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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82)화 (482/1,004)

482화 죄를 뒤집어쓸 사람

“육장봉, 제발 좀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염치가 없어서야……. 천벌을 받을 것이다.”

“해독약!”

육장봉은 단호했다.

아포는 굳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용맹한 사내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를 층층이 둘러싼 병사를 보니 아포는 겁이 났다.

“내가 해독약을 내준 후에도 내 신부를 찾아 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어?”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이번에는 날 속이지 않는 거지?”

아포는 걱정을 놓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

육장봉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날 믿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느냐?”

‘없어! 그래서 더 화가 나!’

아포는 다시 한번 주변에 둘러싼 살기등등한 전사를 힐끔 바라보고 묵묵히 해독약을 꺼냈다.

이길 수도, 도망칠 수도 없으니 패배를 인정하는 것 말고 그가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아포는 약병에 든 약을 한 알만 꺼내서 육장봉에게 주려고 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보다 먼저 약병을 빼앗아 한 알을 꺼냈다. 그리고 아포가 방심한 틈을 타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아포의 턱을 누르고 약을 아포의 입에 밀어 넣었다.

“콜록…… 너, 너 뭐 하는 거야?”

아포는 하마터면 그 약 때문에 사레가 들릴 뻔했다.

“약을 시험해 본 거지.”

아포가 약을 삼키고도 당황해하지 않는 것을 보자 육장봉은 안에 든 해독약이 진짜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육이에게 던져 주었다.

“궁에 가져가거라. 그리고 폐하께 구리파의 일을 보고드리거라.”

“네, 대장군.”

육이는 해독약을 받아 들고 돌아서서 떠나갔다.

아포는 막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는 두 눈을 멀쩡히 뜨고 육이가 그의 모든 해독약을 가진 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 바로 서역에서 널 만난 것이다.”

아포는 험악하게 육장봉을 향해 눈을 부릅떠 보였다. 그의 손목에 있는 은뱀도 육장봉에게 이를 드러내 보였다.

육장봉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말을 타고 채찍질하며 떠나갔다.

아포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육장봉이 아내를 맞이했다던데 그게 사실일까? 저런 남자는 대체 어떤 여인이 감당할 수 있는 거지?’

아포는 시무룩해져서 말을 타고 육장봉의 뒤를 따랐다.

실력이 부족하면 괴롭힘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육장봉은 아포더러 힘을 쓰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아포를 데리고 미칠 듯이 달려 중도에 말 한 번 바꾸고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한 별장에 도착했다.

육장봉은 아포를 데리고 별장으로 들어온 뒤 말했다.

“자시(子時 - 밤 23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가 되면 네가 원하는 사람이 보내질 것이다.”

그리고 아포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아포는 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길 수 없는 아포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묵묵히 별장에서 자시까지 신부를 기다렸다.

육장봉은 아포를 남겨 둔 채, 암위를 불러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횡천이 청하현(青荷縣)에 있는 것이 확실하냐?”

육장봉은 어젯밤, 암위에게 시켜 월 삼낭을 이곳으로 데려오게 했다. 아포를 청하현에 데리고 온 것은 사전에 수횡천의 소식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아포와 거래하면 꿩 먹고 알 먹기였다.

그는 수횡천에게 월령안을 보호하라는 말을 전했다. 하지만 수횡천은 그가 북요인을 상대하느라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는 틈을 타 잠한성이 길들인 사사를 구하고자 이곳으로 달려왔다.

청희 장공주는 끝났다. 잠한성이 길들인 사사가 조금 남아 있더라도 그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작은 일일 뿐이었다. 월령안이 신경을 쓰는 것을 봐서 그는 모르는 척, 그들을 놔줄 수 있었다. 월령안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하지만 수횡천이 이 사사들을 위해 월령안의 안위를 돌보지 않은 것은 참을 수가 없었다.

육장봉은 그 사사들을 전부 죽이기로 결심했다. 수횡천에게 알려 줄 것이다. 이자들은 원래 살 수 있었으나 수횡천 때문에 죽는 거라고.

