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황 (488)화 (488/1,004)

488화 대황자를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이반반은 급히 난각으로 돌아왔다. 황제는 난각에서 공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반반은 발걸음 소리를 낮추고 황제의 옆으로 걸어가 낮은 소리로 보고했다.

“팍!”

황제는 손에 든 상주서를 힘껏 책상 위로 던지고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하나같이 짐을 골치 아프게 하는구나!”

이반반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후에게 일이 생긴 뒤, 황제는 태후를 건너뛰고 공무를 숙 태비의 손에 넘겼다. 태후가 지금까지 참은 것도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가자.”

황제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비록 불만이 가득했지만 그래도 화를 꾹 참고 후궁으로 걸어갔다.

태후의 분노는 월령안이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는 오래 지체했다가는 숙 태비와 월령안에게 일이 생길까 걱정되어 발걸음을 아주 크게 뗐다. 이반반은 뛰다시피 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앞에서 쉬지 않고 걸어가는 황제를 보면서 이반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월령안을 걱정하시는 건가? 폐하께서 그녀를 걱정하는 것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셔야 할 텐데. 그러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이반반은 다급히 시선을 거두고 마음속의 추측을 억눌렀다.

‘이 일은 절대 깨달으셔선 안 돼!’

일각 뒤, 황제와 이반반은 태후의 궁전 밖에 도착했다. 들어가려는 순간, 황제는 갑자기 이상함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췄다.

“길에 왜 궁인이 하나도 없느냐? 내관은? 금군은?”

이반반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숨을 들이쉬었다.

“소인이 가서 물어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황제는 이반반을 가로막았다.

“들어가자.”

바로 이때, 궁전 안에서 갑자기 태후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지금 반역하는 것이냐? 월령안!”

떼었던 황제의 발걸음이 다시 멈췄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보아 하니, 짐이 오지 말았어야 했구나.”

‘태후가 체면도 신경 쓰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정도라면 보통 화가 난 게 아니로군. 월령안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황제는 이마를 탁, 치며 온 것을 후회했다.

‘아무 일도 없는 척 돌아가야겠군.’

황제는 곧 생각을 행동에 옮겼다.

황제는 몸을 돌려 떠나면서 이반반에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함구하거라. 태후께서 내가 왔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라.”

“네…….”

이반반이 응하려고 하는 순간, 태후의 궁전에서 또 분노에 찬 태후의 고함이 들렸다.

“가서 폐하를 모셔오거라. 누가 너희들더러 감히 내 앞에서 방자하게 굴게 했는지 봐야겠다!”

태후의 목소리는 아주 컸다. 황제와 이반반은 궁 밖에서 태후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밖에 듣지 못했다. 월령안과 숙 태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반반은 황제를 보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가실 겁니까?”

“돌아가야겠구나.”

황제는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표정을 하고 태후의 궁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마터면 달려 나오는 내관과 부딪힐 뻔했다.

“일을 어떻게 하는 것이냐?”

이반반은 눈치 빠르게 앞으로 다가가 내관을 발로 찼다.

내관은 온 사람이 누군지 보고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급히 옆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폐, 폐하…….”

황제는 굳은 얼굴로 내관의 옆을 지나갔다.

궁전 앞의 작은 정원을 가로지르자 황제는 궁녀들과 내관, 금군들이 전부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본채의 입구를 막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뭘 하려는 것이지?’

황제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황제 폐하 납시오!”

이반반은 높게 소리를 질렀다. 궁전에 있던 내관과 궁녀, 그리고 금군들도 눈치가 빠르게 가장 먼저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그리고 길을 냈다.

황제는 아무 말 없이 그대로 지나쳐 굳은 얼굴로 궁전에 들어섰다. 황제가 일어나라 말하지 않으니 궁인들은 무릎 꿇은 채로 그저 고개만 숙였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궁전에 발을 들인 황제는 태후가 창백한 얼굴로 상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옆에 있는 상궁은 쉬지 않고 태후의 가슴팍을 두드려 주며 태후가 숨을 고르게 했다.

“폐하!”

월령안이 머리가 산발이 되고 옷차림이 흐트러진 숙 태비를 부축한 채, 서 있었다. 둘은 평온한 얼굴로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힘든 기색이 역력한 숙 태비가 입을 열기도 전에 태후가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폐하, 드디어 오셨군요. 계속 오지 않으셨다면 제가 이 두 고얀 것들에게 당해 화가 나 죽을 뻔했어요!”

“숙 모비(母妃)께서는 예를 올리실 필요 없습니다. 숙 모비, 먼저 앉으세요.”

황제는 숙 태비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월령안더러 숙 태비를 부축해 옆에 앉으라고 눈치를 줬다.

“폐하, 감사합니다.”

숙 태비는 눈시울을 붉히면서도 애써 평온함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녀는 입을 달싹이며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말이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어떻게 해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순하고 고분고분한 숙 태비.

가면을 오래 쓰고 있다 보면 벗는 방법을 잊게 되는 법이다.

바로 지금처럼, 그녀도 태후처럼 고자질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숙 태비는 고통스럽게 눈을 감고 자신의 무능함을 탓했다.

월령안은 숙 태비의 손등을 다독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비 마마, 우리 먼저 앉아요.”

숙 태비는 기댈 곳이라도 찾은 듯,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월령안의 부축을 받으며 한쪽 옆에 앉았다.

황제는 그러한 부분까지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태후에게 예를 올렸다.

“어마 마마, 화를 가라앉히십시오. 숙 모비께서 어떤 일로 어마 마마의 기분을 상하게 하셨는지요?”

