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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503)화 (503/1,004)

503화 정말 나를 곤란하게 하시는군

월령안은 후궁, 그것도 태비의 거처에 머물고 있었다. 육장봉이 아무리 남의 생각을 개의치 않는다고 해도 이 정도 선은 지켜야 했다.

게다가 어떤 일은 이반반이 나서면 그보다 훨씬 편리할 것이다.

육장봉은 이반반을 어화원 밖으로 데리고 갔다. 그 밖에 쌓아 놓은 나무상자 수십 개를 가리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반반, 이 물건들을 영복궁으로 보내 어제 저녁에 황제가 월령안에게 내린 상을 바꿔 치기 하게나. 그리고 기억하게. 월령안이 이 물건들이 내가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서는 안 되네. 한마디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고. 알겠는가?”

“대장군,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반반은 깜짝 놀라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더듬거리며 말했다.

“대장군, 궁 밖에 있는 물건을 궁에 가져오면 검문해야 합니다. 폐하가 월 낭자에게 하사한 물건은 모두 기록…….”

육장봉의 불만을 알아차린 이반반은 재빨리 멈추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소인이 어떻게 월 낭자에게 말하겠습니까? 월 낭자는 속이기 쉽지 않습니다.”

“그건 당신의 일이다.”

‘월령안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알았다면 이반반을 부를 필요도 없었겠지.’

“대장군……!”

이반반은 거의 눈물을 흘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육장봉을 애처롭게 바라보면서 그가 명령을 거두어들이기를 바랐다.

‘이 일은 내 능력 밖일 뿐만 아니라 감히 하지도 못하겠어! 월령안을 내가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지금 당장 돌아가 폐하께 병이 났다고 말하면 안 될까? 아니다. 지금 기절하면 어떨까?’

육장봉은 전혀 흔들리지 않고 냉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하사품들은 내가 돈을 내고 산 것일세. 폐하께서 돈을 받았고. 왜? 이반반…… 당신이 폐하를 대신해 나와의 거래를 망치려는 것인가?”

“소인…… 어찌 감히!”

이반반은 결국 정말로 눈물을 흘렸다.

‘대장군은 점점 더 음험해져.’

육 대장군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이반반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하고 웃는 낯으로 육 대장군에게 약속했다.

“대장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소인이 반드시 잘 해낼 겁니다.”

“좋네. 좋은 소식 기다리겠네.”

육장봉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자 더 이상 이반반을 난처하게 하지 않고 곧 가 버렸다.

그는 하루속히 상처를 회복하여 바깥의 골칫거리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야 월령안을 내보낼 수 있었다.

“대장군, 편히 가십시오.”

울상을 하고 육 대장군을 보낸 후 이반반은 어화원 밖에 쌓여 있는 상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마구 비볐다.

“어째서 나에게 이런 일이…….”

얼굴을 한참 비비고 나서야 이반반은 고개를 들었다. 또다시 황제의 곁에서 서슬이 시퍼렇고 도도하며 위엄이 있는 황제의 최측근 내관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뭐 하는 것들이냐? 어서 이 상자들을 모두 들고 가서 숨겨라! 여기에 쌓아 두고 이목을 끌 대로 다 끌 거냐?”

이반반은 한쪽에 숨어 없는 척하는 금군을 가리키며 못마땅해서 콧방귀를 뀌었다.

‘양심도 없는 자식들, 평소에 얼마나 돌봐주었는데. 내가 대장군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해 주는 사람이 없다니. 준 물건들이 아깝군.’

이반반은 화가 치밀어 어떻게 봐도 금군들이 눈에 거슬렸다.

하지만 금군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반반의 말을 듣자 우두머리가 상자를 어디에 두겠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커다란 나무상자들을 모두 근처의 아무도 없는 궁전에 가져다 놓았다.

상자를 다 옮긴 뒤에도 금군은 이반반에게 다른 분부는 없는지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반반은 어떻게 해야 육 대장군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금군의 양심 없는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상대방을 걷어찼다.

