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화 다친 맹수도 역시 맹수지
대전 입구에 있던 관리들은 너도나도 물러나 허리를 굽혀 배웅했다.
“대장군, 편히 가십시오.”
수척하지만 준수하고 빼어난 최일은 한가운데 서서 육장봉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걱정스러움이 서려 있었다.
그가 육장봉의 몸에서 용연향(龍涎香 - 향유고래에서 채취하는 향료)을 맡았다. 냄새가 강하지 않았지만 이는 육장봉의 풍격이 아니었다.
육장봉의 몸에서는 늘 맑고 차가운 대나무 향이 은은하게 났다.
‘갑자기 용연향이 나는 것은 약 냄새를 가리기 위해서일까?’
최일은 고개를 돌려 육장봉에 의해 움푹 패고 깨진 벽돌을 흘끔 바라보고 속으로 탄식하고 말았다.
육장봉은 여태까지 불필요한 행동으로 자신의 실력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보아하니 육장봉의 부상이 가볍지 않은 것 같군.’
그렇게 생각했으나 얼마 안 되어 최일은 마음속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육장봉은 모든 이 앞에서 제 소경과 위 시랑을 데리고 갔다. 대신들이 정신 차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 금군에 명령하여 대리시와 형부로 가서 월령안이 적과 내통했다는 사건의 모든 공문서와 증거, 증인을 모두 찾아내어 추밀원으로 보냈다.
형부 상서와 장 부승상이 황궁에서 나가기도 전에 금군은 모든 증거물을 추밀원에 보냈다. 형부 상서와 장 부승상은 미처 정신을 차릴 시간이 없었다.
최일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부상을 입은 맹수라도 역시 맹수지.”
이 한방으로 형부와 대리시는 한참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최일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황궁에서 나가자마자 순천부로 달려갔다.
그의 손에는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월령안을 위해 요언(妖言)을 해명하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았다. 관아가 나서 몇 부의 공시를 붙여 백성들에게 비무에서 주나라가 북요에게 크게 승리해 국위를 선양했다는 걸 알리면 되었다. 그리고 사람을 세간에 보내 육장봉의 용감한 사적에 대해 이야기하면 되었다.
북요인들이 비무에서 대패하고 화가 나서 고의로 육장봉의 전처가 적과 내통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육장봉에게 먹칠하려 했다는 것도 함께 말하면 되었다. 그러면 누구도 월령안이 적과 내통하고 나라를 배신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북요는 주나라의 원수이고 육장봉은 주나라 백성들 마음속의 신이었다. 육장봉이라는 패를 꺼내면 백성들은 자연히 월령안을 믿을 것이다.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예부 시랑이 월령안이 살수를 사 사람을 해쳤다고 고발한 일이었다.
이 일은 칠 년 전 구리파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다.
이 사건을 파헤치면 월령안은 소용돌이에 말릴 것이다. 설령 그녀가 피해자라고 해도 세상의 온갖 욕설과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
세상은 여자들에게 각박했다.
이는 육장봉이 위험을 무릅쓰고 암암리에 손을 쓰더라도 구리파 사건을 다시 파헤쳐 재심리하지 않은 원인이기도 했다.
최일은 구리파 사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또 그 이 년간 변경에서 갑자기 횡사했던 여자애들도 조사해 보았다. 그 여자애들은 가족에 의해 팔린 게 아니면 부잣집 도련님 저택의 시녀들이었다.
설사 그 여자애들이 모두 구리파 지하 투수장에서 죽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해도 그 부잣집 도련님들은 목숨을 잃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참가했던 이들의 명성에 손상이 갈 뿐이었다.
세상은 남자에게 항상 너그러웠다. 그들이 앞에 나서서 그때는 어려서 무지하고 속아 들어갔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살았다고 말한 다음 공부하는 척, 노력하는 척만 하면 사람들은 또다시 '탕아가 바른 길에 들어섰다'고 칭찬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사건에서 월령안을 깔끔하게 제외시킬 수 있을까?”
