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화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이반반, 이거 다 바꿔야 합니까? 방금 가져온 이 장신구, 옷감은 어젯밤에 보내온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월 낭자의 눈썰미가 얼마나 밝은데요. 먹는 것이나 입는 것, 쓰는 것 그리고 진열품까지도 좋은지 나쁜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 저희가 아무리 몰래 바꾸어도 월 낭자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옥죽은 이반반이 방금 들여온 상자를 가리키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신경 쓸 것 없어. 바꿔 주기만 하게.”
이반반은 차가운 표정으로 경고 어린 눈길로 옥죽을 바라보았다.
옥죽은 무서워 흠칫 떨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손발을 재게 놀려 재빨리 정리했다.
반 시진 정도 지나 양쪽 상자의 물건을 모두 바꾸어 놓았다.
이반반은 한 번 둘러보고 빈틈이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 하사한 물건이 가득 담긴 상자를 들고 영복궁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자화자찬이 아니라, 이번 일은 정말 너무 멋지게 처리했어. 대장군의 요구를 완벽하게 맞춘 것도 모자라 폐하의 체면을 살려 주었지. 폐하께서 하사하신 물건이 남한테 빈축을 샀다는 일은 누구도 모를 거야.’
어화원을 나서자 이반반은 곧 육장봉에게 보고했다.
“대장군, 일이 다 처리되었습니다. 월 낭자는 지금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이후는 약속할 수 없죠.’
“좋았어. 고마워, 이반반.”
육장봉은 칭찬에 전혀 인색하지 않았다.
월령안 몰래 그가 가져온 옷과 장신구를 어젯밤에 하사한 물건과 바꿔 치기를 하다니. 이 일은 오직 이반반이 할 수 있었다. 그를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다.
이반반은 이 말을 듣자마자 좀 전 그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대장군은 먼저 일을 저지르고 월령안에게 거절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정말 뻔뻔해!’
이반반은 속으로 음흉하다고 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공손하게 말했다.
“대장군, 바꿔 치기 한 하사한 물건을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대장군께서 알려 주십시오.”
대장군이 음험할수록 그는 더욱더 공경해야 했다. 방법이 없었다. 상대하기 어려우면 대장군을 조상님처럼 모시는 수밖에 없었다.
육장봉은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이반반, 월령안이 만약 돈을 내고 쓰지도 않는 물건들을 샀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 같은가?”
“월 낭자라면 당연히…….”
이반반은 반쯤 말하다가 번쩍 정신이 들었다.
“대장군, 이것은 하사품입니다. 파시면 안 됩니다.”
이반반은 울고 싶었다.
‘그렇게 많은 좋은 물건을 쉽게 내놓는 걸 보니 돈이 모자라는 것 같지도 않구먼.’
“팔지 않으면. 남겨서 어화원의 늪을 메울까?”
육장봉은 대수롭지 않게 이반반을 힐끗 흘겨보았다.
“팔지 못한다고? 나도 돈을 내고 산 건데.”
“이건…….”
이반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졌소이다.’
이반반은 탄식하고 말았다.
“대장군, 이건 소관이 혼자 결정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 물어보고 오게 허락해 주십시오.”
"가 보게."
육장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이반반을 놓아 주었다.
이반반은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미처 숨을 다 내쉬기도 전에 육 대장군이 말했다.
“황숙은 월령안을 만나지 않을 거야. 월령안이 돌아오면 당신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게 될 거고.”
“대, 대장군……!”
이반반은 숨을 반쯤 내쉬다가 멈추고 깜짝 놀라며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대장군은 어떻게 내가 어떤 방법으로 월령안을 따돌린 것을 알지?’
“뭐 그렇게 놀랄 거 있어. 월령안은 늘 조심스러웠어. 궁내에서는 더 조심할 뿐 쉽게 누구도 믿지 않을 거야. 그녀가 경계심을 풀고 당신의 이상한 행동을 유념하지 않게 할 사람은 황숙뿐이야.”
