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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05)화 (505/1,004)

505화 태의서로 가자!

연복궁 내, 월령안이 떠나가자 회색 옷을 입은 하인 서씨가 바퀴 의자에 앉은 노인을 밀고 편전으로 돌아왔다.

편전에는 아직도 월령안의 은은한 향기가 남아 있었다.

노인은 서씨의 도움을 거절하고 월령안이 좀 전까지 앉아 있던 의자 앞으로 바퀴 의자를 움직여 다가갔다. 아무도 없는 빈 의자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회색 옷의 하인은 묵묵히 다가갔다. 그는 노인 뒤에 서 있다가 한참 뒤에 말했다.

“주인님, 이렇게나 아쉬우시면서 왜 월 낭자와 만나지 않으시는 겁니까? 월 낭자와 작별 인사라도 제대로 나누시지요.”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보는 거야.”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모두 탐욕스럽다. 한 번 만나보면 두 번, 세 번. 계속 얼굴이 보고 싶어질 거야. 희망이 있으면 또 요구할 거고. 더 이상 희망을 주어서는 안 돼.”

“월 낭자가 너무 슬퍼했습니다. 영복궁으로 가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새어 나오는 빛도 없었습니다.”

회색 옷의 하인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주인은 월 낭자를 십 년 지켰고, 그는 주인을 십 년 지켰다.

그의 주인이 나타나기 전 어린 월 낭자는 그녀의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그리워했다. 그녀는 마음이 괴로웠지만 하소연할 사람을 찾지 못해 지금처럼 이불 속에 웅크리고 소리 없이 울었었다.

“지금 슬퍼하는 게 훗날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노인도 아쉽지만 포기해야만 했다.

“전임 암황이었던 내가 갑자기 사라졌다. 암부의 공개적인 세력을 제외하고 나는 조계안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어. 그들 모두 내 수중의 그것들을 지켜보고 있어. 지금 나는 령안이를 만나서는 안 돼. 령안이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폐하는 본래부터 령안이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어. 만약 내가 령안이와 만나면 설령 내가 령안에게 아무것도 남겨 주지 않았다 해도 그들은 의심할 거야.

령안이는 영리하니 내 표면적인 신분은 짐작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령안이도 숨은 신분은 알아맞힐 수가 없을 거야. 오직 령안이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와 전혀 접촉하지 않아야 온전히 몸을 뺄 수가 있어. 황제와 조계안에게 평생 감시당하지 않고 말이야.”

노인은 눈을 감은 채 소리 없이 탄식했다.

“난 늙었어. 걔를 더 보호할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런 것밖에 없구나.”

그도 어찌 자신의 꼬마 령안이 슬퍼하는 것이 안타깝지 않겠는가.

노인은 그렇게 말하고는 월령안이 떠난 자리를 오래도록 바라봤다.

* * *

이반반은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태의서를 나와 난각으로 달려가서 황제에게 용서를 빌었다.

이반반은 감히 숨기지 못하고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낱낱이 보고했다. 월령안에게 암시하여 연복궁으로 가서 돌아보라고 말한 일까지도 모두 말했다.

다 듣고 난 황제는 화가 나서 한참 동안 말문이 막혔다. 곧 탁자 위에 있던 문진을 이반반에게 내던졌다.

“짐은 네가 내 곁에 오랫동안 있었으니 적정선을 지킬 줄 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황숙을 떠보는 일이 네가 할 수 있는 짓이더냐!”

이반반은 감히 피하지 못했다. 문진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도 아프다는 소리 한마디 못하고 피가 흐르는 머리를 끊임없이 조아렸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폐하.”

“넌 정말 죽을 죄를 지었다. 네 잔머리로 황숙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장봉도 속이지 못했는데 황숙이 모를 리가 있겠느냐?”

황제는 화가 치밀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반반이 월령안에게 영패를 주고 그녀더러 연복궁으로 황숙을 찾아가라고 암시한 것은 그를 위한 것이기에 이반반을 어찌 처리할 방법이 없었다.

