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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92)화 (492/1,004)

492화 버림받은 여인이 아니오

월령안의 억울한 표정을 보지 못했더라면 그는 정말 월령안에게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군.’

“무슨 의미인데요?”

‘최씨 가문의 세력을 움직일 수 있고, 최씨 가문의 보호를 받는 호신용 부적일 뿐이잖아? 이 옥에 또 내가 모르는 다른 의미가 있는 건가?’

육장봉은 마음속의 분노를 억지로 가라앉히고 말했다.

“최씨 가문의 설개연에서 최씨 가문 자제들은 몸에 지니고 다니는 옥패를 마음에 품은 여인에게 선물하는 것으로 청혼의 뜻을 밝히오. 만약 그 여인이 받는다면 혼사를 허락했다는 뜻이오.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함부로 남의 옥패를 받았소? 그것도 모자라 허리춤에 걸고 도처에 자랑하는 것이오?”

‘최일의 그 꿍꿍이는 그저 월령안만 속일 수 있지.’

월령안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군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그건 최씨 가문의 설개연에서나 그렇다고요. 최일이 이 옥패를 저에게 준 것은 단지 임시방편일 뿐이에요. 그리고 제가 무슨 미혼 여인도 아니고요.

최일이 이 옥패를 준 것에 그렇게 많은 의미는 없어요. 대장군, 생각이 과하셨어요. 저 같은 버림받은 여인이 어떻게 최씨 가문을 넘보겠어요. 저와 최일은 단지 협력 관계일 뿐이에요.”

“버림받은 여인이 아니오!”

월령안이 자신을 버림받은 여인이라고 칭하자 육장봉은 바로 부정했다. 육장봉은 시선을 가라앉히더니 월령안을 진중하게 바라보았다.

“월령안, 당신은 버림받은 여인이 아니오.”

‘난 한 번도 당신을 버린 적이 없소.’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며 그 이혼장은 그가 쓴 것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입가까지 올라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무관심해서, 그가 그 일에 큰 신경을 쏟지 않아서 그녀를 크게 상처 입혔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거기에 월령안은 결국 이혼장을 받았고 또 육씨 저택에서 쫓겨났다. 그와 월령안의 혼서도 진작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그 이혼장을 쓴 사람이 그가 맞는지 아닌지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법적으로 이혼장은 반드시 남편이 친필로 써야 한다는 규정이 없었다. 그는 아내를 내치는 일을 묵인했다. 그러니 아내를 내친 것은 바로 육장봉이 한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는 미룰 수 없는 책임이 있었다.

그의 해명은 더없이 무기력했다.

육장봉은 물끄러미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미안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월령안은 잠깐 멍해졌다가 눈을 깜빡이며 웃었다.

“진짜 버림받은 여인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전 다른 사람들이 절 어떻게 보는지 신경 쓰지 않아요.”

월령안은 과거에 집착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몰래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시선에 드리운 씁쓸함을 감췄다. 그녀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손을 내밀고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대장군, 옥패를 저한테 돌려주세요. 제가 최대한 빨리 최일에게 돌려줄게요. 또 최일에게 잘 설명할 거예요.”

“돌려주는 건 할 수 있지만 더 이상 몸에 지니고 다니지는 마시오.”

육장봉은 월령안을 다시 난감하게 굴지 않고 옥패를 돌려주었다.

‘월령안이 직접 최일에게 말해야 최일이 포기를 하지. 아닌가?’

육장봉은 문득 월령안 머리의 장신구가 황제의 선물일 거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풀어졌던 얼굴이 또 차가워졌다. 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앞으로 다른 남자가 선물한 물건을 함부로 몸에 지니고 있지 마시오. 다른 사람들이 쉽게 보겠소!”

“저…….”

‘난 그런 적 없어! 난 그렇게 가볍게 행동한 적이 없단 말야. 남자가 그런 의미로 한 선물을 함부로 받을 리가 없잖아. 최일의 옥패도, 진짜 그런 의미인 줄 알았다면 당연히 거절했겠지! 육장봉은 왜 나를 이렇게 말하는 거지?’

월령안은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녀는 육장봉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육장봉의 불쾌하고 차가운 얼굴을 보자 문득 자기의 몸에 아직 육장봉이 선물한 물건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가까지 올라온 말을 꾹 삼켜 버렸다.

