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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95)화 (495/1,004)

495화 이게 바로 네가 말한 용서냐?

하지만 그가 끝까지 생각하게 놔두지 않고 노인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그 약은…….”

손불사는 순간적으로 머뭇거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나도 잘 몰라. 내가 왔을 때는 이미 령안이가 육장봉을 만나고 나오는 길에 화가 나서 쓰러져 있었어. 그때 령안이는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고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어. 또 운 것 같았지. 얼굴에는 눈물 자국도 있었으니. 자네가 못 봐서 그렇지 령안이의 그 모습은 정말 가없었다니까. 보는 내 마음이 다 아팠으니 말이야.”

손불사는 월령안에게 절대로 들키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가 월령안에게 노인을 위하여 준비하라고 했던 그 약은 그녀가 못 해낼 줄 알고 골탕 먹이려는 목적으로 요구했던 것이라는 사실이다.

후에 그는 정말로 그 약을 지어냈다. 그 약이 결정적인 순간에 목숨을 살리는 작용이 있는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노인에게는 크게 소용이 없었다.

이 일은 줄곧 그가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감히 월령안에게 알리지 못했다.

“화가 나서 쓰러졌다고? ”

“육장봉을 만난 후에 월령안이 화가 나서 기절했다고?”

노인과 조계안이 번갈아 입을 열었다. 전자는 평온하고 냉정했으며 후자는 난폭하고 거칠었다. 하지만 전자가 더욱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적어도 손불사는 아주 겁을 먹었다.

손불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이야…….”

“쿨럭…….”

송 원정이 침 두 개를 꽂자 육장봉이 깨어났다.

육장봉은 깨자마자 기침을 심하게 했다. 피 찌꺼기가 침대 위에 튀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입가의 피를 닦았다. 그리고 가슴팍을 부여잡으며 칼로 난도질하는 듯한 가슴팍의 통증을 억지로 참았다. 그러면서 노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숙!”

“대단하군. 조그마한 무림맹주도 상대하지 못하다니.”

노인의 눈빛은 차가웠다. 일말의 온기도 없었다.

“황숙, 다음번에 무슨 일이 있으시면 저한테 맡기십시오. 수횡천은 너무 멍청합니다. 이런 사람을 쓴다면 령안에게 폐만 끼치게 됩니다.”

육장봉은 대수롭지 않게 침대 머리맡에 앉았다. 안색이 차분하고 자태가 소탈한 것이 병약한 몸인 것을 전혀 알아챌 수 없었다.

“너에게 맡긴다고? 또 월령안을 화나게 해서 기절시키게?”

노인이 차갑게 비꼬았다.

육장봉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미 지나간 일이잖아.’

육장봉은 손으로 입술을 막고 입가까지 올라온 기침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령안은 이미 절 용서했습니다.”

“널 용서했다고? 확실하냐?”

노인은 바퀴 의자를 움직여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주먹을 쥔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을 움직여 펼치자 노인의 손바닥에 움켜쥐어 있다가 드러난 것은 이미 산산조각이 난 호각이었다. 노인은 차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이게 바로 네가 말한 용서냐?”

육장봉의 안색이 확 바뀌면서 이를 악물었다.

“월령안이…….”

“왜? 네가 준 걸 령안이는 감히 버리지도 못해야 하냐?”

노인은 손을 돌려 손바닥 안의 조각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육장봉은 바닥에 흩어진 조각들을 보면서 두 눈이 피처럼 빨개졌다. 입가에서도 끊임없이 선혈이 솟구치고 있었다.

“진심이 다른 사람에게 짓밟힌 기분이 어떠냐? 진심으로 바친 보물이 다른 사람에게 버려진 기분이 어떠냐?”

노인은 웃었다.

“아주 괴롭지? 마음이 아파 죽어 버릴 것 같지? 월령안을 앞으로 불러와 한바탕 원망을 쏟아내고 싶지?”

노인은 비웃는 얼굴로 한 글자마다 신랄하게 비꼬았다. 육장봉은 얼굴을 굳힌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노인을 바라보지도, 땅에 떨어진 조각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난폭한 기운이 가득했다.

갑자기 노인의 말투가 차가워지면서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육장봉! 넌 알고 있느냐? 령안이 너에게 시집간 삼 년 동안 너는 매일, 매 순간마다 월령안의 진심을 짓밟았다. 너는 매일, 매 순간마다 월령안이 정성껏 너를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을 버리고 있었다. 넌 지금 마음이 아주 아프지? 알려 줄게, 육장봉. 네가 지금 아픈 마음을 그대로 겪으며 월령안은 홀로 삼 년을 지냈다.”

