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5화 육장봉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는 드디어 월령안이 이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왜 그토록 무기력하고 답답해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사람들은 도리를 전혀 따지지 않았다.
육장봉이 낫기 위해서라면 몇 명이 죽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니. 이는 황제가 대놓고 협박하는 것이었다. 손불사가 육장봉을 치료할 때까지 사람을 죽일 거라고 말이다.
육장봉이 도리를 따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황제는 그 보다도 더 따지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예의 바르게 부탁을 하더니 그가 거절하자 바로 안면을 바꾸었다.
이 안면을 바꾸는 속도가 책을 펼치는 속도보다 더 빨랐다. 이를 어쩌면 좋다는 말인가?
‘나는 또 거절할 수 있을까?’
손불사는 마음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이제 그가 거절하는지 승낙하는지는 상관없게 되었다. 그가 거절하더라도 육장봉을 치료한다는 결과는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승낙하더라도 고인의 기품은 잃을 수 없었다.
손불사는 속으로 답답했지만 겉으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태연함을 보였다.
“폐하, 육 대장군이 저를 궁에 모시고 들어와 조왕을 치료할 때, 반년 안에 저를 위해 약재를 찾아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폐하께서 소인더러 육 대장군을 치료하라고 하신다면 소인은 당연히 폐하를 위해 전례를 깨뜨리겠습니다. 다만 폐하께서 소인에게 약속을 해 주십시오. 소인이 폐하를 제외한 다른 관리와 귀족을 치료하는 부탁은 거절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는 황제를 거절할 수 없었다. 이건 받아들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은, 육장봉이라고 해도 앞으로 그를 협박할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다.
“짐이 약속하겠다.”
황제는 생각도 하지 않고 허락했다.
그는 천자였다. 당연히 다른 사람과 달라야 했다.
* * *
육장봉이 다친 것은 절대적인 비밀이었다. 황제는 그 자리에서 함구령을 내려 누구도 육장봉이 다친 것을 발설하지 못하게 했다.
소식을 엄밀하게 봉쇄한 황제는 또 조계안에게 말했다.
“계안, 가서 누가 장봉을 다치게 했는지 알아보거라.”
“네.”
조계안은 도도하게 대답하고 돌아서서 나갔다.
황제는 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잠깐만, 구리파의 일은 어찌 되었느냐? 청주의 사람들이 북요와 금나라에게 어떤 약속을 했더냐? 그들은 뭘 할 생각이더냐?”
조계안은 퉁명스럽게 눈을 희번덕거렸다.
“황형,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모두 특수한 훈련을 거친 정탐꾼들이에요. 그들의 입은 그렇게 쉽게 열 수 있는 게 아니라고요. 그들이 정말 쉽게 말했다 해도 믿을 수 있겠어요?”
육장봉은 성을 나서기 전에 육이더러 구리파의 폐허를 파내라고 명령했다.
그날, 육이는 폐허 아래에서 한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 그 비밀 통로는 과거 그 투수장과 이어졌다.
그때의 지하 투수장은 오래 전에 망가졌다. 지금 이 지하 투수장은 새로 지은 것이었다.
구리파는 반경 수십 리가 모두 황폐한 지형이었다. 평소 드나드는 사람이 극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사이에 청주의 사람이 원래 지하 투수장이 있던 자리에 새로운 투수장을 세운 것이다.
이 새로운 투수장은 예전처럼 호화롭게 자란 부잣집 자제들의 오락 장소가 아니었다. 이곳은 청주가 변경에 세운 거점이었다.
육이를 비롯한 병사들은 새 지하 투수장에서 수십 명의 청주 첩자들을 잡아들였다. 또 북요 고수 둘과 금나라 고수 한 명도 잡아들였다.
이 세 고수들은 모두 북요와 금나라 각각의 황실에 충성하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변경까지 와서 청주의 첩자들과 왕래한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그들 사이에 어떠한 협약이 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청주와 북요, 그리고 금나라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합의를 보았는지 조계안은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이런 일은 그리 쉽게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조계안은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 천천히 놀아 줄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황제는 더없이 급하게 굴었다.
