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화 네 뒤에는 내가 있단다
“령안?”
숙 태비는 문 입구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지만 월령안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녀를 불렀다.
월령안은 정신이 번쩍, 들어 다급히 일어나 숙 태비에게 예를 올렸다.
“태비 마마, 제가 다른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마마께 용서를 구합니다.”
숙 태비는 고개를 젓고 월령안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인의 말을 들으니 이반반이 왔더구나.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을 보니 무슨 일이 생겼나 했다.”
“이반반께서 저한테…….”
이반반이 당부하지 않았다 해도 월령안은 육장봉이 다친 일을 절대 다른 곳에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북요인이 아직 변경에 머무를 때는 말이다.
그녀는 일부러 말을 늘이며 둘러댈 말을 고민할 시간을 벌었다. 숙 태비의 주목을 받으며 그녀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대답했다.
“조왕 전하께서 독에 당하셨답니다. 지금 태의서에서 요양 중이시랍니다.”
조왕이 독에 당한 일도 비밀에 속했다. 하지만 조왕은 이미 괜찮아졌다. 궁의 사람들도 일부는 그 소식을 들었다. 궁 밖의 사람만 모를 뿐이었다.
월령안의 말투는 자연스러웠고 얼굴의 표정도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숙 태비는 의심하지 않고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이반반은 네가 조왕을 보러 갔으면 하는 것이냐? 넌 가기 싫고?”
월령안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가고 싶은 건 아니에요.”
이반반이 방금 전에 한 그 말이 무슨 깊은 뜻을 담고 있는지 그녀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반반은 떠나기 전에 특별히 한마디 덧붙였다. 육장봉이 지금도 태의서에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숙 태비는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월령안이 보던 창밖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탄했다.
“내가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때는 태후께서도 아직 황후셨었지. 그녀가 나에게 말하더구나. 이 궁에는 거짓이 없는 사람은 살아갈 수가 없다고. 자의든 타의든 결국 가면을 쓸 줄 알아야 이 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이야.
난 내가 자의로 가면을 쓴 것인지 아니면 타의로 쓰게 된 것인지 모르겠단다. 내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난 이 궁에서 다투지도, 빼앗지도 않고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숙비가 되어 있더구나. 나중에는 숙 태비가 되었지.”
숙 태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한숨을 들이쉬었지만 여전히 웃고 있었다.
“내 이 평생, 유일하게 내가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밖에 없단다. 난 화려하고 떠들썩했던 다른 비들보다 더 오래 살고 있지.
하지만 난 지금까지 살았어도 알 수가 없단다. 도대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무미건조하게 그저 살아만 있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진정한 나로 한번 살아 보는 것이 좋은지 말이다.”
숙 태비는 몸을 일으켜 꽃병에서 분홍색 모란을 한 송이 빼냈다. 그리고 탁자를 돌아 월령안의 옆으로 와서 분홍색 모란을 월령안의 머리에 꽂아 넣었다.
“그래, 난 반평생 살았지만 아직도 그걸 모르겠어. 그래서 난 너한테 조언해 줄 수가 없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조언을 하겠니. 다만 무엇이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해 주고 싶구나. 네 뒤에는 내가 있으니 말이다.”
“태비 마마,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고개를 돌려 숙 태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숙 태비의 몸에 기댔다.
“이제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어요.”
아주 오랫동안,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 준 사람이 없었다.
“월령안, 너는 무엇이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된단다. 네 뒤에는 내가 있으니.”
과거 노인은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한 번도 네 뒤에는 내가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노인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월령안, 기억하거라. 너는 네 스스로만을 의지해야 한다.”
노인은 항상 그녀가 성장하도록 일부러 가혹하게 굴었다. 그녀가 홀로 모든 것을 맞설 수 있도록 훈련시켰다. 그녀가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홀로 설 수 있도록, 그녀를 고난에 밀어넣었다.
노인은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몇 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월령안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빠르게 성장시켜 스스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잘 살 수 있었다.
월령안은 코앞에 있지만 만날 수 없는 노인을 떠올리자 코가 시큰거렸다.
그녀는 지금 육장봉이 보고 싶지 않았다. 또 육장봉이 왜 다쳤는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저 노인을 만나서 얘기를 제대로 나누고 싶었다. 그와 작별인사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사치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차올랐다.
월령안은 눈을 감고 얼굴을 숙 태비의 허리에 묻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숙 태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드럽게 월령안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창밖의 달빛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숙 태비의 눈에도 슬며시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녀의 딸이 살아 있었더라면 월령안만큼 컸을 것이다.
달빛이 창문을 뚫고 들어와 온 방을 흩뿌렸다. 하지만 월령안과 숙 태비의 마음을 밝혀 주지는 못했다.
어른의 사랑을 받은 아이는 고집을 부릴 수 있게 된다.
월령안은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기로 했다. 그녀는 육장봉을 보러 가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 월령안은 옥죽에게 패자(牌子 - 업무를 위임하며 작성해 준 나무 패)를 들고 상약국에 가서 좋은 보약을 받아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영복궁의 이름으로 태의서에 가져가 부상당한 대인에게 몸보신하라는 의미로 드리라고 했다.
부상당한 대인이 누군지 월령안은 말하지 않았고 옥죽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옥죽은 패자를 들고 상약국에 가서 좋은 약재를 골라 태의서로 가져갔다.
