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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94)화 (494/1,004)

494화 대장군, 손을 풀어 주세요

손불사는 송 원정을 억지로 끌고 갔다. 그는 자리를 육장봉과 월령안에게 남겨 주었다.

두 사람이 떠나자 육장봉은 방이 환해진 기분이 들었다. 공기조차 맑아진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만들어 낸 분위기도 손불사와 송 원정에 의해 망쳐졌다.

육장봉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그의 맞은편에 고분고분하게 앉아 있는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억지로 월령안의 머리를 쓰다듬고 품에 안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월령안, 아직도 나에게 화가 나 있는 것이오? 내가 전에 한 말은 모두 홧김에 한 말이오.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

“그래요.”

월령안은 평온한 얼굴로 아주 통쾌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냉소를 지었다.

‘내가 어떻게 마음에 담아 두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내가 어떻게 화를 내지 않을 수가 있겠어?

내가 화를 내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하지만 내가 왜 육장봉에게 알려 줘야 하지?

육장봉이 달래 줄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화가 안 났다면 받아 주오.”

육장봉은 월령안의 손을 잡고 거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세로 손에 든 호각을 월령안의 손바닥에 두었다. 그리고 다시 월령안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어 월령안이 뿌리칠 수 없도록 막았다.

“받으시오. 이것이 당신의 목숨을 살릴 것이오.”

“대장군, 손을 풀어 주세요.”

월령안은 손을 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육장봉의 손은 마치 무쇠처럼 단단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손을 뺄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결국 참지 못하고 다른 한 손으로 월령안의 정수리를 살며시 다독였다. 그리고 월령안이 불만을 가지기 전에 손을 떼고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나에게 더는 화를 내지 말아 주시오. 안 되겠소?”

“제 손을 아프게 잡고 계셔요.”

월령안은 고개를 돌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육장봉은 힘을 살짝 거두었다. 하지만 여전히 월령안의 손을 놓지 않았다.

“내가 손을 놓으면, 내 호각을 받겠다고 약속할 수 있소?”

월령안은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들고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받을게요.”

“그래, 고맙소.”

육장봉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의 냉혹하던 오관도 순간 부드러워졌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꽉 움켜쥐었던 손목을 움직이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대장군, 감사해요. 대장군께서도 몸에 상처가 있고 저도 몸이 좋지 않으니 먼저 갈게요.”

“돌아가서 푹 쉬시오. 공무의 일은 내가 폐하께 말씀드리겠소. 당신은 더 신경 쓰지 마시오.”

육장봉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더 이상 가로막지 않았다.

그도 몸이 좋지 않아 더 버티기 힘들었다. 월령안이 휴식이 필요한 것도 맞는 말이었다.

“대장군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월령안은 육장봉에게 예를 올렸다. 그리고 육장봉의 옆을 돌아 떠나갔다. 아쉬워하는 기색도,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심지어 육장봉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월령안…….”

육장봉은 이상한 느낌을 받고 당황해서 월령안을 가로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손을 허공에 뻗은 채로 멈춰 버렸다. 몸이 불안하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장군께서 아직 용건이 있으신가요?”

월령안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오.”

직감이 그에게 월령안이 아직도 기분이 좋지 않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왜지? 난 이미 사과를 했고 월령안도 내 사과를 받아 주었는데 왜 아직도 기분이 좋지 않은 거지?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건가?’

육장봉의 오관이 다시 차가워졌다.

그는 정말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정신이 잠깐 흐려진 사이에, 월령안은 이미 멀리 가 버리고 없었다. 육장봉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이미 월령안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육장봉의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월령안이 없자, 육장봉도 더 이상 억지로 버티지 않았다. 몸이 휘청거리더니 한쪽으로 풀썩, 쓰러졌다.

손불사와 송 원정은 육장봉이 그가 보이는 것처럼 건강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둘은 밖으로 나간 뒤,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월령안이 떠난 것을 보자 둘은 약 상자를 들고 뛰어 들어왔다.

