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489)화 (489/1,004)

489화 남녀 사이가 다 그런 거지

대황자를 가엾게 여기십시오!

대황자를 위해 덕을 쌓아 주십시오!

‘지금 나에게 강요를 하고 있는 건가!’

태후는 의자에 앉아 황제와 숙 태비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려 월령안을 보았다.

후궁에서 수십 년 동안 갖은 일들을 겪었지만 지금처럼 갑갑한 적은 없었다.

이 사람들은 분명 하나같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지만 태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조금의 불만도 가질 수 없었다.

여기서 불만을 표하면 그녀만 자애롭지 못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었다. 관리들에게 탄핵을 당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황제와도 서먹해질 것이다.

‘독하다! 아주 독하구나, 월령안! 모두 월령안의 잘못이다!’

그 순간 태후는 당장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 월령안의 따귀를 내려치고 싶었다.

그녀에게 이곳이 누구의 궁인지, 이곳에서 그녀와 태후 사이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가르쳐 줘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하지만 월령안의 옆에 꿇어앉은 황제를 보고, 또 궁전 밖의 금군을 보자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지금 월령안의 편이었다.

후궁에 있는 여인들의 권리는 결국 모두 황제에 의해 결정된다. 태후처럼 귀한 신분이어도 황제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녀는 월령안과 함께 주청을 하는 황제를 보자 그제서야 분명히 알게 된 것이다. 나이 든 궁녀와 내관을 궁 밖으로 내보내고 싶은 사람은 월령안이 아니라 황제였다.

월령안은 단지 황제의 손에 들린 칼이었다. 그녀는 황제를 위해 적진에 뛰어들고 앞으로 돌진했던 것 뿐이었다.

이치에 맞기만 한다면 황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당연히 태후라고 할지라도 막을 수 없었다.

태후는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했다. 그녀는 시선을 거두고 겨우 입을 열었다.

“폐하, 일어나세요.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제가 혁이의 할미로서 혁이를 위해 덕을 쌓는 일에 몸소 본보기를 보여야 했어요. 내 궁에서 궁 상궁을 제외하고 나이가 찬 모든 자들을 전부 내보내겠습니다.”

“어마 마마께서 혁이를 가엾게 여겨 주시니 마음이 한결 가볍습니다. 혁이도 고마워할 겁니다.”

태후가 타협하자 황제는 그런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도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태후를 모질게 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이 정도가 딱 좋았다.

황제는 속으로 태후의 양보에 감격하면서 정중하게 태후를 향해 절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렸다.

가장 큰 어른인 태후가 첫 발을 디뎠는데 후궁의 여인 중 누가 감히 안 된다고 하겠는가?

이 일은 이미 구 할은 해결된 것이었다.

‘월령안은 역시 좋은 칼이야. 기회를 잡는 데도 능하고 그 기회를 이용하는 솜씨도 기가 막히는군.’

이런 사람은 상업계가 아니라 벼슬자리에서도 순풍에 돛 단 듯, 순조롭게 일을 해낼 것이다.

태후는 피곤한 얼굴로 궁 상궁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나는 피곤하니 자네들은 모두 돌아가게.”

황제는 일어서서 태후의 약간 굽은 허리와 비틀거리는 발걸음을 보자 마음속에 죄책감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내가 어마 마마 옆의 오래된 심복들마저 봐주지 않았군. 참 불효하는 것 같아.’

하지만 그 순간, 월령안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폐하, 유씨 가문에 마침 적령기에 들어선 여식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황제는 미간을 찌푸리고 월령안을 힐끗 흘겨보았다.

월령안은 시선을 내리깔고 공손하게 말했다.

“폐하, 황후의 자리가 비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잠깐 멍해졌다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는 참 멀리까지도 생각하는구나!”

그도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아직 황후를 폐위하지도 않았는데 이자들이 내 황후 자리까지 넘보고 있었단 말인가? 욕심이 끝도 없구나!’