‘육장봉의 말이 틀리지 않았어. 내가 다른 사람들이 쉽게 보게 한 거야. 내가 잘못했네!’

월령안은 몰래 숨을 들이쉬고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앞으로 다가가 옥패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대장군의 말씀이 맞아요.”

육장봉의 표정이 풀리려다 다시 굳었다. 월령안이 곧이어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을 빼서 육장봉에게 줬던 것이다.

“전 다른 사람의 물건을 함부로 받으면 안 되는 거였어요. 이 호각을 대장군께 돌려드릴게요.”

“나한테 돌려주겠다고?”

’월령안, 내 말을 듣지 못했나? 난 ‘다른 남자’라고 말했다.

나는 다른 남자가 아니야. 당신의 남자지!’

“너무 귀중한 물건이라 전 받을 수 없네요.”

육장봉이 받지 않자 월령안은 호각을 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육장봉에게 쉽게 보였다. 그녀는 그렇게 쉬운 여자가 아니었다.

호각을 내려놓은 월령안은 평온한 기색으로 육장봉에게 읍했다.

“대장군께서 부상을 당하셨으니 저는 이만 대장군이 요양하시는 것을 방해하지 않겠어요. 대장군, 푹 쉬세요.”

허리를 꼿꼿하게 편 월령안은 육장봉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떠나갔다.

돌아서는 순간, 월령안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문턱을 넘기 전에, 그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얼룩졌다.

월령안은 줄곧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허리를 곧게 편 채, 숙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아주 괴로웠다.

“월…….”

육장봉은 더없이 화가 났다. 그는 월령안을 불러 세우려고 했으나 눈썰미가 좋게도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보였다.

‘월령안이 울어?’

육장봉은 더 생각하지 않고 침대 위의 호각을 움켜쥔 채, 급히 일어나서 쫓아갔다. 두어 걸음만 걸었는데 월령안이 힘이 풀려 넘어지려는 것을 보았다.

“월령안!”

육장봉은 월령안이 쓰러지려는 순간, 그녀를 안아 올렸다.

그러자 두 눈을 꼭 감은 월령안의 얼굴에 온통 눈물인 것을 보았다.

‘내가 월령안을 화나게 해서 운 건가?’

“손…… 쿨럭쿨럭……불사…….”

육장봉은 입을 열어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몸의 상처를 건드려 다시 격렬한 기침을 했다.

“무, 무슨일입니까?”

손불사와 송 원정은 앞뜰에서 육장봉의 기침 소리를 듣고 앞뒤로 달려왔다.

들어오자마자 육장봉이 월령안을 안은 채, 문턱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둘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손불사의 안색이 변하더니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육장봉, 령안이를 어떻게 한 거야?”

“쓰러졌습니다.”

육장봉은 피를 왈칵, 토하더니 월령안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빨리 그녀를 구해 주십시오. 그녀의 몸이 아주 차갑습니다.”

육월의 날씨였고 태양은 하늘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의 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월령안이 핏기없는 얼굴로 육장봉의 품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손불사는 생각도 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가 월령안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육장봉의 차가운 시선에 놀라서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너, 너 뭘 하는 거야? 령안이를 풀어 줘야 내가 진단을 할 거 아니냐.”

‘육장봉이 내가 몰래 진통제를 황련으로 바꾼 것을 알아 버렸나? 젠장, 조심했는데. 모든 과정에서 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말이야. 그랬는데 대체 어떻게 발견된알아챈 거야?’

“대장군, 그…….”

손불사는 덜덜 떨면서 육장봉에게 해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육장봉이 월령안을 안고 그의 곁을 스쳐지나갔다.

손불사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내가 괜히 제 발이 저려 버렸나?’

손불사는 더 생각을 이어지 못했다. 방 안에서 육장봉의 불만 가득한 재촉이 들렸던 것이다.

“아직도 거기 앉아서 뭘 하시는 겁니까? 얼른 오시지 않고!”

“간다, 가!”

손불사는 다급히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걸어갔다.

송 원정도 월령안이 걱정되었다. 또 그는 산부인과에 능한지라 따라서 들어갔다.