“꺼져, 꺼져, 꺼지라고! 양심도 없는 쌍놈의 자식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금군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가만히 있었던 건 이반반을 도와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였다.

그들은 화를 자초하지 않기 위해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금군이 재빨리 물러갔다. 이반반만 혼자 어화원 밖에 서서 홍예문을 마주하고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대장군이 분부한 이 일은 너무 어렵군!’

어젯밤에 하사한 옷과 장신구들이다. 멀쩡한데 갑자기 바꾸자고 말하면, 사람이라면 모두 이 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육 대장군이 아침 일찍 열몇 대의 마차를 끌고 입궁한 것이 비밀인 것도 아니었다. 월령안이 한마디 물으면 곧 알게 될 일이었다.'

“대장군은 정말 나를 곤란하게 하시는군!”

어젯밤에 하사한 물건을 바꿔 내오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대로 이유를 둘러대면 되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이 일이 대장군과 연관된다는 것을 모르게 하고 오늘 가져간 물건이 대장군이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게 할 재간은 없었다.

그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대장군이 너무 큰 함정을 파 놓았기 때문이었다.

“월령안이 이 물건들을 자신이 궁에 가져온 거란 걸 모르게 하라면서 애당초 왜 떠들썩하게 마차 십여 대로 궁전에 끌어왔을까? 왜 대장군이 일부러 그런 것 같지?”

이반반은 멈칫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이마를 탁 쳤다.

“맞다. 앞서 전하께서 말씀하셨지. 월령안이 대장군 때문에 화나서 기절했다고. 월령안은 지금 대장군에게 화가 나 있을 거야. 새로 가져간 물건이 대장군이 보낸 것이라는 걸 알면 반드시 받지 않을 것이다.”

이반반은 문득 자신이 진상을 알아낸 듯싶었다.

“이제 알겠군. 대장군은 월령안에게 이 물건들이 자신이 보낸 것임을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네. 그냥 폐하께서 하사하신 옷이나 장신구를 바꿔 내기 전에 월령안이 알면 안 되는 것이지. 사실을 알고 월령안이 준비할 수 없게 말이야.”

이반반은 흥분하여 두 눈을 반짝였다.

“물건을 바꿔 놓은 다음에는 월령안이 알든 모르든 중요하지 않지. 황궁에서는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잖아. 폐하께서 어젯밤 하사하신 옷과 장신구를 치우면 월령안이 대장군께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그가 보낸 옷과 장신구를 사용할 수밖에 없겠군. 이제야 대장군의 뜻을 알겠어.”

이반반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과연 천군만마를 지휘할 수 있는 인물이군. 월령안이 대장군을 만난 게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네.”

육 대장군의 뜻을 알아차리자 이반반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금세 알게 되었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한 다음 진중한 미소를 띠고서 침착하게 영복궁으로 걸어갔다. 조금 전의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월령안은 몸이 불편하여 방 안에서 쉬고 있었다. 내관이 와서 보고하자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얼른 정리하고 나와 손님을 만났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 모르겠군요?.”

“큰일도 아닙니다. 연복궁에 시중 드는 일손이 모자라서 저한테 보고가 들어왔더군요. 연복궁은 황궁 안에 있으나 전전(前殿)이 아닙니다. 연복궁의 사무는 후궁의 사무이니 월 낭자가 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월 낭자, 혹시 시간이 나시면 연복궁에 한번 가셔서 상황을 알아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반반은 공손하게 말했다. 온전히 사무적인 말투였다.

월령안은 이반반이 연복궁에 대해 이야기하자 곧 안달이 났다. 자신의 손을 꼭 맞잡고 거듭해서 조급해해서는 안 되며, 남 앞에서 진실한 기분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되뇌어서야 겨우 마음속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누르고 이반반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리고 연복궁에 대해 신경을 쓴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마음속으로 다섯까지 셈을 세고 애써 태연하게 말했다.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마침 지금 시간이 나니 제가 한번 가 볼게요.”

