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화 지금 강매하시는 건가요?
태의서.
황제는 월령안을 육장봉이 요양하고 있는 병실에 데려다주고 월령안더러 육장봉을 보살피라고 두어 마디 당부한 뒤, 떠나갔다.
가기 전에 손불사와 송 원정도 데리고 갔다. 방 안에는 육장봉과 월령안 둘만 남게 되었다.
순간, 월령안은 육장봉과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의 병세가 어떤지 물을까?’
물을 만한 것은 황제가 다 물었다. 그녀가 다시 묻는다면 좀 멍청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해? 육장봉과 서로 멀뚱하게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나? 육장봉은 아직 환자인데 내가 여기에 오래 앉아 있으면 그가 요양하는 데 지장이 가는 거 아닐까?’
월령안은 고개를 들고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메말라 갈라진 것을 보니 황제가 떠나기 전에 그녀더러 육장봉을 잘 보살피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대장군, 물을 마실래요?”
“좋소.”
육장봉은 시선을 내리깔았고 표정은 차가웠다. 얼굴에는 전혀 감정이 없었다. 감정 기복도 전혀 없었다.
월령안은 육장봉이 기쁜지 아닌지 감이 잡히지 않아 조심스럽게 물을 한잔 따랐다. 물 온도가 적당한 것을 확인하고 육장봉의 앞으로 가져갔다.
“대장군.”
“손을 다쳐서 들지 못하오.”
육장봉은 침대 머리맡에 앉아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는 양쪽으로 늘어뜨린 손을 몰래 이불 안으로 숨겼다.
월령안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는 육장봉이 손을 숨기는 모습을 전부 보았기 때문이었다.
월령안은 잔을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육장봉이 재촉했다.
“물!”
“대장군, 제가 내관을 불러와서 시중을 들게 하겠습니다.”
월령안이 한걸음 물러선 뒤, 물을 탁자에 두고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다.
육장봉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소!”
‘육장봉이 일부러 나를 난감하게 할 줄 알았어.’
월령안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육장봉의 옆으로 갔다.
“그럼 저는 대장군이 요양하시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 이만…….”
월령안이 말을 마치기 전에 육장봉이 그녀의 말을 잘랐다.
“궁중의 금지령이 아직도 안 풀렸소?”
월령안과 황제가 함께 나타난 것을 보자 육장봉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지금 궁의 질서가 너무 엄격하여 그녀가 그를 보러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월령안이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렀기에 폐하께서 그녀를 태의서에 데리고 오셨을까? 아침에 약을 보내온 것도 많은 심혈을 기울였던 거야.’
육장봉은 마음이 시큰해졌다.
‘조계안의 말이 틀리지 않아. 내 욕심이 과했군. 월령안은 궁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했을 텐데, 나에게 약을 보내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정을 해서 약을 태의서에 보내왔을까? 하지만 나는 월령안이 직접 오지 않았다고 탓하기나 했구나.’
“풀리지 않았어요.”
그녀가 알기로는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황제가 준 영패가 있어 제한을 거의 받지 않았다.
“멀뚱히 서 있지 말고 편히 앉으시오.”
육장봉의 차갑게 굳어 있던 입꼬리가 참지 못하고 위로 올라갔다.
그는 월령안이 어려운 와중에 갖은 방법을 써서 그를 만나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월령안이 안쓰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기뻤다.
그는 월령안이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여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 궁에서 묵는 게 불편하지는 않소?”
육장봉의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부드러워졌다.
“숙 태비께서는 아주 좋으신 분이에요.”
월령안은 묵묵히 자리에 앉았다.
황제가 그녀더러 육장봉을 보살피라고 했다. 그녀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는지 당부했다.
“궁의 사람들은 선한 사람을 괴롭히고 악한 사람을 무서워한다오. 또 만만한 사람을 괴롭히고 강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당신이 궁에서 일이 생기면 절대 억울함을 참지 마시오. 눈치 없는 사람을 만나면 체면을 굽힐 필요가 없소. 해결하지 못하겠으면 이…… 쿨럭쿨럭…….”