노인은 말을 하다가 또 웃음을 터뜨렸다.

“육장봉, 넌 지금 아주 억울하고, 화가 나지? 하긴 삼 년 전에 월령안이 너에게 시집간 건 네 허락을 받지 않았으니 말이다. 월령안이 널 좋아한 것은 그녀의 일이지 너와는 상관이 없었지.

하지만 그렇다면 네가 지금 월령안을 좋아하는 것 또한 월령안과 무슨 상관이냐? 월령안이 왜 네가 준 물건을 아껴야 하는 것이냐? 왜 네 진심을 신경 써야 하는데? 네 진심이 뭐라고?”

세상 일은 돌고 도는 법.

지금, 드디어 이 업보가 육장봉에게로 돌아왔다.

그의 꼬마 령안이 과거에 당했던 서러움과 겪었던 고생이 드디어 그에게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황숙의 말씀이 틀렸습니다. 저는 서운하지도 않고 화가 나지도 않았습니다.”

일순간, 육장봉은 모든 감정을 지우고 평온하고 듬직하게 노인을 바라보았다.

“령안이 아주 잘한 겁니다.”

노인이 비웃었다.

“아주 좋다. 지금 기분과 상태를 잘 유지하거라. 앞으로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날 것이다. 넌 진심이 짓밟히는 기분에 적응해야 한다.”

“황숙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육장봉은 전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반격했다.

‘염 황숙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도 버티지 못하면 안 돼. 월령안, 기다리시오.’

조계안은 육장봉이 노인의 호된 꾸중에 전혀 반항하지 못하고 맥없이 당하는 것을 보고 약간의 측은지심이 생겼다.

하지만 그는 약간 기쁘기도 했다.

‘육장봉은 쌤통이야. 그래도 황숙이 대단해. 육장봉을 제압할 수 있으니까.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 호각을 가져도 육장봉을 어쩌지 못했을 거야.’

육장봉의 처사 방식은 항상 단순하고 거칠었다. 오늘 만약 황숙이 아닌 다른 사람이 호각을 들고 육장봉을 찾아왔다면 육장봉은 가장 먼저 그 사람을 패고 또 월령안을 한바탕 나무랐을 것이다.

육장봉의 눈에는 한바탕 패는 것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었다. 만약 있다면 그건 두 번 맞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육장봉이 좌절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은데. 아쉽게도 최일이 없네. 최일이 있었더라면 그더러 그림을 그리라고 할 텐데.’

조계안이 옆에서 고소해하고 있던 순간, 갑자기 노인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넌 얘한테 볼 일이 있다지 않았느냐? 어서 말하거라.”

단순한 시선뿐이었지만 압박이 심했다. 조계안은 저도 모르게 노인에게 매달려서 매를 맞던 과거를 떠올렸다.

“네, 황숙.”

조계안은 예전의 산만하던 태도를 거두고 바로 곧게 서서 노인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 나서야 육장봉과 말했다.

“너네 육씨 가문 넷째 집안에 또 일이 생겼어. 내가 방금 전에 들은 건데 너의 그 넷째 숙모의 동생 말이야. 도박으로 큰돈을 잃고 빚을 갚을 돈이 없어 넷째 숙모가 육씨 가문 넷째 저택을 저당잡혔대.

지금 저택이 야율융진의 손에 들어갔다더군. 예외가 없는 이상, 야율융진은 내일 입성하여 사관에 주둔할 거래. 그리고 육씨 저택에 가서 난리를 칠 예정이라니 넌 마음의 준비를 잘해두라고. 미리 대책을 생각해 내게 말이야.”

“야율융진이?”

육장봉의 얼굴은 먹물처럼 어두워졌다.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북요인의 손이 참 길게도 뻗었구나. 너희 황성사는 일을 어떻게 한 것이냐?”

손불사와 송 원정은 묵묵히 옆에 물러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없는 사람처럼 있었다.

송 원정은 원래 나가려고 했다. 자리를 세 명의 나리에게 비켜 주려고 했다. 하지만 손불사가 어떻게 해도 가려고 하지 않았다. 송 원정은 하는 수 없이 남아서 손불사와 함께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도 약간 궁금했다.