“월 낭자, 그럼 수고하세요. 이건 출궁 영패입니다. 월 낭자께서 이 영패를 가지고 직접 가면 됩니다.”

이반반은 허리춤에 걸린 영패를 끌어 월령안에게 건네려다 문득 육 대장군이 난각에서 황제에게 하던 말이 떠올랐다.

대장군은 월령안의 몸에 다른 남자가 준 물건이 있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난 남자로 치지 않으니 괜찮겠지?’

하지만 육장봉의 차가운 눈초리를 떠올리자 이반반은 그래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영패를 월령안에게 건네주며 특별히 주의를 주었다.

“월 낭자, 영패는 손에 들고 다니세요. 절대 몸에 걸지 마십시오.”

“이반반의 귀띔 고마워요.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월령안은 이반반의 귀띔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생각은 모두 연복궁에만 쏠려 있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시지요.”

이반반은 갑자기 제 발이 저려 감히 월령안을 쳐다보지 못했다.

물론 이반반은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연복궁의 염 황숙과 월령안에 대한 염 황숙의 관심을 떠올렸던 것이다.

‘만약 염 황숙이 내가 대장군을 도와 월령안을 함정에 빠뜨렸다는 걸 알면 나를 때려 죽이려 하는 게 아닐까?’

염 황숙의 아무 감정도 실리지 않은, 마치 모두를 파리 보듯이 하는 차가운 눈초리를 떠올리자 이반반은 저도 모르게 흠칫 떨고 말았다.

‘후회되는군. 지금이라도 돌려달라 할까?’

이반반은 생각이 바뀌자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알아차린 듯 손안의 영패를 움켜쥐고 급히 이반반에게 예를 올렸다.

“이반반, 공적인 일이 중요하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바쁘게 월령안은 나비처럼 홀짝 돌아서서 빠른 걸음으로 떠나갔다. 이반반에게 말을 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반반은 할 말이 없었다.

‘다들 무얼 먹고 자랐길래 이렇게 똑똑하단 말인가. 나는 아직 입도 뻥끗하지 못했거늘…….’

이반반은 월령안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자 또 얼굴을 비비고 싶었다.

‘대장군뿐만 아니라 대장군이 좋아하는 여인도 상대하기 어렵군. 대장군과 월령안을 만나다니 재수에 옴이 붙었나 보다!’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돌이킬 수 없었다. 이반반은 울며 격자 먹기로 육 대장군이 분부한 임무를 해내야 했다.

월령안이 영복궁에 없는 틈을 타 이반반은 즉시 사람을 데리고 빈 궁전에 숨겨 두었던 나무상자를 영복궁에 들고 왔다. 영복궁의 궁녀에게 상자 안의 옷과 장신구를 어젯밤 황제가 하사한 옷과 장신구와 바꿔치기 할 것을 명했다.

상자 속의 물건만 바꾸고 상자는 바꾸지 않았다. 이러면 들고 나가도 의심받지 않을 것이다. 월령안이 신경을 덜 쓴다면 짧은 시간 내에 상자 안의 옷과 장신구가 바뀌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육 대장군이 보내온 십여 상자의 물건들은 장신구, 옷, 옷감 그리고 적지 않은 향료 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평소 아가씨들이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황제가 월령안에게 하사한 옷과 장신구보다 더 화려하고 값졌으며 품종도 많았다.

상자가 열리자마자 온 실내가 찬란하게 빛났다. 이반반은 하마터면 눈이 뒤집힐 뻔했다. 황제가 보냈던 그 물건들 보다 훨씬 좋은 물건들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물건들을 보자 육 대장군이 황제가 하사한 옷과 장신구가 형편없어 월령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직접 나가서 옷과 장신구를 싸 들고 온 것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육 대장군이 보낸 장신구와 옷들은 실로 황제의 체면을 구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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