육장봉이 갑자기 기침을 했다. 월령안을 놀라게 하지 않으려고 육장봉은 손으로 입술을 막고 기침 소리를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하지만 별로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기침이 더욱 심해졌다.
‘손이 다쳐서 못 든다고 하지 않았어?’
월령안의 시선이 육장봉의 ‘들 수 없는’ 손에 떨어졌다. 한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잊었다.
육장봉의 기침이 점점 더 심해졌다. 마치 폐라도 튀어나올 듯이 심했다.
월령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그녀는 육장봉이 계속 기침을 하는 것을 두고 볼 수가 없어 탁자 위의 잔을 들고 육장봉의 앞으로 가져갔다. 육장봉을 대신해 등을 두드리며 그가 전처럼 심하게 기침을 하지 않자 잔을 건네주었다.
“대장군, 물을 드세요.”
“손이 아파서 움직이지 못하오.”
격렬한 기침으로 인해 육장봉의 얼굴에는 정상적이지 않은 홍조가 드리웠다. 두 눈에도 물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월령안의 팔에 몸을 기대고 입술에 댔던 손을 내려놓았다. 목소리는 눈에 띄게 허약해져 있었다. 얼굴에 마치 ‘가련, 연약’ 네 글자를 써 놓은 듯했다.
월령안은 정말로 어이가 없어져서 말문이 막혔다.
‘손을 그리도 높게 들었었는데 뭐? 속는 척이라도 할 수 있게 연기를 잘 하던가. 왜 이렇게 뻔뻔해? 욕심이 참 대단하기도 하지!’
월령안은 방금 전에 육장봉의 등을 다독여 숨을 고르게 한 것을 후회했다. 그가 기침을 하다 죽게 내버려 둬야 했었다.
월령안은 손을 거두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제가 가서…….”
“괜찮소, 내가 직접 마시겠소.”
육장봉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월령안이 손을 거두려고 하자 갑자기 월령안의 팔을 꽉 잡았다. 그리고 월령안의 손을 잡은 채로 잔에 든 물을 다 마셨다.
조계안이 욕한 것이 맞았다. 그는 욕심이 많아 항상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가 다친 것을 알고 월령안이 찾아온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월령안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육장봉이 물을 전부 마시고 난 뒤였다. 그리고 아주 신사적으로 월령안의 손을 풀어 줬다.
“됐소.”
월령안은 손에 든 잔을 보고, 또 육장봉을 바라보다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장군, 우리 얘기 좀 하죠.”
‘이렇게 지내다가는 난 육장봉에게 시달려 미쳐 버릴 거야.’
“그래, 청하현의 그 사사들에 대해 얘기를 좀 해야 하는군.”
육장봉은 물을 마시고 난 뒤, 입술이 적잖게 촉촉해졌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대 머리맡에 기대어 앉았다.
“먼저 우리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얘기를 해요. 청하현의 그 사사들에 관한 일은 급하지 않아요.”
월령안은 청하현의 일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수횡천의 소식을 받지 못했지만 그녀는 이미 수횡천의 행방에 대해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육장봉과 그들 둘 사이의 일을 정확하게 매듭짓고 싶었다.
월령안은 손에 든 빈 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육장봉에게 읍을 했다.
“대장군, 죄송합니다. 옛날에는 제가 철없이 대장군을 번거롭게 해 드렸습니다. 대장군의 용서를 바라지 않겠습니다. 다만 대장군께서는 대인의 너그러움으로 저와 따지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예전에 저도 대장군의 뜻을 신경 쓰지 않고 억지로 시집을 갔었지만, 대장군께서도 저에게 미리 언질 없이 저를 내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주고받은 것입니다. 이제는 서로 빚이…….”
육장봉은 차가운 말로 월령안의 말을 잘랐다.
“그 사사들은 어디 있소? 나에게 그 일을 해명해 줘야지 않겠소?’