육장봉은 염 황숙을 질투하고 부러워한다는 사실을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의 마음속에서 염 황숙은 영원히 일순위였다. 누구도 대체할 수 없었다.
이전의 그도 대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의 그는 더더욱 안 되었다.
“대장군, 소인은 대장군을 위해 일한 겁니다.”
‘위험에 빠진 저를 나몰라라 하시면 안 되죠!’
“걱정하지 마시게. 나는 내 사람을 푸대접하지 않네.”
육장봉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수중의 비단 주머니를 이반반에게 던져 주며 말했다.
“이 호각을 그녀에게 주시오. 연복궁에 사는 염 황숙이 어화원 늪에서 이 호각을 주워 나를 주었다고 말해 주시오.”
이반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또 대장군에게 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또 대장군에게 당했어!’
이반반은 대장군에게 연이어 당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또 대장군에게 감사를 드려야 했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참담한 사람이 있나?
있지!
대장군에게 점찍힌 월령안이 있잖아!’
이반반은 이렇게 생각하자 순간적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육장봉에게 다소 진심을 담아 감사를 표했다.
“대장군, 감사합니다. 소인은 대장군께서 몸조리하는 데 폐를 끼치지 않겠습니다.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이반반은 태의서를 나와 비단 주머니를 들고 난각으로 달려갔다.
그는 자신이 황제의 노복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월령안을 연복궁으로 유인해 보낸 일을 황제에게 숨기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숨겨서도 안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월령안이 돌아오기 전에 먼저 황제께 이 일을 보고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서 염 황숙이 그보다 먼저 찾아오면 그는 변명할 기회조차 없게 된다.
염 황숙의 잔인함을 떠올리자 이반반은 걸음아 날 살려라 달려갔다.
이반반이 난각으로 달려갈 때 월령안은 이미 연복궁을 한 바퀴 돌았다. 하지만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만약 아무것도 얻은 게 없다면 괜찮았다. 하필이면 연복궁에서 익숙한 약 냄새를 맡게 되었다.
그녀는 노인이 연복궁에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녀가 오기 전까지도 여기에 있었다.
그녀는 연복궁에서 노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녀가 때를 잘못 맞춰 찾아온 것이 아니라 노인이 그녀를 만나 주지 않는 것이다.
노인이 그녀를 만나려 하지 않으면 그녀가 노인을 찾으면 되었다.
월령안은 체념하지 않고 열심히 연복궁을 샅샅이 뒤졌다. 사람이 숨을 수 있는 곳은 하나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조그마한 흔적도 거의 남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흔적은 편전에서 나는 익숙한 약 향기뿐이었다.
월령안은 연복궁을 한번 다 뒤졌지만 찾지 못하자 다시 편전으로 돌아왔다.
편전은 텅 비어 있었다. 탁자와 의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사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편전에 서서 희미하지만 익숙한 약 냄새를 맡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입술을 꼭 깨물어서야 울음을 터트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약 냄새가 옅어지는 것을 보니 노인은 여기에 없는 것이 분명했다.
월령안은 눈을 감고, 눈 속의 실망감과 무력감을 감추었다.
“십 년이에요! 영감님, 정말 독하군요. 가서면서도 어찌 작별 인사도 없이 그냥 가세요! 제가 울고 불고 가지 말라고 매달릴까 봐 그러세요?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할까 봐요? 영감님이 저를 가르쳤어요. 영감님은 자신에 대해 신심이 없는 건가요?
저는 줄곧 알고 있었어요. 제가 저만의 인생, 책임, 사명이 있는 것처럼 영감님도 영감님의 인생, 책임, 사명이 있을 거예요. 우리는 모두 독립적인 인간이에요. 모두 자신이 걸어야 할 인생 길이 따로 있죠.
한 번도 영감님이 오직 저 하나만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한 번도 영감님이 다시는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영원히 저와 함께할 거라고, 그런 건 꿈도 꾸지 않았어요.
당신이 떠나든, 돌아가든 저한테 한마디라도 할 수 없나요? 저에게 작별 인사라도 할 수 있게 하면 안 되나요? 정말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나요? 꼭 이렇게 깔끔하게 정을 떼야 하나요?