“폐하께서 직접 물으시지요.”

태후는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고 황제를 보지 않았다.

황제는 하는 수 없이 숙 태비와 물었다.

“숙 모비?”

숙 태비는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제가…… 실수로 선황이 태후 마마께 남긴 유품을 깨뜨렸습니다.”

분명 태후가 계략을 꾸며 그녀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실수한 것은 사실이었고 선황의 유품이 그녀의 손에서 망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어마 마마, 숙 모비께서도 일부러 그러신 것이 아닐 테니 어마 마마께서 화를 가라앉혀 주십시오.”

황제는 마음속의 짜증을 억지로 누르며 부드러운 어조로 태후와 말했다.

그는 후궁의 일을 잘 관리할 줄 몰랐다. 하지만 그도 장님, 귀머거리가 아니니 후궁 여인의 계략과 경쟁 등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도 많이 보았다.

태후가 숙 태비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의 부황이 남긴 물건을 미끼로 썼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그는 태후의 편에 설 수 없었다.

“벌하고 싶어도 내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폐하께서 직접 그녀와 월령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물으시지요. 나는 내 궁전의 노비조차 부릴 수 없으니 살아 있은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태비 하나와 여 상인 하나가 내 궁에서 위엄을 부리니 태후의 이 자리도 그녀들더러 가지라고 하시지요!”

태후는 자기가 한 말을 누구도 듣지 않던 것이 떠오르자 화가 나 어쩔 줄 몰랐다.

태후는 월령안도, 숙 태비도 싫었다. 또 황제도 너무 미웠다.

황제가 미운 것은 그녀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건너뛰고 공무를 숙 태비에게 맡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궁의 내관, 궁녀들은 하나같이 주인도 못 알아보고 그녀의 말은 하나도 듣지 않았다.

“월령안, 네가 말해 보거라. 어떻게 된 일이냐?”

황제는 참지 못하고 태양혈을 눌렀다. 머리가 조금 아팠다.

그는 정말 궁의 이런 여인들이 너무나 싫었다. 조금만 일이 생겨도 울고불고 통곡했다.

‘그녀들은 자기가 울면 얼마나 보기 싫은지, 소리를 지르면 얼마나 듣기 싫은지 모르는 건가?’

“폐하, 이 일은…….”

숙 태비는 황제의 화가 월령안에게 옮겨붙으려는 것을 보고 바로 일어섰다. 그녀는 자신이 뒤집어쓰려고 했다. 하지만 월령안은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한걸음 먼저 다가가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폐하께 아룁니다. 숙 태비 마마께서는 대황자를 위해 덕을 쌓으시려고 궁전의 스물다섯 살 된 궁녀와 마흔 살이 된 내관을 내보내셨습니다.”

황제는 눈앞이 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옆에 늘어뜨렸던 손도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후궁에 숨어든 간첩을 척결할 좋은 기회다! 월령안, 이 칼은 역시 아주 쓸 만하군!’

“태후 마마께서는 대황자의 할머니시니 숙 태비께서는 태후 마마께서 대황자를 가엾게 여기셔서 앞장서서 곁의 궁녀와 내관을 내보내실 줄 아셨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말한 월령안은 무겁게 한숨을 내쉬고 몰래 태후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 시선은 아주 의미심장했다.

태후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

‘월령안 이 고얀 것이 감히 내 앞에서 나를 헐뜯는구나!’

“궁(宫) 상궁…….”

태후는 직접 여 상인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았는지 옆의 상궁에게 눈치를 줬다.

궁 상궁은 명령을 듣고 허리를 펴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월씨, 폐하 앞에서 거짓을 고할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너는 전에 이렇게 말하지 않았잖느냐!”

“소인이 전에 어떻게 말씀드렸는데요?”

월령안은 비굴하지 않게 궁 상궁에게 예를 올렸다.

“상궁께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너는 전에 대황자께 덕을 쌓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지 않았잖느냐.”

궁 상궁은 분노에 차서 말했다.

“궁 상궁, 소인이 궁전에 들어선 뒤, 나이가 찬 궁녀와 내관을 궁 밖으로 내보내겠다고만 말씀드렸는데 상궁께서 소인을 때리고 죽이겠다고 소리를 지르셨죠. 소인이 말씀드리지 못한 건가요 아니면 상궁께서 소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으신 건가요?”

월령안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너…….”

궁 상궁은 월령안을 손가락질하며 분을 이기지 못하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궁에서 오랫동안 생활했던 그녀가 조그마한 여 상인에게 당해 버린 것이었다.

‘이 어린 여 상인이 아까 금군을 데리고 들어와 일부러 우리 화를 돋운 것이 바로 이것을 노린 건가?’

월령안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황제를 힐끔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로 말했다.

“궁 상궁, 태후 마마께서 옆의 오래된 측근들을 쓰시는 데 익숙하시니 새 사람들에게 시중을 받으시기 불편하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이번 한 번만 대황자를 위해 덕을 쌓아 주십시오. 태후 마마, 대황자를 가엾게 여겨 주십시오.”

황제는 잠깐 멍해졌다. 갑자기 정신이 들자 그도 무릎을 꿇고 월령안의 자세를 따라하며 슬픈 기색으로 말했다.

“어마 마마, 혁이가 요절하여 소자의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어마 마마께서 혁이를 가엾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숙 태비 또한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녀도 당장에 따라 무릎을 꿇고 태후더러 사람을 풀어 주는 것으로 대황자를 위해 덕을 쌓으라고 청했다.

태후는 상석에 앉은 채,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