최일은 탁자 위의 공문서를 바라보며 깊은 사색에 잠겼다.
하지만 미처 적절한 대응방법을 생각하기도 전에 영녕후가 자신의 아들과 하인을 묶어서 데리고 입궁하여 죄를 청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최일은 금세 얼굴빛이 바뀌었다.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차를 준비하거라!”
최일은 곧장 추밀원으로 가서 육장봉을 만났다.
육장봉은 최일을 보자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리라고 짐작했어.”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시나요?”
최일은 어두운 표정으로 육장봉 앞에 앉았다.
육장봉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영녕후의 이 수는 정말 묘하다. 진짜든 가짜든 폐하께서는 그를 믿어 줄 수밖에 없어. 또한 큰 상을 내리며 위로해야 할 거네.”
“영녕후 이 사람은…… 참 영리하군요! 고종, 선황 두 분께 모두 중용될 만하네요. 다른 후부에서는 모두 병권을 내놓아도 영녕후는 여전히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죠.”
최일은 저도 모르게 탄식하다가 곧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영녕후는 사실을 전부 청주에 떠넘긴 다음 기어코 월령안을 끌어들이려는 겁니까?”
육장봉은 피곤한 듯 미간을 주물렀다.
“영녕후의 차남은 그가 정성 들여 배양한 후계자였어. 후계자가 불구가 되었지만 황제 앞에서 감히 조계안에 대해 원망할 수 없잖아. 하지만 월령안은 가만둘 수 없지.”
조계안이 거론되는 건 황제뿐만 아니라 영녕후 등도 모두 손을 써서 그 도련님들을 불구로 만든 사람이 조계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 덤터기를 조계안은 벗어 버릴 수가 없었다.
영녕후는 황제 앞에서 제 집 아들이 칠 년 전에 구리파에서 했던 황당한 일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낱낱이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영녕후는 자기 아들이 살수를 사 월령안을 죽이려 했던 사실도 시인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청주 첩자들의 이간질과 부추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영녕후에게 끌려온 그 하인이 바로 청주에서 그의 아들 곁에 심어 둔 첩자였다. 그자는 아들이 불구가 되어 비통해하고 있는 틈을 타서 아들을 부추겨 살수를 사 월령안을 죽이게 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영녕후는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어젯밤 청주의 첩자가 그를 찾아와 그의 아들이 살수를 사 월령안을 죽이려다가 청주의 간섭 하에 조왕을 암살하게 된 사실을 알렸고, 그를 빌미로 그에게 앞으로 청주를 위해 일하라고 협박했다.
영녕후는 황제와 조정에 충성하기에 당연히 청주의 위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에 자신의 아들과 청주의 첩자를 묶어서 데리고 입궁하여 황제에게 죄를 청했다.
영녕후가 진심이든 거짓이든, 청주와 왕래를 했든 안 했든, 첩자를 묶어 황제 앞에 끌고 와서 결백을 증명했다. 황제는 그를 믿고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영녕후가 완전히 청주로 넘어가 조정과 등진다면 조정의 대신들이 실망할 것이 뻔했다.
“서른여 명이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부모 형제들은 모두 조계안이 손쓴 거로 알고 있습니다. 청주 사람들이 영녕후 한 사람만 포섭한 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영녕후가 가장 멋지게 처리했네요. 물론 이익도 가장 많이 챙기겠죠. 형세를 잘 이용하는 건 영녕후를 이길 사람이 없군요.”
영녕후가 난각에서 나가자마자 연복궁에 있던 노인은 소식을 받았다.
노인은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늙은 여우는 역시 늙은 여우라니까.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살길을 찾아내지. 사람을 보내 령안에게 귀띔하라고 해. 괜히 아무 경계도 안 하다가 영녕후에게 적반하장으로 당하지 않게.”
