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9화 내가 단단히 병이 들었군
육장봉이 궁에서 소식을 알아내기란 더없이 쉬운 일이었다. 곧 육장봉은 황제가 월령안에게 수많은 보석, 장신구, 옷감과 약재를 하사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건 월령안이 먹고, 입고, 묵고, 움직이는 것까지 모두 책임지겠다는 말인가? 이러면 월령안은 다른 남자가 선물한 물건을 몸에 지니는 정도가 아니라 몸에 걸친 모든 것이 모두 다른 남자가 선물한 것이라는 의미 아닌가!’
어둠 속에 감춰진 육장봉의 얼굴에는 전혀 감정이 없었다. 그는 차갑게 당부했다.
“나는 궁을 나가야겠다. 폐하께서 물으시면 그리 대답하거라.”
말을 마친 육장봉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목에 힘을 주고 궁을 나갔다.
황제가 소식을 들었을 때는 이미 저지할 수 없었다.
황제는 화도 나고 마음도 아팠다.
‘장봉이 몸의 상처도 개의치 않고 급히 궁을 나간 것은 분명 공무 때문일 거야.’
하지만 노인은 소식을 듣고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는 육장봉이 예전에 월령안이 했던 바보짓들을 모조리 답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육장봉이 궁을 나가자마자 육이 등은 소식을 듣고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장군부에 도착하고 모였다.
하지만 궁을 나선 육장봉은 송취 골목을 지날 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황궁에서 장군부로 가려면 반드시 송취 골목을 지나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월령안을 만난 뒤로 육장봉은 황궁에 들어가든, 아니면 궁에서 나와 장군부로 돌아가는 길이든 모두 송취 골목으로 갔다. 낮에 송취 골목 밖의 거리가 붐벼서 움직이기 힘들어도 그는 이 길을 고집했다.
왜냐하면 월령안이 육씨 가문에 시집가기 전에 몰래 거리 옆에 서서 사람들 사이에 숨은 채로 그를 훔쳐봤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를 한 번 보기 위해 거리 귀퉁이에서 몇 시진이나 서 있었다고 했다.
그는 지금의 월령안은 이런 ‘바보짓’을 다시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궁을 드나들 때마다 여전히 송취 골목 밖의 거리를 걸었다.
그는 월령안이 그를 보고 싶어 할 때, 문을 나서자마자, 시선을 들자마자 그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시는 거리 귀퉁이에서 몇 시진 동안이나 서 있지 말고.
하지만 그가 경성으로 돌아오고 나서, 이 길을 거의 백 번이나 걸었지만 월령안은 한 번도 거리에 나타나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이날 밤, 육장봉은 궁에서 나온 뒤, 여전히 송취 골목 밖의 거리를 걸었다. 그는 월령안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뻔히 알아도 여전히 이 길을 걸었다.
송취 골목을 지난 육장봉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깊은 골목 입구를 바라보며 머릿속으로는 저도 모르게 태의서에서 노인이 한 말들이 떠올랐다.
“육장봉! 넌 알고 있느냐? 령안이 너에게 시집간 삼 년 동안 너는 매일, 매 순간마다 월령안의 진심을 짓밟았다. 너는 매일, 매 순간마다 월령안이 정성껏 너를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을 버리고 있었다. 넌 지금 마음이 아주 아프지? 알려 줄게, 육장봉. 네가 지금 아픈 마음을 그대로 겪으며 월령안은 홀로 삼 년을 지냈다.”
그는 월령안의 진심을 짓밟으려 하지 않았지만 월령안이 그를 위해 정성껏 준비한 모든 것을 버렸던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앞으로 그가 월령안을 위해 정성껏 모든 것을 준비할 것이다.
육장봉의 기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곧이어 천천히 송취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골목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거리 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월령안이 예전에 이곳에 서서 무더운 더위를 마주하고, 매서운 바람을 무시하면서 몇 시진씩 기다렸던 기분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다.
육장봉 몸의 상처는 낫지 않았다. 오장육부는 마치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다. 육장봉은 억지로 버티지 않고 두 손으로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그는 평온하게 골목 밖의 칠흙 같이 어둡고 고요한 거리를 바라보았다.