청하현은 변경에서 이틀 거리에 있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드나들 수 있는 길이라고는 작은 산길밖에 없었다.

산은 사람을 숨기기 좋은 장소였다. 큰 산에 수십, 수백, 심지어 수천 명을 숨기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곳은 사사를 훈련시키기 더없이 훌륭한 곳이었다.

육장봉은 청하현의 정황을 파악한 뒤,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잠한성은 비록 남녀 간의 일에는 멍청했어도 다른 일에서는 강호 대협객의 다운 훌륭한 능력을 보였다고.

육장봉은 한시도 기다리지 않았다. 수횡천의 행방을 알아내자 그날 밤에 바로 밤길을 걸어 홀로 청하현 관할 하에 있는 암산촌(岩山村)으로 왔다.

암산촌에는 열몇 가구밖에 살지 않았다. 만약 암위의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면 수횡천은 지금 산에 있을 것이다.

육장봉은 달빛을 등지고 산을 올랐다. 멀리 산허리에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날 기다리는 건가? 정말 방자하군!’

육장봉은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입꼬리를 올려 냉소를 지었다.

그의 옷자락이 펄럭이더니, 그는 마치 바람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곧 이어 육장봉은 산허리에 위치한 한 초가집 앞에 나타났다.

수횡천은 집 밖에서 모닥불 위에 산토끼의 고기를 굽고 있었다. 산토끼의 껍질은 이미 잘 구워져 기름이 번지르르했다. 수횡천이 뒤집자 향기가 은은히 풍겼다.

수횡천은 육장봉이 온 것을 보고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그는 토끼고기를 들고 물었다.

“한입 먹을 텐가?”

“수 맹주, 축하하오. 한 번 이겼군.”

육장봉은 수횡천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전혀 사양하지 않고 수횡천의 손에 든 구운 토끼를 받았다. 그리고 토끼 다리를 찢어 가지고 나머지를 수횡천에게 던져 주었다.

수횡천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나머지 토끼고기를 들고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수횡천은 거칠고 호탕하게 고기를 먹어치웠다. 그에 반해 육장봉은 같은 고기를 우아하고 품위 있게 먹었다.

물론, 그의 속도도 느리지 않았다. 두어 입에 손에 든 토끼고기를 전부 먹어 버렸다.

손을 툭툭, 턴 육장봉은 옆에 있는 술 항아리를 들고 봉니(封泥 - 무언가를 봉인하기 위하여 이음매에 점토 덩어리를 붙이고 인장을 눌러 찍은 것)를 열었다. 맑고 시원한 술 향기가 확, 풍겼다.

“이화백인가?”

수횡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좋아한다고 령안이 말하더군.”

“령안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잊지 않지.”

육장봉은 술 항아리를 들고 한 모금 마셨다.

불빛 아래에서, 육장봉의 차가운 눈매에 부드러움이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령안은 항상 다정했소. 그녀는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기억했지. 당신만 특별한 게 아니오.”

수횡천도 발치에 놓인 술 항아리를 들고 열었다. 그리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마셨다.

육장봉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수횡천과 이 문제에 대해 더는 말하지 않았다.

‘질투하는군.’

“네가 없는 동안 월령안이 다쳤다.”

육장봉은 술 항아리를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에는 살기가 드리웠다.

수횡천은 술을 마시던 동작을 멈추고 굳건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령안을 다치게 할 사람은 없소!”

육장봉은 냉소를 지었다.

“서역에서 온 독왕 아포의 짓이었지.”

“아포? 그가 왜 주나라에 온 거요?”

수횡천은 술 항아리를 내려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령안이 중독되었소? 심하오?”

“이제서야 월령안을 챙기는군. 너무 늦은 것 아닌가? 내가 분명 사람을 시켜 월령안을 보호하라고 전했는데 당신은 사람을 이런 식으로 보호하나 보군.”

‘이상하군. 수횡천, 왜 월령안이 안전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거지?’

육장봉은 수횡천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그건…….”