영녕후가 이렇게 난리를 피운 바람에 그가 청주로 넘어갔다는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하는 한, 영녕후부는 계속 잘나갈 수 있었다.
황제는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고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영녕후를 우대해 줄 것이다.
“육장봉, 육장봉…… 손을 쓰면서 누군가 도로 한 방 먹이리라는 것은 생각이나 했느냐?”
노인은 황궁 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부잣집 도련님들을 처리하는 일에서 육장봉은 참으로 멋지게 해냈다.
그들을 벌하는 동시에 조계안에게 죄를 씌워 황제와 진왕, 영녕후 등 사이가 벌어지게 했다. 그들은 서로 경계하고 더는 서로 신임할 수 없을 것이다.
황제의 가장 큰 약점은 조계안이었다. 황제는 이 일이 조계안이 한 짓이라고 믿고 있기에 그를 위해서라도 그 사람들을 중용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이 조계안에게 앙심을 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천천히 그 사람들을 척결할 것이다.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죽임으로써 사람을 죽이고도 피 한 방울 안 보인다.
하룻밤 사이에 육장봉이 한 건 그 정도로 완벽하여 거의 흠잡을 데 없다고 말할 수 있었다. 설사 그가 손을 쓴다고 해도 더 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녕후라는 변수가 생겼다.
영녕후는 이번 수로 수동에서 능동으로 태세 전환을 했다. 대단한 한 수였다.
앞으로 영녕후를 따라하여 능동적으로 죄를 청해 결백을 증명할 사람은 또 있을 것이다.
* * *
월령안은 어젯밤 한바탕 대성통곡하다가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다. 오늘 일어나서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보니 오늘 입은 옷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후궁 업무 처리를 마치자 움직이기 싫었다. 손으로 머리를 지탱하고 안락의자에 앉아 휴식했다.
한 내관이 살금살금 걸어 들어왔다. 좌우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들을 물리친 후, 월령안 쪽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낭자!”
월령안은 나른하게 눈을 뜨고 온 이를 확인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온 이는 이전에 가장 먼저 월령안에게 순종했던 내관 이기였다.
이기는 허리를 굽히고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 소인 방금 소식을 들었어요. 영녕후께서 차남과 저택의 하인을 묶은 후 데리고 입궁하여 폐하께 죄를 청했다고 합니다. 이 일에 낭자도 연루된 것 같다고 합니다.”
“입궁해서 죄를 청한다고?”
월령안은 여전히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었다. 해이하면서도 무심해 보였다.
“오늘 조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이기는 부랴부랴 알아본 소식을 월령안에게 일일이 보고했다.
“폐하께서 성지를 내려 황후를 폐위시켰습니다. 또 성지를 내려 염 황숙을 친왕으로 봉하고 황성사를 통솔하게 했습니다. 형부 시랑…….”
“염 황숙?”
월령안은 순간 바로 앉았다. 피곤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염 황숙, 그분은 조회에 참가하셨느냐?”
“낭자, 염 황숙은 선황 때부터 조회에 참가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기는 비록 젊지만 궁중의 소식은 적지 않게 알고 있었다.
“만약 염 황숙을 한번 만나 뵈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월령안은 노인이 자기를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말의 희망이 있어도 쟁취해 보고 싶었다.
“글쎄요……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염 황숙은 한 번도 사람들 앞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염 황숙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감히 만나기를 청하는 사람도 없었고요.’
월령안은 탄식하고 말았다. 말할 수 없는 실망감이 밀려왔고 좀 들었던 기운이 쏙 빠지는 것 같았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방금 형부 시랑이 어쨌다고 했어?”
“낭자께 알려드립니다. 형부 시랑은 대전에서 낭자가 적과 내통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이기는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대전에서 발생한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월령안에게 들려주었다. 육장봉이 화를 내면서 대전의 벽돌을 밟아 깨뜨린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이기는 더없이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월령안은 그 이야기를 듣자 왠지 마음이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