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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98)화 (498/1,004)

498화 저는 선을 지킬 거예요

“됐다, 돌아가서 푹 쉬거라. 다른 일은 이반반이 하게 할 테니 너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황제는 싫은 티를 내며 월령안을 힐끔 훑어보았다.

“네 이 꼴을 보면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짐이 널 학대하는 줄 알겠구나.”

황숙이 이 모습을 보게 되면 그는 한바탕 얻어맞을 것이다.

황숙은 중상을 입은 육장봉도 놔주지 않았다. 그는 황숙 앞에서 그가 육장봉보다 더 큰 체면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실제로 월령안은 아주 지쳤다. 그녀는 거절하지 않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예를 올린 뒤, 이반반을 따라 나갔다.

난각을 나서자, 뒤에서 잔뜩 골이 난 조계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월령안은 얼핏 ‘황형, 왜 또……’라는 말을 듣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밖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엿듣는 데 흥미도 없었고 엿듣고 싶지도 않았다.

이반반은 앞에서 걷고 있었다. 그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힐끔 바라보았다. 월령안이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밖으로 걸어가자 그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찬사를 보냈다.

‘역시 황숙이 잘 가르치셨군. 월령안처럼 예의가 바르고 또 처신을 잘하는 애는 좋아하지 않아도 미워할 수는 없군.’

“월 낭자, 제가 먼저 모셔 드리겠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신 보석이 좀 많아 제가 먼저 사람을 시켜 고른 뒤에 나중에 보내드리겠습니다.”

이반반은 월령안의 체면을 세워 주고 싶었다. 그래서 상을 내리는 일을 크게 만들고 싶었다. 후궁 사람들에게 황제가 월령안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보여 주고 싶었다.

“대인, 감사합니다. 폐를 끼쳐 드렸네요.”

월령안은 거절하지 않고 웃으면서 받았다.

그녀는 쉽게 다른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또 다른 사람의 선의에 감사했다.

“월 낭자, 별말씀을요. 제가 무슨 대인입니까. 월 낭자께서 괜찮으시다면 저를 이반반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영리한 사람과 교류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라니까.’

이반반은 친한 척하며 지나가듯 슬쩍 물었다.

“월 낭자, 낭자께서 방금 전에 폐하 앞에서 후궁의 모든 내관과 궁녀의 직급을 모두 정리하셨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저한테 보여 주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이죠.”

월령안은 아주 명쾌하게 대답했다.

“제가 책자로 정리한 뒤 이반반께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후궁에 오래 머무를 것도 아니었으니 그 물건은 그녀에게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원래 정리를 마치면 숙 태비에게 그동안 보살펴 준 인정을 갚는 셈으로 주려고 했다. 그러니 이반반이 부탁한다면 못 줄 것도 없었다.

“그럼 월 낭자께 감사드립니다.”

이반반은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하고 한담을 하듯 말을 꺼냈다.

“월 낭자, 만약 시간이 되시면 연복궁(延福宫)에 가서 둘러보셔도 됩니다. 거기의 경치가 아주 좋아요.”

‘연복궁? 궁에 그런 곳도 있었어?’

후궁과 전전을 모두 둘러봤던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궁에서 연복궁을 보았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월령안은 속으로 은근히 짐작이 갔지만 더 묻지 않았다. 다만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겉으로 아무것도 티를 내지 않았다.

영복궁으로 돌아온 월령안은 쉴 생각을 하지 않고 옥죽을 불러 말을 물었다.

“옥죽, 궁에 연복궁에 있어요? 전 왜 보지 못했죠?”

“연복궁이오?”

옥죽은 궁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녀는 한참 멍하게 있다가 생각이 난 듯 말했다.

“월 낭자, 연복궁은 비록 궁의 일부분이지만 사실상 궁 안에 있지 않고 궁 밖에 있어요. 여기와는 좀 거리가 떨어져 있는걸요.”

말을 마친 옥죽은 또 낮은 목소리로 일깨워 주었다.

“월 낭자, 우리 후궁의 사람들은 연복궁에 갈 수 없어요.”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방금 전에 누가 연복궁을 말하는 것을 들어서요. 생각 없이 물어본 거예요. 걱정 마세요. 저는 선을 지킬 거예요.”

‘어쩐지 내가 궁을 전부 돌았는데도 영감님을 만나지 못했지. 영감님은 궁 안에 있지 않았구나. 연복궁, 내가 반드시 한번 다녀와야겠어.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옥죽의 어여쁜 얼굴이 순간 창백해지며 다급히 용서를 구했다.