육장봉은 이렇게 한 시진이나 넘게 서 있었다.
한 시진 넘게 서 있자 육장봉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다. 그는 머리가 무거워지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그는 고개를 흔들고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는 자기도 이렇게 멍청하게 굴 날이 올 줄 몰랐다.
육장봉은 풀이 죽어서 손을 늘어뜨리고 떠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너무 급히 일어난 탓에 몸이 불안하게 휘청거렸다. 어렴풋이, 그는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백마를 타고 골목 입구에서 거리로 나오는 것을 본 것 같았다.
빨간 옷 소녀의 미소는 환하고 눈부셨다. 그녀는 채찍질하며 골목 입구를 지날 때, 거기서 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다. 그리고 골목 입구의 방향을 향해 이를 드러내며 가볍게 웃었다.
“월…….”
육장봉의 차가운 얼굴이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그는 골목 입구를 천천히 지나며 그에게 활짝 웃음을 짓는 여인을 보고 생각도 하지 않고 손을 뻗었다. 그는 그 소녀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손을 뻗는 순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모든 것은 그의 환상일 뿐이었다.
육장봉은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리고 실망스러운 듯이 손을 거두고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단단히 병이 들었군.”
육장봉은 잠시 침묵하다가 골목에서 나와 어두운 대로로 들어섰다.
그는 월령안이 그를 한 번 보기 위해 골목 입구에서 몇 시진이나 기다렸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내 지금 기분과 비슷하겠지. 외롭고 허탈하고.’
하지만 허탈함은 잠깐이었다. 육장봉은 곧 거리에서 사라졌다.
* * *
육이는 육장봉의 소식을 받고 십이를 제외한 친위대를 거느린 채, 장군부 밖에서 육장봉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 시진이 지나도록 여전히 육장봉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둘째 형, 대장군께서 무슨 일이 생기신 건 아니겠죠?”
육삼과 육사는 걱정이 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은 지금 대장군이 부상당한 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길에서 잠복한 암살자를 만나게 된다면 대장군이 정말로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럴 리 없다!”
육이도 속으로 불안했다. 하지만 불안해하는 아우들의 질문에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한 시진이 지났는데도 장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육이는 장군에게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을 확신하면서도 걱정이 되었다. 그는 참지 못하고 목을 길게 빼서 살펴보았다.
육일은 부상당해 대장군의 곁을 지킬 수 없었다. 지금 대장군의 옆은 암위가 보호하고 있었지만 만약 정말 대장군을 잠복 살해하려는 사람이라면 분명 암위에게 먼저 손을 썼을 것이다. 암위가 소식을 전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
‘대장군께서 이렇게 늦게 나타나지 않으시는데 혹시 정말 일이 생긴 게 아닐까?’
육이는 마음속으로 당황했다. 하지만 애써 침착함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육이와 비슷했다. 속으로 걱정하고 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또 반 시진이나 더 기다렸다. 진작에 나타났어야 할 대장군은 여전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육삼은 머뭇거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둘째 형, 우리 찾으러 가요!”
육이도 물론 찾으러 가고 싶었다. 하지만…….
“장군의 명령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
이것은 군 규칙이었다. 군 규칙은 어길 수 없었다.
육삼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제가 가겠습니다! 군 규칙을 어겨도 저 혼자 벌을 받겠습니다.”
“육삼 형은 갈 수 없어요. 제가 가겠습니다!”
육사가 듣더니 바로 앞으로 다가갔다.
“육삼 형이 저보다 중요합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웃기기는. 육일 형이 지금 요양 중이지만 만약 육삼 형이 벌을 받고 육이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대체를 해야 하잖아? 대장군의 최근 성격은 변덕이 심하지는 않아도 좋지도 못하니 난 육이 형 일을 대신할 수 없어.’
육오, 육육 등 몇몇도 듣더니 분분히 일어서서 가겠다고 나섰다.
육이는 이들을 보면서 화가 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정말 대장군을 찾으러 간다 해도 너희들이 나설 차례는 오지 않아. 됐다, 모두 돌아가. 내가 가겠다!”