“내 수하가 찾아보니 이 안에는 월령안도 개입되어 있었다.”

조계안은 이를 악물고 육장봉을 흉악하게 노려보았다.

‘육장봉 이 간신배, 황숙 앞에서는 순한 양같이 굴면서 내 앞에서는 방자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구나. 정말 내가 만만한 사람인 줄 아나?’

“월령안이 아니야!”

“령안이 아니다.”

육장봉과 노인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둘은 불만이 가득한 눈빛으로 조계안을 노려보았다.

조계안은 육장봉의 기분이 좋든 말든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노인에게 밉보일 수 없었다.

조계안은 생각도 하지 않고 아부하듯이 변명했다.

“황숙, 전 령안이 아닌 줄 알아요. 우리 령안이 어떤 사람인데요. 아무리 육장봉을 미워하고 육씨 가문 넷째 집안을 싫어하며 또 아무리 육씨 가문 넷째 집안을 엿 먹이려고 꿍꿍이를 꾸며도 우리 령안이는 절대 북요인과 협력하지 않을 겁니다.

제 수하가 월령안의 흔적을 발견한 것은 아마 누군가 령안을 음해하려고 한 흔적 같습니다. 령안이 북요인과 공모했다고 누명을 씌우려고요, 그래서 제가 급히 입궁하여 황숙께 먼저 보고드리는 겁니다. 그자들이 우리 령안이를 괴롭히지 못하게요.”

“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드물게 안색이 좋아지며 옆자리를 가리켜 조계안더러 앉으라고 했다.

‘역시, 월령안의 편을 들어 말해야 황숙 앞에서 자기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군.’

조계안은 감탄했다. 황숙이 십팔 년 전에 청주에 가지 않고 변경에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더라면 그는 월령안이 황숙의 친딸이라고 오해할 뻔했다.

친조카인 그는 황숙 앞에서 월령안의 손가락 하나보다도 못했다.

노인 앞에서 드디어 앉을 자리가 생긴 조계안은 더 이상 산만하게 굴지 못했다. 그는 앉자마자 진지하게 말했다.

“황숙, 이 일은 월령안에게 아주 불리합니다. 만약 다른 때였다면 사람들은 기껏해야 한마디 하고 말 겁니다. ‘월령안이 역시 육씨 가문을 아주 싫어해서 육씨 가문에 복수할 일말의 기회도 놓치지 않는다’ 정도로요.

하지만 이 시기에 월령안이 야율융진과 북요인을 도와 육씨 가문 넷째 집안을 괴롭혔다고 소문난다면 분명 백성들의 분노를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월령안을 사지로 몰아넣는 꼴이 됩니다.”

노인의 앞에서 앉을 자리가 생긴 조계안은 순식간에 우쭐해졌다. 그는 육장봉을 쳐다보지도 않고 노인만 바라보았다.

“황숙, 우리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그들이 손을 쓰기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손을 쓸 방법을 생각해서 그 버러지들을 눌러 죽여야 합니다. 그들이 혼란을 일으키지 못하게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물었다.

“육부 관리를 척결하는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황숙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런 일은 장씨 가문도, 소씨 가문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또 다른 대갓집들은 더욱 건드릴 수 없습니다. 그자들은 전부 능구렁이라 진작에 말끔히 몸을 뺐습니다. 증거 하나도 남기지 않고요. 만약 증거가 있다 해도 그들은 죄를 대신 뒤집어쓸 사람을 찾을 겁니다.”

장 부승상과 육부상서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번 척결은 어떻게 해도 그들한테까지 닿지 못할 것이다.

“구리파의 일은? 어떻게 되었느냐?”

노인이 또 물었다.

“진척이 크지 않습니다. 하나같이 입이 아주 무겁습니다.”

구리파에서 잡은 사람들은 모두 청주에서 정성껏 키워낸 첩자들이었다. 하나같이 굳센 마음가짐을 하고 있어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노인은 눈을 들더니 가볍게 말했다.

“그럼 그들더러 모두 죄를 두려워한 나머지 자살했다고 하거라. 죽기 전에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알아내고.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황숙.”

‘황숙께서 입을 여셨는데 내가 무서워할 게 뭐가 있겠어? 하늘이 무너져도 황숙께서 지켜 주실 건데 황형이 좀 기분 나빠도 참으라지.’

조계안의 긴장되었던 몸이 순식간에 홀가분해졌다.

‘황숙한테 보호받는 건 기분이 정말 좋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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