“폐하, 월령안에게 영패를 주고 연복궁에 가라고 암시한 것은 저의 뜻입니다. 폐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이반반은 더는 머리를 조아리지 않고 황제 앞에 꿇어앉아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넌 짐의 사람이다. 네가 한 일은 곧 짐의 뜻을 의미한다. 황숙은 짐이 사전에 알았는지 몰랐는지를 상관하지 않을 거야.”

황제는 이반반의 비참한 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됐다. 넌 먼저 내려가서 상처를 치료하거라. 수습을 하고 짐을 따라 연복궁에 가서 황숙에게 죄를 청하거라.”

자신의 노복이 저지른 일이고 그를 위해서 한 일이다. 그가 뒤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반반은 변명하려고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전에 월령안에게 연복궁의 일을 언급했던 건 분명 월령안을 유인하여 연복궁으로 몰래 가서 황숙을 만나보게 하고, 황숙이 몰래 월령안을 만나는지 떠보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가 그리 아둔하지 않았다. 궁중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월령안이 연복궁으로 간 것도 비밀이 아니고 황숙이 월령안을 만나 주지 않을 건 뻔한 일이었다.

그때는 잠깐 생각이 짧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믿는다 해도 또 어쩌랴?

그가 만약 황숙을 떠보려는 마음이 없었다면 월령안에게 연복궁의 일을 누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게 그의 탓이었다. 그가 황제의 심복으로 오래 있으니 황궁에서 황제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한테 불만이 있거나 그에게 당해도 참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그는 잊고 말았다. 황숙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이반반은 감히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묵묵히 내려가서 상처를 처리한 다음 복명했다.

황제는 이반반을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이반반이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이반반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한쪽에 서서 기다렸다.

황제는 사람을 보내 궁문 입구에서 지켜보게 했다. 월령안이 돌아오자마자 황제는 이반반을 데리고 연복궁으로 찾아가 죄를 청했다. 하지만 노인을 만나지도 못했다.

연복궁의 내관은 염 황숙의 병이 재발하여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고 했다.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이반반을 궁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다시 노인을 문안하겠다고 했다.

황제는 결국 황제이므로 노인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황제를 만나 보았다.

노인이 병이 재발했다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월령안이 떠난 후 노인은 편전에 오래도록 홀로 앉아 있었다. 월령안이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노인은 워낙 병이 위중했다. 마음이 무거워지자 몸도 같이 편치 못했다. 몸이 축 처지고 기운이 없어 시중드는 사람도 놀라고 말았다. 당장 사람을 보내 손 신의를 불렀다.

태의서는 거리가 멀어 연복궁에서 태의서로 한번 다녀오려면 반 시진이 넘게 걸렸다. 아직 손불사는 도착하지 않았다.

“황숙……!”

황제는 편전의 침실에 들어섰다. 침대에 기대어 두 눈을 지그시 감은, 병색이 완연한 노인을 보자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황숙, 짐은…… 황숙을 믿지 않은 게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황숙은 눈을 떴다. 눈동자는 어둡고 침침하며 일말의 감정도 없었다.

그의 목소리는 서늘하고 냉담하여 조금의 감정 색채도 없었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몰래 안도의 숨을 쉬었다.

‘어쨌든 황숙은 나를 믿어 줬어.’

하지만 황제가 미처 다 기뻐하기도 전에 노인은 냉담하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다만 제가 빨리 죽기를 원하실 뿐이시죠.”

황제는 정말로 이반반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정말 이반반이 정말로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했다면 이반반을 데리고 와서 사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죽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심지어 직접 이반반을 데리고 와서 사죄했다. 이는 이반반에게 죄를 묻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것이었다.

죽어가는 그를 황제는 안중에 둘 필요가 없었다.

황제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급급히 변명했다.

“황숙, 짐은 그렇게 생각한 적 없습니다! 오후에 일은 모두 이반반이 자기 생각대로 저지른 일입니다. 짐은 정말로 몰랐습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령안이를 위해서라도 저는 그 애에게 어떤 세력도 남겨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넌지시 떠볼 필요가 전혀 없단 말입니다.”

노인은 황제의 말을 신경 쓰지 않고 냉담한 표정으로 내쫓았다.

“폐하께서 다른 용건이 있으십니까? 일이 없으면 돌아가십시오. 저는 병중이어서 폐하와 더 얘기하기가 힘에 부칩니다.”

