배후의 주인에게 전해라. 나는 은혜도 갚고 원수도 갚는다고. 궁중에 있는 동안 부탁한다고 전하거라."

소식이 빠른 이기는 입궁한 후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아직까지 이기에게서 나쁜 의도를 읽어내지 못했다. 설령 이기가 나쁜 마음을 가졌다고 해도 중요하지 않았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그녀는 곧 황궁에서 나갈 테니까.

나중에…….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연복궁 쪽을 바라보았다.

눈가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이기가 보내온 정보는 매우 유용했다.

월령안은 창가에 서서 창밖의 붉은 꽃과 푸른 버들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유감과 좌절이 가득 차 있었다.

그녀는 지금 깊은 궁중에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남에게 희망을 걸고 운명을 맡긴 채 남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런 느낌, 너무 끔찍하구나."

월령안은 가볍게 창틀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아 눈 속의 포악한 기운을 감추었다.

황궁은 마치 새장과도 같았다. 그녀를 이 좁은 공간에 꽁꽁 가두어 궁 밖의 세계도, 사람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이기와 같은 사람이 없으면 그녀는 궁전에서 귀머거리이자 맹인이 되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써야만 했다.

이기를 쓰지 않으면 누구를 쓰겠는가.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뒤돌아섰다. 눈에는 웃음을 띠고 있었고 일말의 불만도 찾아볼 수 없었다.

궁중에는 잡무가 매우 많았다. 월령안은 황후도, 비빈도 아니었다. 황제는 그녀에게 후궁 업무를 주관하여 후궁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도록 운영할 것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후궁의 모든 사무를 합리적으로 조절해 후궁에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기를 원했다.

월령안은 궁중에 믿을 사람이 없었다. 모든 일을 직접 하기에 이르지는 않지만 모든 일을 다 살펴보아야 하므로 낮에 남는 시간이라고는 없었다.

어제 그녀는 제멋대로 후궁 업무를 던져 버리고 자신의 감정을 발산했다. 그러다 보니 업무가 적지 않게 쌓이게 되었다. 오늘 반드시 전부 처리해야 했다. 그렇지 않고 내일까지 미루면 처리하기 더욱 힘들어진다.

점심 휴식 시간을 희생하고 나서야 월령안은 겨우 쌓인 공무를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옥죽에게 시켜 각 궁의 행수들에게 나누어 주고 처리하게 했다.

"네. 낭자."

옥죽은 두 손으로 건네받았지만 주저하며 물러가지 않았다. 할 말이 있는 듯하면서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무슨 일이 있나요?"

월령안이 물었다.

"낭자, 소인은……."

옥죽은 월령안 스스로 하사한 물건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챌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먼저 귀띔해 줘야 할지 몰라 계속 망설이고 있었다. 드디어 결심을 내리고 말하려는데 당황한 목소리에 중단되고 말았다.

"낭자, 청희 장공주가 유산했답니다. 말로는 낭자…… 낭자가 그녀의 아이를 해쳤다고 합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영취원에 계십니다. 낭자더러 당장 영취원으로 오시라고 합니다."

"청희 장공주가 유산했다고?"

월령안은 옥죽에게 잠시 뒤에 말하라고 눈치를 주고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가자. 가서 보자꾸나."

월령안은 청희 장공주가 영취원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궁궐을 장악했을 때 기회주의자들이 그녀에게 청희 장공주를 골탕 먹이지 않겠느냐고 물었었다.

그녀는 거절하면서 그 궁인을 따끔하게 일깨워 주었다.

하루아침에 득세하고 바로 날뛰면 그건 소인배 짓이다. 그녀는 군자가 아니지만 득세하자마자 제멋대로 구는 소인배가 될 생각도 없었다.

청희 장공주는 어찌되었건 황제 고모이며 황실 혈통이었다. 황제는 청희 장공주를 어찌 처리하든 상관없지만 일개 여 상인인 그녀가 황실 혈통을 모욕하는 것은 용인되지 않을 것이다.

이 시각 궁인이 청희 장공주가 '유산'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월령안은 하마터면 참 다행이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청희 장공주가 절대 유산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청희 장공주는 '유산'을 빌려서 그녀를 해코지하려고 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영취원에 손을 뻗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청희 장공주의 '유산'은 그녀가 한 짓이 아니라 해도 그녀가 한 짓이 될 것이다.

월령안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영취원에 가까이 가자 청희 장공주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제가 아무리 잘못이 많다고 한들 저 역시 황실의 공주이고 폐하의 친고모이며 폐하께서 직접 봉한 장공주입니다! 당당한 공주의 몸으로 일개 여 상인한테 수모를 당하다니요. 폐하께서는 선황, 황조부께 미안하지 않으십니까?"

청희 장공주는 울면서 소리쳤다.

"폐하, 월령안을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제 아이를 위해 월령안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할 것입니다!"

황제는 머리가 아팠지만 인내하면서 위로했다.

"황고모, 좀 냉정해지세요. 사실……."

"폐하, 내 아이를 위해 월령안의 목숨을 내놓지 않으면 전 종묘에서 머리 박고 죽을 겁니다. 폐하께서 친고모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부황께 보여 드릴 겁니다!"