이 일은 급하게 서두른다고 해결되는 종류의 일이 아니었다.
일에 진척이 없으니 조계안도 황제와 보고할 것이 없었다. 그는 황제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떠나갔다.
그날 저녁, 조계안은 육장봉이 청하현에서 부딪힌 일을 알아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상세히 여러 번 알아봤고, 그 결과 이 일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다. 하지만 조계안은 곧 더 깊게 알아볼 생각을 그만두었다.
‘모두 형제이니 시시콜콜 따질 필요가 없지.’
조계안은 지체하지 않고 수하가 가져온 소식을 들고 입궁했다. 그리고 황제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황제는 조계안의 이야기를 듣고 버럭 화를 냈다.
“수횡천은 뭘 하려는 놈이냐?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잠한성이 길들인 사사를 구해 간 것은 물론이고, 육장봉을 다치게 하다니. 수횡천은 반역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조계안이 건들거리며 말했다.
“수횡천의 머릿속에는 그 사람들을 구할 생각 밖에 없는데 이 좋은 기회를 어찌 그냥 넘겼겠어요? 강호 사람들이 의리를 중히 여긴다지만 그건 자기 형제들에게나 해당하는 말이죠. 황형은 수횡천이 황실에 충성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수횡천이 육장봉을 다치게 했다면 수횡천 본인은?’
그는 전에 수횡천과 겨루어 본 적이 있었다. 수횡천의 무공은 육장봉보다 위였다.
하지만 육장봉은 생사를 가르는 상황에 익숙하다. 만약 그 둘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조계안은 거기에서 의문을 느꼈다. 그들 둘은 목숨을 걸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수횡천은 육장봉이 오기 사오 일 전에 미리 그곳으로 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육장봉이 도착했을 때, 그 사사들을 이미 빼돌린 뒤였다.
수횡천은 청하현에 남아서 육장봉을 하루 이틀만 잡아 두면 되었다. 육장봉과 목숨을 걸고 싸울 필요는 전혀 없었다.
육장봉도 바로 이 시기에 별 쓸모도 없는 사사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수횡천과 싸울 필요가 없었다.
이는 육장봉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또 수횡천이 저지른 일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육장봉은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거지? 단지 월령안이 위험해진 것에 대한 화풀이를 하려고?’
조계안의 시선에 깊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바로 그 생각을 내려놓았다.
‘됐다. 형제 사이인데 모르는 척 할 수도 있지.’
안그래도 황제는 가뜩이나 화가 나 있었는데 조계안이 건들거리며 말을 하자 황제의 분노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커졌다.
황제는 손에 든 종이를 구기고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수횡천은? 어디 있느냐?”
“이미 도망친 지 오래예요.”
청하현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확실히 그랬다.
수횡천은 육장봉을 크게 다치게 한 뒤,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는 월령안의 오라버니가 아니냐? 월령안을 보호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월령안이 지금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었는데 그가 그렇게 도망쳤다는 거냐?”
황제는 눈을 부릅뜨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아마도 그 사사들이 더욱 중요했나 보죠.”
바로 이 점을 조계안도 의문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수횡천 그 인간은 의리를 따지고 인정을 중시했다.
그런 그가 하필 의동생인 월령안이 보호가 필요한 지금 떠났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그 혼자 알면 되는 것이었다. 황형에게 알릴 필요는 없었다.
“그자는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 아니냐? 만나보지도 못한 사사들을 위해 월령안의 생사를 신경 쓰지 않는다? 월령안이 없었더라면 자기가 아직도 형부 감옥에 갇혀 있을 거라는 것을 잊은 것이냐!”
황제는 화가 난 나머지 도리어 실소를 하였다.
“이게 무슨 강호 대협객이냐? 이것이 바로 강호의 의리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형제를 위해 불구덩이에도 뛰어드는 것이?”
조계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누가 알겠어요. 어쩌면 수횡천은 월령안은 강하니 그가 없어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황제는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비꼬았다.