“육이 형…….”
육삼, 육사 등 사람은 급히 말렸다. 하지만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육이가 어두운 얼굴로 그들의 말을 잘랐다.
“이건 군령이다!”
육삼, 육사 등 사람들은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두 눈 빤히 뜨고 육이가 말을 타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검은 그림자가 길거리에 나타났다.
하늘이 칠흙 같이 어두워 그림자인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검은 그림자가 나타난 순간, 육삼 등 사람들은 바로 그가 자기들의 대장군인 것을 알아챘다.
대장군의 분위기는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주변이 아무리 칠흙 같이 어두워도 장군의 늠름한 풍채를 가릴 수는 없었다.
육이는 두 눈을 반짝이며 가장 먼저 말에서 내려 친위대들을 데리고 앞으로 다가갔다.
“대장군!”
육장봉은 그들을 힐끗 보고 대답했다. 그리고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열 명이면 간신히 쓸 만하겠군.’
육장봉이 장군부로 돌아오자 고요하던 야밤의 장군부가 순식간에 생기가 넘쳤다.
대문이 열리고 등불이 하나둘 밝아졌다. 장군부 전체가 불이 들어오자 대낮처럼 환해졌다.
“대장군!”
장군부의 집사는 육장봉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뒤늦게 받았다.
집사는 부랴부랴 하인들에게 음식과 뜨거운 물을 준비하게 했다. 육장봉이 문에 들어서기 직전에 모든 준비를 마쳤다.
육장봉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갑게 말했다.
“개인 창고를 풀어 마님이 착용할 수 있는 모든 장신구와 두면을 꺼내거라. 또 옷감, 향료 등 마님이 쓸 만한 물건들은 모두 찾아서 상자에 정리해 넣거라. 날이 밝기 전에 마쳐야 한다.”
집사는 잠시 멍해졌다가 곧 기쁜 내색을 했다.
“대장군,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반드시 잘 해내겠습니다.”
그래도 역시 장군이 세심했다. 마님의 저택이 불에 타서 장신구와 옷감들은 모두 큰불에 망가졌다. 임시로 산 옷감과 장신구들은 아무래도 집에서 소장하고 있던 장신구와 옷감과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들의 마님은 비록 상인 집안 출신이었으나 금지옥엽으로 자란 귀한 몸이니 온몸에 부귀를 두르고 있었다. 어찌 시중에 파는 아무렇게나 살 수 있는 물건을 쓸 수 있겠는가?
집사의 대답은 육장봉의 차가운 얼굴빛을 좀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서늘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또 말했다.
“전에 침모들더러 마님을 위해 지으라고 했던 옷은 어떻게 되었느냐? 다 지었으면 전부 상자에 담거라. 날이 밝은 뒤, 가져가겠다. 아직 다 짓지 못했다면 그녀들더러 빨리하라고 하거라.”
집사는 육장봉 말에 담긴 급함을 알아채고 진지하게 말했다.
“소인이 지금 가서 처리하겠습니다. 대장군, 걱정하지 마세요. 날이 밝기 전에 소인이 반드시 잘 해내겠습니다. 절대 대장군의 일을 그르치지 않겠습니다.”
“그래.”
육장봉은 짧게 답했다. 목소리는 약간 갈라져 있었다.
집사는 장군의 목소리가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육장봉이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육이, 서재에 오너라. 육삼, 가서 아포더러 이각 뒤, 서재에 날 만나러 오라고 하거라.”
육장봉의 목소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강단 있고 깔끔하며 얼버무림이나 허약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집사는 자신의 생각이 과했다고 몰래 한탄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서 사람을 거느리고 개인 창고로 물건을 옮기러 갔다.
대장군부의 개인 창고는 여태까지 모두 후계자의 손에만 넘겨졌다. 육씨 가문 다른 집안은 물론, 월령안 이 가주 부인조차도 들어가지 못했다.
집사는 예전에 들어간 적이 있어 개인 창고 안에 많은 좋은 물건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속으로 이미 얼마나 많은 상자로 물건을 담아야 할지 계산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