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화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아무리 육장봉이라도 이번 일은 억울하게 느껴졌다. 이미 여러 날을 잠도 자지 않고 무리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 귀한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게 되다니. 염 황숙이 처음부터 사실대로 알려 줬다면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이었다.
“왜? 불만이야?”
노인은 사악하게 웃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염 황숙은 그의 손윗사람일 뿐만 아니라 월령안이 존경하는 어르신이었다. 염 황숙이 그를 놀릴 뿐만 아니라 때린다 하더라도 월령안의 체면을 봐서 염 황숙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되었다.”
노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어딘가 피곤한 듯이 말했다.
“됐다. 얼른 가서 해독약을 찾아. 궁 안이라면 내가 령안이를 지키고 있을 테니 무사할 거야.”
‘황숙께서 지키고 계시니 황궁 안에 있다면 몸은 안전하겠지만 마음까지 무사할지는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육장봉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른 방도도 없어 그저 침묵했다. 지금으로서는 황제가 월령안을 자주 겪어 그녀의 진면목을 알아보게 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궁 밖으로 나갔다 살해 위협을 당하는 것보다 나으리라.
월 삼낭은 이미 황제의 신임을 얻을 기회를 철저하게 놓쳤다.
황제가 쓸 수 있는 월씨 가문의 인물은 월령안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황제가 월씨 가문 사람을 필요로 하는 한, 월령안의 목숨을 노리지는 않을 것이다.
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비록 황제의 편견 때문에 월령안이 당분간은 조금 고난을 겪겠지만, 목숨을 잃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황숙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암위는 이미 월 삼낭을 데리고 하루 거리는 이동했을 것이다. 그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육장봉은 여기까지 생각했지만 또 참지 못하고 노인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노인이 일부러 월령안에게 찾아갈 시간이 없도록 그를 바쁘게 만드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노인은 육장봉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내가 일부러 그런 거야. 어쩔래? 감히 나에게 손을 쓰기라도 할 테냐?’
육장봉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노인이 궁에 있는 이상, 월령안은 절대 생명의 위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시름을 놓을 수 없었다.
월 삼낭을 찾아가기 전에 육장봉은 황제를 만나 사흘 안에 해독약을 가지고 오겠으니 사흘을 기다려 달라고 약속을 받아내었다.
이 사흘 동안, 무슨 소식을 듣든지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말이다.
“길어야 사흘입니다. 신이 반드시 독왕 아포의 일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해독약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육장봉은 황제에게 단단히 일렀다.
황제는 잠시 사색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짐이 너에게 사흘의 시간을 주겠다.”
조계안이 당한 독은 아주 희귀한 것이었다. 손불사는 독소가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어도 해독약을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황제는 이미 독왕 아포가 궁문 입구에서 한 말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에게 월령안을 넘기고 해독약으로 바꿔 가라고 한 일을.
월령안을 해독약으로 바꿔 조계안을 살릴 수 있다면 황제는 당연히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살린다 해도 독왕 아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조계안은 또다시 목숨의 위협에 시달릴 것이다.
월령안은 목숨이 하나밖에 없었다. 이번 한 번은 그렇게 해서 위기를 넘긴다 쳐도 다음은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당당한 제왕인 그가 어떻게 서역 작은 나라 강호 떠돌이의 위협을 받을 수 있겠는가?
육장봉은 그렇게 황제의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그는 바로 성을 나가지 않고 시간을 조금 들여 독왕 아포를 찾았다.
독왕 아포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육장봉도 그를 상대로 돌려 말하지 않았다. 독왕 아포가 도망가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신부는 내 손 안에 있다.”
“뭐라고?”
독왕 아포는 육장봉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육장봉이 찾아온 것을 보자 몸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돌아서자마자 육장봉의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나와 함께 가지.”
말을 마친 육장봉은 돌아서서 걸어갔다.
그는 독왕 아포가 반드시 따라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독왕 아포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육장봉의 뒤를 따랐다.