“소인이 선을 넘었습니다.”

월령안은 손을 저으며 개의치 않아 했다.

“제가 좀 지쳤어요. 먼저 잘게요. 조금 있다 이반반이 폐하께서 하사하신 물건을 가져오면 절 깨워 주세요.”

옥죽은 그녀의 하인이 아니었다. 옥죽이 그녀에게 일깨워 준 것은 그녀가 숙 태비를 끌어들일까 걱정되어서였다.

그녀는 이런 일로 화를 낼 정도로 옹졸하지 않았다.

‘난 아주 너그럽다니까. 육장봉 때문에 화가 나 기절했다는 것은 오해라고…….’

* * *

월령안은 아주 지쳤었다. 잠에서 깨자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월령안은 몸을 일으키고 사람을 불러 들어와 시중을 들라고 하려는 순간, 달거리가 시작된 것을 눈치챘다.

월령안은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며 잠깐 있다가 궁인더러 들어와 시중을 들게 했다.

월령안이 준비를 마치자 이미 이각(二刻)이 지나 있었다.

침소를 나서자 분부하지 않았는데도 궁인이 따뜻한 죽과 국을 들고 왔다. 전부 몸에 좋은 음식들이었다. 모두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줄곧 준비된 채로 그녀가 깨기만을 기다렸던 것이 분명했다.

월령안은 한 상 가득 차려진 뜨거운 음식들을 보면서 금방 입궁했던 이틀 동안에는 미지근한 음식밖에 먹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궁의 여인들이 왜 기를 쓰고 눈에 띄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궁에서 눈에 띄지 않는다면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기는커녕 기본적인 생활도 보장할 수 없었다. 따뜻한 밥조차 먹을 수 없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너무 어려웠다.

월령안은 식탁 앞에 마주 앉아 하인이 건네주는 양칫물을 받았다. 그녀는 한입 물었다 뱉었다. 또 궁녀가 바치는 따뜻한 손수건을 들어 입가의 물기를 닦았다.

“낭자, 이반반 총관께서 오후에 사람을 파견하여 낭자께서 깨시면 그들에게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상을 보내오겠다고요.”

옥죽은 이 틈을 타서 앞으로 다가와 월령안을 일깨워 주었다.

‘이반반은 참 자상하네. 내가 쉬는 데 방해하지 않으려고 줄곧 기다렸군.’

순간, 월령안은 총애를 받는 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웃고 나서 이 황당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서 가셔서 이반반께 제가 깼다고 말씀하세요. 이각 뒤에 보내셔도 된다고요.”

“네, 낭자.”

자극을 받은 건지, 아니면 스스로 깨우친 건지 옥죽은 갑자기 아주 공손해졌다. 심지어 숙 태비 앞에 있을 때보다 더 공손했다.

월령안은 그것을 눈치챘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궁의 지나가는 손님에 불과했다. 궁의 사람들은 쓰기 좋으면 계속 쓰고 쓰기 불편하다면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바꾸겠지만, 바꾸지 못한다면 스스로 움직이면 되었다.

결국 며칠 동안만 지나면 되는 일이니 그녀가 정성을 쏟아 뭔가를 이룰 필요는 없었다.

시간이 마침 딱 되었다. 월령안이 식사를 마치고 옷을 새로 갈아입고 나오니 내관이 황제가 하사한 물건이 왔다고 보고하러 왔다. 이반반이 직접 가져왔는데 족히 수십 상자나 된다고 했다.

월령안은 그 말을 듣고도 별로 크게 놀라지 않았다.

보석을 담은 상자가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한 상자라고 해도 한 움큼일 뿐일 것이다. 그녀는 수없이 많은 귀중품들을 보아왔었다. 이제 와서 보석과 장신구들에 눈이 휘둥그레질 리가 없었다.

월령안이 전전에 오자 이반반 뒤에 어린 내관이 주르륵 따라온 것이 보였다. 그들은 사람마다 손바닥만 한 비단 함을 들고 있었다. 뒤에는 또 수십 개의 사람 키의 절반만 한 큰 상자가 있었다. 그것들은 커다란 전전(前殿)을 꽉 채웠다.

월령안은 물건들을 훑어보고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꿇어앉아 상을 받았다. 조금도 놀랍고 기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흥분되지도 않았다.

그녀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큰 상자 안에 담긴 것은 절대 보석이 아닐 것이다. 황제가 만약 이토록 부유하다면 예전에 그녀가 육씨 가문에 시집가는 것을 묵인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 그녀를 쓰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사람보다 돈을 잘 버는 것 말고는 다른 재주가 없었다.