태의서의 사람이 물어도 옥죽은 월령안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단지 숙 태비가 태의서에서 요양 중인 대인에게 몸보신하라고 보낸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태의서에는 요양하고 계신 대인이 없는데요. 얼마 전에 조왕 전하만 요양하셨지요. 이 약재는 조왕 전하께 드리는 것인가요?”
태의서의 사람은 육장봉이 요양 중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옥죽은 이 약이 누구를 주는 것인지 말을 똑바로 하지 않자 그들도 감히 함부로 받지 못했다.
“저희 낭자께서 말씀하셨어요. 태의서의 부상당한 대인께 드리는 거라고요.”
옥죽은 아무것도 몰랐다. 또 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월령안이 시킨 대로 대답했다. 한 글자도 더 보태지 않았다.
“그럼 조왕께 드리는 것이겠네요…….”
태의서의 사람이 받으려고 하는 순간, 송 원정이 안에서 나왔다. 그는 옥죽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낭자는 숙 태비 옆의 사람인가요?”
“네.”
옥죽은 분명 뭔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또 약간의 호기심도 드러내지 않았다.
궁에서 가장 가지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호기심이었다.
“낭자, 수고하셨어요. 약재는 받아 두었으니 제가 대신 전해 드리지요.”
송 원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는 영복궁의 이 약재들은 누가 보내온 것인지, 또 누구에게 보낸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다만 그분께서는 이 약재를 보시고 기뻐하시지 않을 것 같은데? 어젯밤 깨시자마자 한 첫마디가 ‘월령안이 왔더냐?’ 였으니. 하룻밤을 기다리셨는데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보고 명목상으로는 조왕께 보내는 약재를 받으신다면 화를 크게 내실지도 모르겠군.’
송 원정은 몰래 한탄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옥죽을 보낸 뒤, 그는 옥죽이 가져온 약재를 들고 내실로 돌아갔다.
* * *
육장봉의 몸은 아주 강했다. 그 회복력이 손불사와 송 원정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어제 저녁, 육장봉이 깨어났다. 손불사가 억지로 가로막지 않았더라면 육장봉은 오늘 아침 일찍 궁을 나갔을 것이다.
물론, 육장봉이 억지로 궁을 나가지 않은 것은 절대 손불사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월령안을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는 함구령을 내렸다. 하지만 월령안한테는 이 일을 숨길 수 없을 것이다.
월령안은 공무를 맡고 있었다. 어젯밤 태의서에서 일어난 일을 그녀는 분명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어젯밤 월령안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오늘이면 소식을 들을 때가 되었겠지…….’
육장봉은 그런 생각을 하며 침대의 머리맡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쿵쿵쿵…….
그때 마당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육장봉은 눈살을 찌푸렸다.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월령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육장봉은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고 손에 든 호각을 매만졌다.
이 호각은 월령안이 불었던 것이었다. 호각 위에는 그가 직접 새긴 명월조청봉도가 있었다.
그는 월령안이 다시 돌려주었을 때부터 줄곧 이 호각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송 원정은 옥죽이 가져온 약재를 들고 들어왔다.
“대장군, 영복궁의 궁녀가 보약 약재를 가지고 왔습니다. 태의서에서 요양 중인 대인께 드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장봉은 고개를 들고 송 원정을 슬쩍 흘겨보았다.
그는 보약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
“대장군, 숙 태비의 궁전이 바로 영복궁입니다.”
송 원정은 육장봉이 모를까 봐 한마디 덧붙였다.
“월 낭자는 숙 태비의 궁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조왕 전하께서 독에 당하셨을 때 월 낭자는 그날 저녁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사람을 시켜 보약을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이 약은 오늘 아침 일찍 보내온 것입니다. 그리고 태의서에서 요양 중인 대인께 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소관은 이 보약이 월 낭자로부터 장군께 보내진 물건인 것 같습니다.”
“그 궁녀가 나에게 주는 것이라고 정확히 얘기했느냐? 의도가 정확하지도 않은 물건을 내 앞으로 들이밀다니. 네가 간이 부었구나.”
육장봉은 갑자기 손에 든 호각을 꽉 움켜쥐었다. 느긋하던 그의 눈에서 섬뜩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월령안이 내가 다친 걸 알고도 날 보러 올 생각이 없고 단지 약재로 넘어가려 한다고 말하는 건가?’
송 원정은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하마터면 손에 든 약재 함을 떨어뜨릴 뻔했다.
“대, 대장군…….”
“숙 태비께서 보낸 보약은 네가 잘 보관해.”
육장봉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롭게 살기를 띠고 있었다.
‘월령안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정말 약재 하나로 넘어가려는 건가?’
팍! 하는 소리와 함께 손에 든 호각이 경쾌한 소리를 냈다.
육장봉은 놀란 듯 안색이 변해서 손을 펼쳤다. 그러자 손에 든 호각이 산산이 부서진 것이 보였다. 육장봉이 정성껏 조각한 명월조청봉도도 자연스럽게 망가졌다.
육장봉은 손에 들린 나무 조각을 보며 점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송 원정은 그 호각의 의미를 몰랐다. 하지만 그는 사람의 안색을 살필 줄은 알았다. 그는 육장봉의 표정이 달라진 것을 보자 그가 좋은 마음으로 한 일이 그에게 큰 독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챘다.
송 원정은 더 머무르지 못하고 슬그머니 그곳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