영감님, 정말 잔인하네요! 제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뻔히 알면서도, 제가 유감을 남기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을 알면서도 기어코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는군요. 다시는 영감님을 보지 못하면, 다시는 영감님의 소식을 듣지 못하면 제가 영감님이 살아 있다고 여길 것 같나요? 저는 그럴 수 없어요!"
저는 자기 기만하는 가상에 갇힌 적이 없어요. 영감님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는 제가 훨씬 더 잘 알아요. 저한테 말하지 않고, 저한테 소식을 알려주지 않으면 전 더 고통스러울 뿐이에요. 저도 모르게 허튼 생각만 하게 된다고요. 알겠어요?”
월령안은 아무도 없는 편전에서 눈물범벅이 되어 노인의 잔인함을 하소연했다. 노인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약해져서 밖에 나와 그녀를 만나 주기를 바랐다.
“나쁜 영감님, 영감님의 심장은 도대체 뭐로 만들어졌어요?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 나와서 절 좀 만나 주면 안 되나요? 제가 황궁을 떠나면 영감님이 절 보고 싶어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돼요! 정 이러시면 청주에 간 뒤 다시는 변경으로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영감님이 다시는 저를 보지 못하게 할 거예요.”
그녀는 노인이 편전에 없어서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노인은 틀림없이 전해 들을 것이다.
노인 옆에는 항상 고수가 있었다.
노인은 그녀가 연복궁에 도착하기 한발 앞서 떠나가 그녀를 헛걸음하게 했다.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이 그녀를 만나 주려 하지 않는 한, 바로 지척에 있어도 그녀를 피할 수 있었다. 유일한 방법은 노인이 자발적으로 그녀를 만나 주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녀는 연복궁에서 두 시진을 꼬박 기다렸다. 해 질 녘이 되어 연복궁의 내관이 찾아와 돌아가기를 재촉할 때까지 그녀는 노인을 찾지 못했다.
문밖의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월령안은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음이 괴로웠다.
육장봉이 대승하여 돌아오던 그날, 잔뜩 기대하면서 육장봉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다가 이혼장을 받았을 때보다 더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육장봉에게 시집가서 지내던 삼 년 동안 그는 그녀에게 희망을 준 적이 없었다. 비록 육장봉과 만나기를 기대했지만 마음속으로는 그가 자기를 싫어하고 좋은 얼굴빛도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만나 주지도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날 육비우가 그녀의 얼굴에 이혼장을 내던졌을 때도 비록 가슴은 아파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인은 달랐다.
노인은 결코 그녀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노인이 모든 것을 그녀의 뜻에 따라 주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녀를 더없이 총애했다.
무슨 일이든 그녀가 입을 열기만 하면, 그녀가 부탁하기만 하면 노인은 모두 그녀의 뜻대로 해 주었다.
그녀는 이렇게까지 울면서 하소연했는데 노인이 그녀를 만나 주지 않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노인은 그녀에게 손톱만 한 희망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정말 다시는 노인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서 아저씨가 와서 노인이 돌아갔다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고 말했을 때도 괴로웠지만 그래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노인은 이제껏 그녀가 상심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무시하지 못했다.
노인이 입으로는 만나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녀가 울면서 애원하면 만나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틀렸다.
그녀는 노인의 결심을 잘못 짐작했다.
그녀는 지금처럼 확실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노인은 그녀를 만나 주지 않을 것이고 그녀에게 희망을 주지 않을 것이며 죽을 때까지 그녀를 만나 주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 월령안은 이미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심지어 자신이 어떻게 연복궁에서 나와 영복궁으로 돌아갔는지조차도 몰랐다.
영복궁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방 안에 숨어 몸을 웅크리고 침대에 누운 채 이불을 두르고 소리 없이 흐느꼈다.
앞으로 그녀가 울고 싶을 때 이제 더는 의지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지금처럼 이불 속에서 웅크리고 소리 없이 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