손불사와 송 원정은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다가가려 했으나 월령안의 앞에 육장봉이 서 있어 그럴 수 없었다.

둘은 입을 열지 않고 묵묵히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손짓을 통해 육장봉에게 길을 막았다고 알려 줬다.

육장봉은 잠깐 침묵을 지키더니 굳은 얼굴로 일어나서 옆으로 물러섰다.

“쿨럭…….”

육장봉은 기침을 했다. 그의 얼굴에는 아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지만 바로 가라앉았다.

손불사가 먼저 앞으로 다가갔다. 진찰이 금방 끝났다.

그는 바로 말하지 않고 육장봉을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육장봉은 속으로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는 안색을 흐리더니 엄격하게 외쳤다.

“말하십시오!”

“큰일은 아니야, 다만 화가 나서 쓰러진 것뿐이지.”

손불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이 이렇게 좋은 꼬마 령안을 화가 나 쓰러지게 하다니. 육장봉 참 대단한걸.’

“단지 쓰러진 것뿐이고 다른 지장은 없습니까? 몸이 아주 차갑습니다.”

육장봉의 안색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곧게 선 채로 있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고도 죽어라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어린애 같았다.

“꼬마 령안의 몸이 차가운 것은 이상하지 않아.”

여기까지 말한 손불사는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낙원의 그 일로 령안의 몸이 아주 심하게 상했어. 짧은 시간 안에는 요양을 잘 할 수 없다고. 지금 령안이는 지친 데다가 곧 달거리까지 할 시기라 몸이 평소보다도 허약해. 이런 때에 자네가 화를 돋웠으니 쓰러지기만 한 것도 용한 거야.”

“낙원! 월 삼낭!”

육장봉은 온몸으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빨개져서 매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대장군부 안에서 금방 깨어난 월 삼낭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햇빛이 이렇게 강한데 왜 춥게 느껴지지?’

손불사는 육장봉이 자신한테 화를 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선 뒤에야 그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그래. 바로 그 일이야. 그날 령안이 몸에 냉기가 들어간데다 또 최음제에 당하기까지 했지. 그렇게 큰일을 당했으니 달거리를 할 때, 몸이 차가워 지는 것이 정상……..”

“정상이라고?”

육장봉은 목소리를 깔고 물었다. 그한테서 살기가 느껴졌다.

“온몸이 얼음처럼 차가운데 저한테 지금 이게 정상이라고 말하시는 겁니까?”

손불사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정상이야’라고 말하기만 한다면 육장봉이 당장 그도 ‘정상’으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생존 욕구가 폭발한 손불사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온몸이 차가운 것은 정상이 아니지. 다만…….”

“치료하십시오!”

육장봉은 단호한 자세로 명령을 내렸다.

손불사는 안색이 창백하고 핏기라고는 전혀 없는 월령안을 힐끔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자네보다 훨씬 더 령안이 건강을 걱정하고 있었을 걸세. 하지만 령안이의 이 병은 단시간 안에 치료할 수가 없어. 천천히 요양할 수밖에 없다고. 송 원정이 산부인과에 능하니 못 믿겠으면 송 원정에게 물어보지 그래.”

송 원정은 육장봉과 읍한 뒤, 하는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대장군, 손 신의의 말씀이 맞습니다. 월 낭자의 이 병은 만성병입니다. 천천히 치료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요즘 월 낭자의 몸은 평소보다 더 허약하니 월 낭자에게 절대 과로하지 말라고 전해 주십시오.”

육장봉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차가운 시선으로 손불사와 송 원정을 훑어보았다.

“지금은? 이렇게 온몸이 얼음장 같은데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 기혈을 보충하는 탕약을 먹이고 령안이의 손발을 문질러 기혈이 통하게 해야 해. 달거리가 지난 뒤, 다시 약을 쓰고.”

손불사는 슬픈 얼굴로 월령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먼젓번에 명월 산장에 있을 때, 난 분명 령안에게 약을 지어 줬댔어. 적어도 석 달은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 령안이의 상태를 보니 약을 끊은 게 분명해. 어휴, 얘는 정말 사람 속을 썩인다니까. 몸도 안 좋으면서 그렇게 바삐 보내니 몸이 어떻게 남아나겠어?”

손불사는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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