“내가 널 믿을 수 있나?”
“주나라에서 날 제외하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육장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골목 입구로 걸어갔다.
골목 밖에는 말 두 필이 있었다.
독왕 아포가 따라올 줄 예상한 육장봉이 미리 준비시킨 것이었다.
“내 신부가 누군지 알아? 나도 그녀가 누군지 모르는데? 그녀는 나한테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없다고.”
독왕 아포는 육장봉을 따라 말을 타기는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했다. 그는 참지 못하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너의 신부는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고, 눈가에 눈물점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육장봉은 월삼낭의 얼굴을 자세하게 떠올렸다. 그는 그녀의 생김새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눈물점은 기억하고 있었다.
독왕 아포는 순간 흥분해서 외쳤다.
“맞아! 맞아! 날 속이지 않았어! 그녀가 바로 내 신부야. 하늘이 나에게 내린 신부야. 난 널 믿어. 널 따라가겠어.”
육장봉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채찍질하며 성 밖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독왕 아포의 말 타는 기술은 평범했다. 육장봉에게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를 쓰고 채찍질하며 따라갔다.
둘은 미친 듯이 달려 한 시간 만에 성을 나갔다.
성 밖에 도착하자 육장봉은 속도를 늦추었다.
“너를 찾아 거래를 한 사람은 어디에 있나? 길을 안내해라.”
“난 몰…….”
독왕 아포가 모른 척하려고 했으나 육장봉은 엄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끊었다.
“모른다고 하지 마라. 서역 독왕의 추적향은 세계 제일이지. 네가 그자에게 추적향을 안 썼을 리가 없다.”
“난 너와 거래하는 게 아주 싫다.”
독왕 아포는 서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을 안내해.”
육장봉은 독왕 아포를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독왕 아포는 서글픈 표정을 지으며 길을 안내하지 않았다.
그는 육장봉을 이기지 못했다. 육장봉이 만약 진짜로 그를 죽이려고 한다면 굉장히 위험했다.
오랜 기간 숨을 죽이고 준비하여 육장봉이 무방비해지는 틈에 독을 쓴 후가 아닌 한, 그는 어떻게 해도 육장봉을 죽일 수 없었다.
심지어 그는 과거 자신의 영역인 서역 땅에서 육장봉에게 독을 쓰려 한 적이 이미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때도 육장봉을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는 주나라에서 육장봉을 이길 거란 생각은 전혀 할 수 없었다.
독왕 아포는 하는 수 없이 육장봉에게 길을 안내했다.
육장봉이 말한 대로, 그의 추적향은 세계 제일이었다. 그의 추적향에 맞기만 한다면, 효력이 다하는 열흘이 지나기 전에는 아무리 먼 곳에 숨어도 다 찾을 수 있었다.
독왕 아포는 육장봉과 처음 왕래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육장봉이 얼마나 난폭한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비록 그는 육장봉의 핍박을 받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감히 육장봉을 속이지는 못했다.
독왕 아포는 성실하게 은뱀을 꺼내 은뱀더러 그들에게 길을 안내하게 했다.
은뱀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육장봉과 독왕 아포는 한 폐허에 도착했다.
자세히 보는 여기는 구리파(九裏坡)였다.
그때 그 지하 투수장이 이 폐허더미 아래에 세워졌었다.
육장봉은 발아래의 폐허를 바라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곳이 아직도 있었던 건가. 칠 년 전에 완벽히 치우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재건된 것인가.’
은뱀은 폐허에서 한 바퀴 돌더니 슉, 하고 날아올라 아포의 손목에 감겼다.
아포는 황급히 손을 등 뒤로 하고 한걸음 물러섰다. 그는 육장봉과 멀리 떨어져서 말했다.
“내 뱀이 길을 못 찾겠대.”