월령안은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생각하지 않고,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고 이미 생긴 일이 없던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황제가 모르는 사이 선황의 후궁들의 가문과, 또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 싶은 가문들은 모두 암암리에 황후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그녀가 어떻게 감히 태후가 타협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압박했겠는가?

그녀는 태후가 친정 조카를 황후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게 하기 위해서 이번 만큼은 황제의 화를 돋우지 않고 반드시 타협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황제는 월령안을 흘겨보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입구까지 걸어간 뒤에야 월령안이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고개를 돌려 보자 월령안이 제자리에서 허리를 살짝 굽힌 채, 그를 배웅하고 있었다.

‘가식을 잘도 떠는구먼.’

황제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얼른 따라오지 않고.”

월령안은 황제가 그녀를 부른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숙 태비가 그녀를 일깨워 주었다.

“령안, 폐하께서 널 부르신다.”

“네?”

월령안은 멍한 얼굴을 했다.

‘폐하께서 갑자기 나를 데리고 어딜 가시려는 거지?’

“얼른 가거라. 폐하를 오래 기다리시게 하지 말고.”

숙 태비는 월령안의 등을 떠밀었다.

월령안은 앞으로 두어 걸음 내디뎠다가 숙 태비가 마음에 걸렸다.

“그럼 마마께서는…….”

“앞으로의 일은 네가 상관하지 말거라. 그래도 내가 이 나라의 태비다. 이 후궁에서 태후 말고는 날 건드릴 사람이 없단다.”

숙 태비의 온화하던 시선에 순간,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월령안은 잠깐 멍해졌다가 바로 환한 웃음을 지었다.

‘태비 마마께서 아주 정정하시구나. 난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월령안은 빠른 걸음으로 황제를 따라잡았다. 황제는 이미 기다리다가 인내심이 거의 다한 상태였다. 월령안이 뛰다시피 달려오자 그제서야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입으로는 여전히 까칠하게 말했다.

“꾸물거리기는.”

월령안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를 직접 부르지도 않았는데 고개 숙이고 있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채? 갑갑해 죽겠네!’

그녀도 태후처럼 갑갑해졌다.

황제는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발걸음을 아주 크게 뗐다. 황제는 문득 월령안이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까칠하게 말했다.

“어서 오너라. 짐을 얼마나 더 기다리게 할 셈이냐?”

하지만 몸을 돌리자, 월령안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이 보였다.

“너…….”

황제는 민망하여 화를 내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월령안이 무릎을 꿇고 숨이 가쁘게 말했다.

“폐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소인은 이미 최선을 다해 빨리 걷고 있었습니다.”

“됐다, 따라오너라.”

월령안의 볼품없는 모습을 보자 황제도 그녀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후 황제는 일부러 속도를 늦춰 월령안이 따라올 수 있게 걸었다.

이반반은 옆에 서서 일련의 일들을 모두 지켜보고는 저도 모르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월령안이 황제의 후궁에 있는 게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월령안이 황제의 여인이었다면 후궁의 그 여인들은 물론이고, 황제도 월령안에게 쩔쩔맸을 것이다.

황제는 아마 자신이 월령안이 달래는 말 한마디에 노기가 금세 가라앉았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월 가주는 역시 듣던 대로군.’

이반반은 월령안을 바라보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때 월령안이 그에게 달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을 휘며 짓는 그 미소에는 속셈이라고는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 순수한 미소를 마주하자 이반반도 저도 모르게 따라서 미소 짓게 되었다.

이반반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소가 얼굴에 굳어진 채로, 그는 순간 계속해서 웃을지 아니면 웃음을 거둘지 고민했다.

한참 지나서야 이반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됐다, 됐어. 대장군과 조왕이 계시는데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이반반은 마음속의 걱정을 지우고 편한 마음으로 황제의 옆을 따랐다. 하지만 가다 보니 이상함을 발견했다.

‘폐하께서는 월령안을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거지? 이 길은 태의서로 가는 방향인데?