수횡천은 무언가 말하려다 갑자기 멈췄다. 그는 오만하게 말했다.

“육 대장군, 난 당신의 수하가 아니오. 당신은 날 명령할 자격이 없소.”

“월령안은 당신을 오라버니로 보고 당신에게 일이 생기자 도처에 사정하며 다녔다. 심지어 나에게도 허리를 숙이며 사정했었지. 그런데 당신은 그 마음을 이렇게 보답하나? 그런 월령안보다 얼굴도 보지 못한 사사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

육장봉은 말하면서 항상 수횡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수횡천이 전혀 당황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도 자책하거나 불안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수횡천이 청하현에 온 것은 월령안의 뜻인가?’

“나와 령안 사이의 일은 당신한테 해명할 필요가 없소. 육장봉, 이렇게 되었으니 말하시오. 어쩔 생각이오?”

수횡천은 자신이 말로 육장봉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육장봉과 더 말할 생각이 없었다.

어쨌든, 그가 청하현에 와서 해야 할 일을 이미 다 했다.

육장봉이 그에게 손을 써도 그는 두렵지 않았다.

“사사들을 넘기시오.”

육장봉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기세등등한 위압감도 가지고 있었다.

“늦었소.”

수횡천은 눈으로 강한 기운을 내뿜으며 소리 없이 육장봉과 마주했다.

육장봉은 냉소를 짓더니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군. 당신은 월령안에게 그 사사들을 넘긴 거야. 그녀에게 일꾼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이곳 청하현에 있던 사사들은 아직 주인을 각인하지 못하였으니 아주 좋은 선택이었겠군.”

순간, 수횡천의 시선이 흔들렸다.

“당신이 어떻게…….”

“내가 맞췄나 보군.”

육장봉은 일어서서 차갑고 도도하게 수횡천을 흘겨보았다.

수횡천도 일어서서 후회하는 듯이 말했다.

“여기서 당신을 기다리지 말 걸 그랬군.”

“하, 아직도 날 속이려는 건가?”

육장봉은 비웃었다.

“사사들은 진작에 빼돌렸겠지. 당신이 여기서 기다린 것은 내 시선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내가 이곳으로 오게 유인하여 사사들을 빼돌릴 시간을 벌 생각이었겠지.”

수횡천은 놀란 눈으로 육장봉을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육장봉,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내는 거지?’

“내가 또 맞췄군.”

육장봉은 말하면서 계속해서 수횡천을 바라보았다.

수횡천은 거짓말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눈빛이 흔들렸고 사지가 굳었다.

비록 수횡천은 자신의 반응을 억제하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육장봉의 예리한 눈썰미는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육장봉은 그래서 더 의심이 되었다.

‘수횡천의 반응이 너무 가식적인데.’

육장봉은 수횡천을 바라보며 또 말했다.

“당신을 맞이한 사람이 월씨 가문의 그 회색 옷을 입은 늙은 하인 서(徐)씨가 맞소?”

그는 염 황숙을 두 번 만났지만 염 황숙 곁에서 그 늙은 하인을 보지 못했다.

암위는 염 황숙이 그 늙은 하인을 월령안 곁으로 파견했다고 했다. 하지만 월령안 옆에서도 그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늙은 하인은 변경에 없는 것이 분명했다.

그 사사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수횡천밖에 몰랐다. 그는 수횡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반드시 지금 구해야만 하는 것도 아닌 사사들을 위해 월령안의 안위도 신경 쓰지 않았는지.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염 황숙은 그 사사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월령안이 청주에 가기 전에 월령안을 위해 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리고 양국 비무 기간에 수횡천을 시켜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기회였다. 월령안이 의심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염 황숙께서는 령안에게 참…… 각별하시군. 월령안을 위해 죄를 뒤집어쓸 사람까지 찾았어. 하지만 수횡천 이자는 허술하기 그지없군.’

수횡천은 아주 정직하게도 그에게 모든 계획을 들키고 말았다.

육장봉은 어떻게 해야 황제가 월령안을 의심하지 않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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