이반반을 월령안이 무릎을 꿇고 오래 있게 하지 않았다. 그는 빠른 속도로 황제가 월령안에게 하사한 물건 목록을 한 번 읽고 말았다.

장신구, 보석 말고도 황제는 또 월령안에게 많은 옷감과 약재를 하사했다.

* * *

월령안이 떠난 뒤, 조계안은 기분이 나빠 황제와 소리를 질렀다. 잠깐 동안 형제간의 다툼이 있었다.

싸움 끝에서 황제는 월씨 저택이 불에 탔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월령안이 가지고 있던 예전의 장신구가 없어졌다면 분명 옷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는 통이 크게 이반반더러 궁의 창고에서 옷감을 찾아내어 월령안에게 상으로 주라고 했다.

‘월령안은 지금 몸도 허약하다면서? 그럼 약재도 두 상자 더 추가하고.’

그래서 원래 보석 십수 함을 내리려던 상이 지금의 규모가 된 것이었다.

이반반은 일부러 기세를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황제가 물 쓰듯 하사한 상은 그 양만으로도 후궁 사람들에게 황제가 얼마나 월령안에 대해 만족스러워하는지 충분히 보여 줬다.

* * *

황제가 월령안에게 하사한 상이 영복궁에 도착하자마자 태후는 병이 들어 어의를 불렀다.

후궁의 다른 비들은 월령안에게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그녀들은 월령안을 괴롭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럴 수 없는 것이었다.

황제는 하직 후궁의 금지령을 해지한다고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은 궁을 나갈 수 없었다.

궁을 나갈 수 있다 해도, 그녀들은 감히 월령안을 건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감히 태후와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인데 몇몇 작은 비들을 무서워할까?

황제가 월령안에게 상을 내린 일의 위세는 아주 드높았다. 후궁 사람들이 전부 알 뿐만 아니라 멀리 연복궁에 있는 노인도 알게 되었다.

노인은 그 말을 듣고 단지 웃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황제가 월령안에게 상을 내린 것은 좋은 일이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육장봉은 꼬박 하루를 자고 저녁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그는 간단하게 음식을 먹고 송 원정을 불러 월령안의 몸이 어떤지 물었다.

그는 월령안이 그의 호각을 버린 일을 잊지 않았지만 월령안의 몸이 좋지 못한 것도 잊지 않았다.

“대장군, 월 낭자는 돌아가서 어의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어의를 부르지 않았으니 그도 가서 월령안을 진찰할 수 없었다.

육장봉은 눈살을 찌푸리고 차갑게 말했다.

“지금 영복궁에 가서 보거라.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와서 보고하거라.”

‘월령안도 참 속을 썩이는군. 자기 몸을 이리도 아끼지 않다니.’

“대장군…….”

송 원정은 머뭇거렸다. 말을 하고 싶은데 또 감히 꺼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바로 말하도록.”

육장봉은 인내심이 없게 재촉했다.

송 원정은 본능적으로 곧게 서서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대장군, 월 낭자는 아마도 여유가 없을 겁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상이 방금 전에 영복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월 낭자께서는 지금 바쁠 겁니다.”

“폐하께서 상을 내리셨다고? 대체 무슨 상이냐?”

‘폐하께서 또 월령안에게 물건을 보내셨어? 폐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월령안이 원하는 게 있다면 내가 무엇이든 구해 줄 수 있다. 쓸 데 없는 신경을 쓰시는군.’

“소관도 그 외에 구체적인 것은 모릅니다.”

태의서의 사람은 이반반이 사람 한 무리를 거느리고 수십 상자를 든 채, 위풍당당하게 후궁으로 간 것밖에 보지 못했다.

몰래 알아보니 황제가 월령안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라고 했다.

“가서 알아보거…….”

육장봉은 송 원정의 왜소한 몸뚱아리를 힐끔 훑어보더니 싫은 내색을 하고 일어나서 밖으로 걸어갔다.

“됐다. 내가 직접 알아보지.”

“대장군, 상처가…….”

송 원정은 급히 뒤쫓아 나갔다. 그는 육 대장군의 그림자가 그의 앞에서 휙, 지나가는 것만 보았다.

송 원정은 순간 정신이 아리송해지면서 자신의 의술에 의심이 생겼다.

“어떻게 그 부상으로 이렇게 빨리 움직일 수가 있지? 내 진단이 틀렸단 말인가?”

그의 동작과 속도는 부상을 다치지 않은 그보다도 더 빨랐다.

그는 좀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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