황제는 얼굴의 혈색이 채 회복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일어서서 노인에게 예를 올렸다.

“황숙, 믿으시든지 안 믿으시든지 짐은 월령안으로 황숙을 떠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황숙을 의심한 적도 없고요. 짐은 황숙께서 월령안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압니다.

황숙께서 얘기하신 것처럼 월령안을 위해서라도 황숙은 그녀에게 아무 세력도 남겨 주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 월령안을 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나고 싶으면 수시로 만나셔도 됩니다. 짐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겁니다.”

노인은 눈을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노인이 대답하지 않자 황제는 실망했다. 하지만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한마디 당부하고는 묵묵히 자리를 떴다.

나갈 때 마침 급히 달려오는 손불사를 만났다. 황제는 노인의 병세를 묻고 싶었지만 노인이 오해할까 두려워 끝내는 물어보지 않았다.

황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궁전으로 돌아갔다. 마음속으로 말할 수 없는 초조감이 밀려왔다.

그는 힘들게 황숙의 거리감과 경계심을 다소 완화시켰다. 그런데 이반반의 실수로 황숙과의 사이에 다시 틈이 생겼다.

앞으로 황숙이 그를 믿고 수중의 세력을 하나도 남김없이 조계안에게 맡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황숙의 전폭적인 지지와 인정 없이는 황숙의 수족들을 가진다 해도 조계안은 짧은 시간 내에 그들의 믿음과 충성심을 얻을 수 없었다.

황제는 화가 나서 가슴이 답답했다. 이 사건의 장본인을 떠올리자 이를 악물며 명령했다.

“가자…… 태의서로 가자!”

용연(龍輦 - 임금이 타는 가마)은 곧바로 태의서로 향했다.

황제가 이처럼 요란스럽게 태의서로 가자 모든 사람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날 밤 소문이 퍼지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태의서에 간 황제의 의도를 추측했다.

누군가는 육장봉이 부상했다는 소문과 연계 지었다. 황제가 태의서에 가서 부상당한 육장봉을 문안한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결국 하룻밤 사이 육장봉이 중상을 입고 태의서에 숨어 상처를 치료한다는 소문이 순식간에 변경에서 퍼졌다. 소식이 빠른 이는 모두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계안이 피 냄새를 안고서 황성사를 나서자마자 부하가 와서 보고했다. 변경에서 암암리에 육장봉이 중상을 입고 태의서에서 휴양 중이라는 소문이 전해지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마치 직접 본 듯이 생동감 있게 전해진다고 했다.

부하의 보고를 들은 조계안은 입궁해 황제를 치고 싶을 만큼 화가 났다.

‘하나같이 무슨 짓이야. 내가 하루에 두 시진을 자는 것도 많이 잔다고 생각하는 건가?’

조계안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라 황궁에 돌아왔다. 황제가 난각에 있다는 말에 내관의 통보를 기다리지도 않고 난각의 문을 걷어차고 오만방자하게 들어섰다.

“전하!”

조계안을 쫓아가 난각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던 금군은 난처해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조계안은 발로 문을 차고도 모자라 난각에 들어가 탁자를 차 엎었다. 온몸으로 화가 나 있음을 드러내었다.

황제는 탄식하며 손에 든 상주서를 내려놓고 입구의 금군과 내관에게 손을 저었다.

“됐다. 너희들은 물러가거라.”

사람을 내보내고 나서야 황제는 조계안을 바라보았다.

“또 무슨 일이냐?”

“용연에 앉아 태의서에 가시다니. 황형은 아주 흥이 나는 모양이군요.”

조계안은 한쪽에 앉아 엎어진 탁자 위에 발을 올려놓았다. 오만방자하기 그지없었다.

황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식이 샌 것이냐?”

“황형께서 얘기해 보세요. 태의서에 그렇게 많은 어의가 있고 그들은 매일 집에 돌아갑니다. 황형이 용연에 앉아 태의서에 갔는데 이렇게 큰일을 숨길 수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지금은 궁문의 봉쇄가 풀린 때였다. 설령 궁문을 봉쇄해도 이런 소식은 전해지기 마련이었다.

황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황제에게 충성할 수는 없었다. 이 안에는 종종 남의 눈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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