청희 장공주는 더 이상 연약한 척하지 않았다. 가슴이 찢어지게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얼굴에 난 험상궂은 흉터까지 더해 어떻게 봐도 공포스럽기만 했다.

월령안은 들어서자 청희 장공주가 침대에 엎드려 죽기 살기로 황제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모습이 보였다. 황제는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이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월령안은 힐끗 바라보고 금방 눈길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원래대로 평온을 유지한 채 예를 올렸다.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장공주를 뵙습니다."

"월령안……!"

청희 장공주는 월령안을 보자마자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내년이 감히 내 자식의 목숨을 취해?!"

"장공주, 침착하세요."

월령안은 청희 장공주를 발로 차 던지고 싶은 충동을 꾹꾹 누르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때문에 청희 장공주는 헛손질을 하고 말았다.

탕!

청희 장공주가 땅바닥에 넘어졌다. 몸 아래에는 핏자국이 흥건하여 보건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청희 장공주는 몸을 돌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월령안을 잡으려 했다. 눈빛은 사납기만 했다.

"월령안 네 이년, 내 자식의 목숨을 내놔. 내 자식의 목숨을 내놔……."

"뭣들 하느냐. 어서 장공주 마마를 부축하지 못할까."

월령안이 날카롭게 호통치자 영취원의 궁인들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황제를 힐끗 바라보았다.

황제는 머리가 아파 이마를 짚으며 화가 나서 호통을 쳤다. 궁인은 그제야 앞으로 나아가 청희 장공주를 부축했다.

"월령안! 널 죽여 버릴 거야. 죽여서 내 자식의 목숨값을 받아 낼 거다."

청희 장공주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튼튼한 궁녀를 이길 수 없었다. 궁녀는 그녀를 강제로 침대에 눕혔다.

청희 장공주는 갑자기 발버둥을 멈췄다. 기운이 빠진 망가진 헝겊 인형처럼 무기력하게 애걸복걸했다.

"폐하…… 폐하께서 제 억울함을 풀어 주세요!"

청희 장공주의 슬픔은 연기하는 것 같지 않았다. 월령안 또한 믿었다. 청희 장공주는 정말로 그녀를 죽여 아들의 목숨값을 받아 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 핏덩이가 아닌 야율제의 목숨값일 것이다.

황제는 청희 장공주를 둬 마디 위로해 그녀가 더는 소리를 치지 못하게 했다. 그제야 비로소 월령안에게 말했다.

"월령안, 청희 장공주가 유산을 한 것은…… 네가 보낸 옷 때문이라고 한다. 무슨 할 말이 있느냐?"

"폐하께 알려드립니다. 저는 장공주께 옷을 한 번도 보낸 적 없습니다."

월령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심지어 무릎을 꿇고 사죄하지도 않았다.

황제는 꼬투리를 잡지 않고 구석에 무릎을 꿇은 어린 내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내관이 물건을 가져온 궁녀가 네 명령을 받아 여름 옷감과 이불을 영취원에 가져온 것이라 하였단다. 상의국에도 옷감과 이불을 가져간 기록이 있고 거기에는 네 도장이 찍혀 있다고 하는구나. 다른 할 말이 있느냐?"

황제의 말투에는 월령안이 아닌 청희 장공주에 대한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청희 장공주가 회임했던 아이는 낳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월령안이 아무리 어리석어도 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할 아이에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 사건은 두말할 것 없이 하나의 판이며 월령안을 겨냥하여 짠 판이었다.

상의국을 판에 끌어들이는 일을 청희 장공주는 절대 해낼 수 없었다. 후궁에서 누군가 청희 장공주와 손을 잡았을 것이다.

'월령안은 이렇게 후궁 업무를 관리한 것인가.

후궁의 사람들이 틈을 타서 청희 장공주와 연락이 닿게 하다니.'

황제는 불만이 가득한 눈길로 월령안을 노려보았다.

월령안은 황제가 왜 노려보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묵묵히 고개를 떨어뜨리고 변명하지 않았다.

"폐하, 장공주께서 지금 몸이 허약하니 먼저 쉬게 하십시오. 장공주를 유산하게 한 사람은 저에게 사흘 시간을 주시면 사흘 내에 폐하와 장공주께 꼭 해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녀는 후궁의 비빈이 아니지만 후궁에서는 황제야말로 모든 사람의 하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궁에서는 증거도,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황제의 태도였다. 황제가 누구의 편을 들기만 하면 잘못을 범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더욱이 그녀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었다.

월령안이 알고 있는 도리를 십수 년간 궁정 싸움의 승리자였던 청희 장공주가 모를 리 없었다. 청희 장공주는 황제가 이미 그녀를 싫어하고 있으며 절대 그녀의 편을 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청희 장공주도 더 이상 여린 척하지 않고 아예 체면 불고 하고 협박했다.

"폐하, 오늘 월령안을 죽여서 제 자식 목숨값을 받아 내지 못하면 전 태묘(太廟)에서 머리 박고 죽을 겁니다! 이 천박한 여 상인이 황실 공주를 어찌 욕보이는지 모두에게 보여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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