“월령안, 항상 똑똑하게 굴더니 오라버니만큼은 잘못 골랐구나.”
“월령안은 그에게 뭘 바라지도 않는걸요, 뭐.”
조계안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느냐?”
그 목소리가 작아 못 들은 황제는 다시 물었다.
“황형, 언제 월령안을 풀어 줄 거예요? 월령안은 우리 황성사의 중요한 용의자예요.”
황제가 월령안을 입에 올리지 않았을 때는 그나마 괜찮았는데, 월령안을 언급하자 그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월령안을 후궁에 묵게 하고 또 월령안더러 궁의 일을 다스리게 하다니. 황형이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황형 설마 월령안이 맘에 들어 비로 봉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황제는 조계안을 힐끗 흘겨보았다.
“무슨 배짱으로 짐에게 사람을 요구하는 것이냐? 월령안의 죄명을 네가 씻을 수 있겠느냐?”
“급하게 굴 것 없죠. 그런 건 먼저 황성사에 가두고 생각하면 돼요.”
‘증거가 확실한데 어떻게 죄를 없는 것으로 만들겠어.’
“넌 황성사가 예전과 같다고 생각하느냐? 황성사가 뭐 하는 곳이냐? 월령안이 들어간다면 결백해질 수 있겠느냐?”
황제는 퉁명스럽게 조계안을 흘겨보았다.
“너 혹시 최일처럼 월령안을 위해 황성사에 묵으면서 함께할 거냐?”
조계안은 황제를 힐끔 노려보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제가 지금 가서 월령안이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찾겠어요. 그때가 되면 황형이 무슨 이유로 월령안을 붙잡고 궁을 나가지 못하게 할지 두고 보자고요.”
황제는 최일을 들먹이지 말아야 했다. 최일 얘기만 나오면 그는 짜증이 났다.
최일의 그 옥패는 아직도 월령안의 허리춤에 걸려 있었다.
또 육장봉도 들먹이지 말아야 했다. 육장봉 얘기가 나와도 그는 짜증이 났다.
육씨 가문의 호각이 아직도 월령안의 목에 걸려 있었다.
이제 그는 황형조차 보고 싶지 않았다.
월령안 머리의 두면이 바로 그의 황형이 선물한 것이었다.
하나같이 정말 그를 짜증 나게 했다.
조계안은 어두운 안색으로 난각을 떠났다.
조계안이 떠나자 황제는 굳은 얼굴을 펴고 손에 들고 있던 구겨진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일들을 자세하게 읽어 보았다. 한참 후 그는 소리 없이 한탄했다.
“이반반, 제왕은 홀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냐?”
“폐하…….”
이반반은 황제를 불렀지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황제는 자조적인 웃음을 짓고 눈을 감은 채, 의자에 기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봉이 월령안을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그녀에게 알리기는 해야지. 이반반, 가서 월령안과 말하거라. 장봉이 수횡천과 싸우다 중상을 입었다고.”
“네, 폐하.”
이반반은 싱긋, 하고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폐하는 여전히 그 폐하셔. 변하지 않으셨어.’
* * *
“육 대장군이 청하현에서 수 맹주를 만나시고 중상을 입은 채, 돌아오셨습니다. 지금, 태의서에서 요양 중이십니다.”
월령안은 창가에 앉아 휘영청 밝은 달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폐하께서 이반반을 시켜 나한테 이걸 알려 주시는 것은 무슨 뜻이지? 내 책임을 물으시는 건가? 아니면 뭔가 암시하시는 건가?
육장봉과 수 오라버니의 무공은 막상막하니 죽기 살기로 싸운 게 아니라면 누구도 서로를 상처 입히지 못했을 거야. 육장봉이 중상을 입었다면 두 사람은 아주 격렬하게 싸웠겠군. 그 사사들을 위해서?’
그녀는 육장봉이 모험을 무릅쓰고 수횡천과 생사를 두고 겨룰 정도로 그 사사들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육장봉은 대체 무슨 생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