둘은 그래서 제때 도착할 수 있었다. 육장봉이 쓰러지려는 순간, 송 원정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육장봉을 잡았다.

달칵.

송원정은 다행히 무사히 육장봉을 붙잡아 그가 침대 머리에 부딪히지 않게 할 수 있엇지만, 덕분에 그의 팔은 또다시 탈골되었다. 그는 너무 아픈 나머지 얼굴이 새하얘졌다.

손불사는 느긋하게 걸어 들어오더니 송 원정을 힐끗 쳐다보았다.

“송씨, 자네는 나이도 많은데 뭘 그렇게 무리하고 그러나? 쟤는 나이가 어리니 아무 데나 부딪히거나 다친다 해도 무슨 일이 있겠어?”

“손 신의, 대장군께서는 우리 주나라의 영웅이십니다.”

송 원정은 안색이 창백했지만 후회하는 기색은 없었다

탈골이 아니라 목숨을 잃게 된다 해도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됐어, 됐어. 그럼 어서 영웅을 내려놔. 내가 당신 영웅 둘을 살펴보지.”

손불사는 말로는 싫은 내색을 비쳤다. 하지만 송 원정이 더는 버티기 힘든 때를 정확히 파악해 그의 손에서 육장봉을 넘겨받아 부축해 침대에 눕혔다.

송 원정은 빙그레 웃기만 하고 말을 하지 않았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준 호각을 움켜쥐고 길을 가면서도 손을 풀지 않았다. 얼굴의 표정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어화원을 지날 때, 그녀는 어화원 안의 작은 호수를 보았다. 월령안은 방향을 바꿔 호수 옆에 도착했다. 그리고 호각을 든 손을 높이 쳐들더니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호각을 던졌다.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호각이 호수에 떨어지며 물보라를 일으켰다. 하지만 곧 평온함을 되찾았다.

월령안은 평온한 호수를 힐끗 바라보고 또 푸르다 못해 검은색을 띠게 된 손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돌아서서 떠나갔다.

그녀는 거절할 수는 없었지만 버릴 수는 있었다.

금군 몇몇이 소리를 듣고 다가와 무슨 일인지 물었다. 월령안은 대충 이유를 둘러대어 금군을 보내 버렸다. 그리고 영복궁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자기가 떠난 뒤, 노인이 바퀴 의자를 끌고 나온 것을 모르고 있었다.

노인은 어두운 곳에 숨어 떠나는 월령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온통 걱정과 아쉬움뿐이었다. 월령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노인은 시선을 거두었다.

시선을 거두는 순간, 노인 눈에 드리운 온정은 한기로 대체되었다.

“가서 건져 내거라.”

그도 무엇이 월령안의 기분을 상하게 했는지 알고 싶었다.

“네, 대인.”

노인의 뒤를 따르던 어린 내관이 바로 호수에 뛰어들었다.

반 시진 뒤, 내관은 호수에서 육가군의 호각을 건져 내서 노인의 앞에 바쳤다.

“육장봉!”

노인은 호각을 들고 ‘팍’ 하는 소리와 함께 호각을 박살 냈다.

“태의서로 가자.”

‘육장봉은 정녕 월씨 가문에 사람이 없으니 령안이를 마음껏 괴롭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네, 대인.”

어린 내관은 젖은 옷을 입은 채로 노인의 바퀴 의자를 밀어 태의서로 향했다.

태의서 밖에서 다급한 기색의 조계안과 마주쳤다.

“황숙, 왜 여기 계십니까?”

조계안은 노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다급히 발걸음을 멈추고 노인에게 예를 올렸다.

노인은 조계안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넌 무슨 일이냐?”

“아…… 육씨 가문에 일이 생겼습니다.”

조계안은 얼버무리며 대답했다. 그는 내관을 물러가게 손짓하고 노인의 뒤로 와서 바퀴 의자를 밀었다.