육장봉은 너무 살벌했다. 특히 이곳에 도착한 후부터는 육장봉이 식인귀로 보일 지경으로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신부를 찾는 것이 순간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질 정도로 그는 이곳을 간절히 떠나고 싶어졌다.
“한쪽으로 물러서.”
육장봉은 냉혹하게 아포를 훑어보고 하늘로 파란색 신호를 쏘았다.
아포는 다시 뒤로 세 걸음 물러서 육장봉과 가장 먼 거리를 유지했다.
신호를 발사한 뒤, 육장봉은 그 자리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포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 사람은 어디 아픈 것 같은데!’
아포는 한참 기다렸지만 육장봉이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시험 삼아 불러 봤다.
“육장봉?”
육장봉은 고개를 돌려 차갑게 아포를 바라보았다.
해가 이미 저물어 아포는 육장봉의 시선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포는 육장봉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육장봉이 너무 두려워졌다. 이 남자는 너무 난폭했다.
아포는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억지로 물었다.
“내,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우리 안 가?”
‘날 데리고 신부를 찾으러 간다더니? 한 입으로 두말하는 건가?’
“급한 일인가?”
육장봉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아니, 아주 급한 건 아냐.”
아포는 덜덜 떨었다.
그도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너무 무서웠다.
“급하지 않으면 기다려라.”
육장봉은 아포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고 더 이상 아포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물론, 아포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고분고분하게 한쪽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이렇게 무려 한 시진이나 기다렸다.
한 시진 뒤에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아포는 나무 아래에서 잠들어 있었다. 갑자기 들려온 말발굽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분노의 시선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너는 소인배다. 군대를 움직여 나를 잡으려 들다니!”
“모자란 자식.”
육장봉은 아포를 흘겨보고 대꾸하지 않았다.
아포는 원래 도망치려고 했으나 육장봉의 이 말을 듣고 또 발걸음을 멈췄다.
“너 무슨 뜻이야?”
“널 잡는 데 왜 군대가 필요하지?”
아포가 도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 육장봉은 인내심을 가지고 한마디 했다.
아포는 잠깐 멍해졌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육장봉이 마음먹었다면 단둘이 있었을 때 이미 그를 잡았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
그는 도망을 치지 않고 다시 앉았다.
육장봉은 그런 그를 힐끗 보고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육이가 사람을 데리고 왔다.
“대장군!”
육이는 삼백 인을 데리고 왔다. 세 번째 비무에서 한 사람도 죽지 않고 북요 군대를 전멸시킨 바로 그 군대였다.
이 삼백 인은 육장봉의 심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또 육장봉의 손에 든 가장 날카로운 칼이었다. 이 칼만 있다면 육장봉은 그 어떤 장애물도 뚫을 수 있었다.
육장봉은 고개를 끄덕이고 뒤에 있는 폐허를 가리켰다.
“파헤치거라. 안에 든 사람을 한 명도 놓쳐서는 안 된다. 알겠나?”
“네, 장군.”
육이의 두 눈에 섬뜩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순식간에 긴장했다.
칠 년 전, 이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과거 그들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 알고 있었다.
‘이런 곳이 아직도 있다니? 그자들의 간덩이가 보통 부은 게 아니군.’
육장봉은 이곳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었다. 일을 육이에게 맡긴 뒤, 독왕 아포에게 걸어갔다.
“해독약을 내놓아라.”
“내 신부를 아직 찾지 못했다.”
독왕 아포는 한걸음 뒷걸음질 치더니 경계의 눈빛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부당한 일에 저항하는 것처럼 비장하게 말했다.
“이건 우리의 거래에 맞지 않잖아!”
육장봉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는 손을 들어 육이에게 손짓을 했다.
곧이어 육이 뒤의 삼백 인이 신속하게 흩어지다가 또 뭉치더니 아포를 층층이 둘러쌌다.
“넌 이들을 동시에 쓰러뜨릴 수 있느냐?”
육장봉이 냉소를 지었다.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독왕 아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