‘서로 빚진 게 없다고? 월령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날 건드리고는 돌아서서 떠나려고 하는군.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다고.’
육장봉에게 거친 방법으로 말이 잘린 월령안은 더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몰래 숨을 들이쉬는 것으로 감정을 가다듬었다.
“대장군, 저는 곧 청주로 가야 해요. 앞으로 십 년 동안, 저는 혼인에 관한 일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십 년 뒤에는…….”
육장봉은 월령안의 말을 또 잘랐다.
“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지 말고 직접 나에게 말하시오. 수횡천 그 인간은 무공도 별로일 뿐만 아니라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소. 이번에 내가 마침 청하현을 지나고 있지 않았다면 그가 당신의 일을 망쳤을 것이오. 알겠소?”
여러 번 육장봉에게 말이 잘리자, 간신히 가다듬었던 기분이 전부 망쳐졌다. 월령안은 순간 참지 못하고 화가 나 육장봉에게 따졌다.
“육장봉, 내 얘기를 끝까지 좀 들으면 안 돼요?”
“당신이 말했던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요!”
육장봉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월령안의 말을 잘랐다. 그의 어조에는 강경함과 난폭함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이건 당신이 생각할 문제가 아니오. 내가 생각할 문제지! 월령안, 당신은 그저 나의 연심을 마음껏 누리기만 하면 되오. 다른 일들은…… 내가 아직 죽지 않았으니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소.”
월령안은 잠깐 멍해졌다가 시선을 내리깔고 눈에 드리운 씁쓸함을 감췄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이제 당신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녀는 항상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삼 년 전, 나도 당신을 좋아하지 않았소. 하지만 내가 당신을 막은 적이 있소?”
‘좋아하지 않기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월령안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자 육장봉은 마음이 아프면서도 또 은근히 기뻤다.
‘봐, 월령안은 나 때문에만 눈물을 흘리잖아.’
월령안은 제자리에 굳어졌다. 방 안은 고요한 정적만 흘렀다.
한참 지나서야 월령안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평온함뿐이었다.
“전 최대한 빨리 청주로 갈 거예요.”
건드릴 수 없다면 피하면 그만이었다.
“겁이 많군.”
육장봉이 가볍게 웃었다. 월령안이 말을 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또 덤덤하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수횡천이 어찌 되었는지 묻지 않소?”
“아마도 대장군보다는 많이 다쳤겠죠.”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이 조금 씁쓸해졌다.
‘오늘 육장봉은 조금 이상하네. 항상 내 한계를 밟고 서서 매번 나를 극한으로 몰고 가다가 또 갑자기 풀어 주고.’
이렇게 자유롭게 분위기를 조절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그녀는 조금 창피해졌다.
그녀는 육장봉을 멀리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육장봉에게 놀아나다가 죽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걱정되지 않소?”
육장봉이 또 물었다.
월령안은 고개를 저었다.
“수 오라버니는 영리한 사람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는 책임감이 강한 무림맹주죠. 무림맹이 그의 손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한테 있는 것보다 조정과, 당신에게는 더욱 안심되는 일일 거예요.”
그녀도 육장봉에게서는 손해밖에 더 보지 못했다. 수 오라버니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육장봉을 만났다면 수 오라버니는 분명 손해를 보았겠지만 절대 생명이 위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 그녀는 더없이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이 틀렸소! 무림맹주가 누구든, 그건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소. 무림맹주가 수횡천이든, 토횡천이든, 누구든 내 앞에서는 얻어맞기밖에 더 하겠소?
내가 수횡천을 풀어 준 것은 그가 무림맹주라서가 아니고, 무림맹에 그가 필요해서도 아니오. 당신 때문이오! 당신이 그를 오라버니라고 부르기에 그의 목숨을 살려 준 것이오. 월령안, 당신은 나한테 목숨 하나를 빚졌소.”
육장봉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을 압박하는 분위기가 다분했다.
“대장군, 지금 강매하시는 건가요?”
월령안은 곧 표정을 유지하기 힘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