“황숙, 황숙께서도 그를 찾으러 오신 겁니까?”

“육씨 가문에 무슨 일이 생겼느냐?”

노인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조계안이 찾아온 용건을 물었다.

“육씨 가문 넷째 집안이……”

조계안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육씨 가문 넷째 집안의 저택이 북요 황태자 야율융진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 일은 비밀이라고 할 것이 못 되었다. 야율융진은 저택을 손에 넣은 뒤, 기회를 틈타 육씨 가문을 욕보이고, 육장봉을 모욕하려고 할 것이다.

곧 변경 사람들 모두가 육씨 가문의 넷째 집안에서 분배받은 옛 저택을 북요인에게 팔아 버린 일을 알게 될 것이다.

노인은 조계안이 찾아온 용건을 알아낸 뒤, 피식, 비웃었다. 그는 조계안에게 그의 바퀴 의자를 밀게 했다.

“황숙, 이 일은 육장봉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조계안은 육장봉을 아주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노인의 앞에서 육장봉을 위해 해명을 했다.

“그래.”

노인은 대답하고 조계안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조계안은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다. 바로 이때, 노인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말을 하는 걸 참 좋아하니 금나라로 파견 가는 건 어떻겠느냐?”

조계안은 바로 입을 다물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노인과 조계안이 태의서에 도착했을 때, 육장봉은 아직 깨어나기 전이었다.

노인은 시선을 들지도 않고 매정하게 말했다.

“깨우거라.”

“황…….”

조계안은 노인과 육장봉이 아주 심하게 다쳤다고 일깨우려고 했다. 별로 급한 일도 아니니 나중에 다시 오자고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을 열자마자 노인의 차가운 시선에 말문이 막혔다.

조계안은 묵묵히 뒤로 한걸음 물러선 뒤,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그를 탓하면 안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황숙에게 맞으면서 자랐다. 비록 지금 황숙은 그를 이기지 못하지만 어린 시절의 그림자는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도저히 황숙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손불사는 노인을 한동안 치료했던 터라 노인의 성깔을 잘 알고 있었다.

노인은 월령안 앞에서만 사람이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말을 할 것도 없었다.

손불사는 육장봉을 위해 말을 해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송 원정을 재촉했다.

“송 원정, 뭘 하고 있나? 어서 대장군을 깨우지 않고.”

“손 신의, 저는 팔을 움직일 수 없어요.”

송 원정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했다.

일이 있으면 송 원정이고, 없으면 송씨였다. 손 신의의 태도를 바꾸는 기술은 참 대단했다.

‘속세를 벗어난 고수는 다 이런 건가?’

“이 손은 멀쩡하지 않나.”

손불사는 송 원정의 오른쪽 어깨를 툭툭, 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송 원정, 우리 의원들은 너무 여리면 안 돼. 침 두어 개 놓는 일인데 왼손과 오른손이 무슨 다른 점이 있겠어?”

말을 마친 손불사는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육장봉은 방금 전에 쓰러졌다. 그가 한참 동안 집중하여 육장봉에게 침을 놓고 나서야 겨우 육장봉의 고통을 멈출 수 있었다. 이런 때 억지로 깨운다면…….

그가 바꿔 버린 진통제를 생각해 보면 육장봉 온몸의 상처는 억지로 그 고통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깨어나면 육장봉은 무척 고통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의 미움을 사는, 특히 육장봉의 미움을 사는 일을 그는 할 수 없었다.

손불사는 코웃음을 치고 도도하게 팔짱을 끼고 한쪽 옆에 서서 재미있는 구경을 하려고 했다. 바로 그때, 노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령안이가 방금 전에 육장봉을 찾아왔었다던데 무슨 일이 있었나?”

“나한테 묻는 거야?”

손불사는 자신을 가리켰다.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손불사는 노인을 바라보았다가 또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는 둘 중 누가 더 성가시고 밉보일 수 없는지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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