폐하께서 혹시 월령안을 육 대장군께 데려가려는 건가? 월 가주가 대장군이 다쳤다는 말을 듣고도 하인을 시켜 약재만 보낸 것을 이미 충분히 들어 알고 계실 터인데?’

이반반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지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는 묵묵히 황제와 월령안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일행은 곧 태의서에 도착했다. 황제는 그녀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들어갔다.

월령안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결국 태의서의 현판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결국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황제는 태의서에서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육장봉을 잠깐 보고, 육장봉과 두어 마디 한담을 나눈 뒤, 월령안을 남겨 두고 떠나 버렸다.

이반반은 줄곧 황제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황제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난각으로 돌아가서야 이반반은 마음속의 의아함을 꺼냈다.

“폐하, 대장군과 낭자를 맺어 주시려는 겁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짐이 그들을 맺어 줘서 뭘 하겠느냐?”

최근 걱정이었던 후궁의 첩자들을 해결하자 황제의 기분은 퍽 좋아졌다. 그는 이반반이 들고 온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젯밤 특별히 월령안에게 육 대장군이 다쳤다는 얘기를 전하라고 하셔 놓고, 이게 맺어 주는 게 아니면 뭐가 맺어 주는 거라는 말이지?’

“짐은 줄곧 과오가 있다면 벌하고, 공로가 있다면 상을 내렸다. 월령안이 일을 잘하니 짐이 그녀를 데리고 장봉을 만나러 간 것은 그녀에게 상을 내린 것이다.”

황제는 기분이 좋은지 말투에도 홀가분함이 묻어났다.

“짐은 그녀가 일만 잘한다면 짐이 그녀를 섭섭하지 않게 대하겠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이반반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건 월령안에게 내리시는 상이 맞나? 육 대장군에게 내리시는 상이 아니고? 월령안은 어젯밤에 육 대장군이 다쳤다는 말을 듣고 약을 보낸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황제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찻잔을 내려놓게 이반반에게 일깨워 주었다.

“조금 있다 잊지 말고 금군과 말하거라. 월령안이 자유롭게 태의서를 드나들도록 짐이 허락했다고.”

이반반은 입가가 떨렸지만 다급히 응했다.

‘설마 폐하께서는 월령안이 직접 대장군을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이 궁중 금지령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내가 어떻게 폐하께 알려 드려야 하지? 월령안이 육 대장군을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은 갈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가기가 싫어서인 것을.’

이반반은 가슴이 답답해져서 잠시 생각하다가 그래도 한마디 일깨웠다.

“폐하, 대장군과 월 낭자가 이토록 가깝게 지내도록 하셔도 되겠습니까?”

“안 될 거야 없지.”

황제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지며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장봉이 지금은 월령안에게 한창 빠져 있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 짐이 그들을 가로막거나 떼어 놓으려 한다면 장봉이 월령안에 더욱 집착할 것이야.”

황제는 얼굴을 살짝 움직여 눈에 드리운 섬뜩한 눈빛을 감췄다.

“남자는 얻을 수 없는 여인에 대해 유달리 집착하는 것이란다. 장봉이 월령안을 좋아하니 그럼 그더러 가지라고 하거라. 가지고 난다면 아끼지 않을 것이다.”

이반반은 숨을 들이쉬고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폐하, 영명하십니다!”

그는 줄곧 황제가 사랑에 대해 모르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보니, 모르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이게 무슨 영명이라고 할 게 있느냐? 남녀 사이가 다 그런 거지.”

황제는 눈을 뜨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장봉과 월령안의 일은 그들의 뜻대로 두거라. 그들에게 관여할 필요가 없다. 어차피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이가 든 내관과 궁녀를 내보내 대황자를 위해 덕을 쌓는다는 건의는 아주 좋더구나. 네가 가서 흠천감과 상의해서 흠천감에게 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라고 하거라. 사람들에게 약점이 잡히지 않게.”

“네, 폐하.”

이반반의 안색이 살짝 굳어지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깔고 대답했다.

월령안이 시작한 일을 그가 잘 마무리하지 못한다면 창피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