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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80)화 (480/1,004)

480화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염 황숙.”

육장봉은 노인에게 예를 올렸다. 노인이 허락한 뒤에야 그의 앞에 앉았다.

육장봉이 자리에 앉았지만 노인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단지 조용하게 차를 끓이고 있을 뿐이었다. 육장봉도 조용히 앉아서 노인이 차를 다 우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공손하게 노인이 건네는 차를 받았다.

육장봉은 급히 입을 열지 않고 찻잔을 들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차 한 잔을 육장봉은 무려 일각의 시간 동안 마셨다. 노인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육장봉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염 황숙.”

육장봉은 찻잔을 내려놓고 먼저 입을 열었다.

“독왕 아포가 월령안을 죽이려고 합니다.”

“음.”

노인은 한마디 대꾸하였다. 그는 놀라지 않았다.

궁 밖에서 일어난 일을 그가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조계안이 아포의 독에 당했습니다. 아포는 오직 그만이 해독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조계안을 살리려면 월령안의 목숨으로 해독약을 바꾸라고 했지요. 그때, 저 말고도 적지 않은 금군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금군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는 있지만 아포더러 말을 하지 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포의 말이 폐하의 귀에 흘러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육장봉은 노인이 오직 월령안만 신경 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육장봉도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노인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차가운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군주에 충성하고 형제를 위해서 월령안으로 해독약을 바꿔 조계안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월령안을 위해 군주를 기만하고 조계안의 생사를 나 몰라라 할 것인가?

육장봉이 어떻게 대답하든지 모두 틀린 것이었다.

노인은 월령안의 스승이기도 했지만 전임 암황이기도 했다. 조계안의 스승이자 황숙이었다.

노인이 월령안을 중히 여긴다지만 두 눈 멀쩡히 뜨고 조계안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육장봉이 누구를 살리겠다 선택하든 노인이 만족할 대답이 아니었다.

노인의 이 물음은 진퇴양난의 함정이나 다름없었다.

육장봉은 노인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노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황숙, 아포의 신부는 누구입니까?”

하지만 노인은 육장봉이 회피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먼저 내 질문에 대답해.”

“황숙…….”

육장봉은 노인을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사람이 늙으면 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변하는 건가?’

“황숙이라고 불러도 소용없어.”

노인도 육장봉을 재촉하지 않고 인내심이 있게 육장봉을 바라보며 대답하기를 기다렸다.

육장봉은 하는 수 없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황숙, 전 이미 답을 드렸습니다.”

‘내가 왜 선택을 해야 하지? 나는 월령안과 조계안 둘 다 구할 것이다.’

노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육장봉을 노려보며 말했다.

“교활하기는!”

육장봉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노인은 코웃음 치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

“폐하께서 너에게 시간을 줄 거라고 확신할 수 있느냐? 폐하께서는 줄곧 월령안을 못마땅히 여겼다. 월령안의 목숨으로 조계안 그 녀석을 살릴 수만 있다면 폐하께서는 절대 망설이지 않을 거야.”

‘황숙의 이 말씀은 무슨 뜻이지?’

육장봉은 시선을 조금 내리깔고 물었다.

“황숙, 폐하께서 월령안을 좋아하시지 않는 것은 칠 년 전의 응어리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맞습니까?”

“무슨 폐하가 월령안을 좋아하지 않기는? 폐하는 청주 월씨 가문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고 청주 월씨 가문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월령안과는 상관없어.”

노인은 그가 키운 아이가 미움받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육장봉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묵묵히 다음 말을 이어갔다.

“황숙, 제가 청주 월씨 가문의 일을 알아봤습니다. 폐하께서는 월씨 가문을 중용하면서도 전혀 좋아하질 않으셨지요. 그저 가축처럼 부리고 계십니다.

월씨 가문에서 가주를 뽑는 방법도 황실이 가하는 일종의 제약 같습니다. 황실은 비록 월씨 가문을 중용하지만 한 번도 월씨 가문을 믿은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계속 억누르기만 했습니다. 황숙, 이유가 무엇입니까?”

월씨 가문은 주나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셈이었다. 천자가 아무리 매정해도 공로가 있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가 알아낸 소식에 의하면 선황이 월씨 가문에 대한 태도도 폐하가 월령안에 대한 태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심지어 더욱 악랄했다.

고종 황제는 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월씨 가주를 아예 사람으로 대우하지도 않았다.

더 예전의 일은 그도 알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봤을 때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았다.

“이 일은 개국 시기의 은원과 관련이 있단다. 령안이도 월씨 가문 선조의 영향을 받았지.”

옛일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노인도 아주 노력해서 그때의 일을 조금 알아냈을 뿐이었다.

“전 황조가 뿔뿔이 흩어졌을 때, 여러 곳에서 번왕(蕃王)들이 분분히 군대를 일으켰단다. 청주 월씨 가문은 전 황조에서도 대부호였지. 가문의 자제들이 장사에 능해 무수한 재물을 쌓았단다.

성조 황제와 청주 월씨 가문은 오래 사귄 벗이었다. 그렇기에 월씨 가문이 처음에는 성조 황제를 지지했었지. 하지만 월씨 가문의 대낭자가 송왕을 좋아하게 되면서 그와 정을 통했어. 그래서 월씨 가문은 성조 황제를 배신하고 송왕을 지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의 일에는 모두 인과가 있기 마련이었다.

월씨 가문이 과거에 뿌린 씨 때문에 후손들이 이런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누구를 탓할 것이 못 되었다.

“그때, 송왕도 황제의 자리에 오를 능력이 있었다. 월씨의 모든 가족이 송왕을 지지했던 것은 안목이 있는 셈이었지. 하지만 송왕은 복이 없어 유주(幽州)에서 병으로 죽었다. 월씨 가문은 상인 집안이라서 황권의 쟁탈에 참여할 수 없었지. 그때, 성조 황제는 이미 세력을 확보한 뒤였다. 월씨 가문은 살기 위해 다시 성조 황제에 줄을 댈 수밖에 없었던 게야.

하지만 그때, 성조 황제는 월씨 가문을 믿지 않았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월씨 가문에 공자가 태어났다. 월씨 가문에서는 극구 부인했지만 성조는 그 공자가 송왕의 후손이라고 의심을 했었다.

성조 황제가 처음 황위에 올랐을 때, 월씨 가문을 멸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 하지만 주나라가 건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도가의 세력이 크고 국고는 가난했지. 성조의 손에 장사에 능한 사람도 없었기에 당분간 월씨 가문을 중용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하지만 성조 황제는 더 이상 월씨 가문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극도로 혐오했지. 월씨 가문에 한층, 또 한층 족쇄를 채워 월씨 가문이 조정과 황실에 쓰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커지지 못하게 했다.

성조 황제가 월씨 가문을 혐오하고 차별 대우하기는 했지. 하지만 너도 성조 황제의 영명함을 부정하지는 못할 거야.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났지만 월씨 가문은 계속해서 천자에게 쓰이면서 영원히 강대해질 가능성이 없고, 영원히 천자를 배신할 가능성도 없지 않느냐.”

이렇게 한 것은 월씨 가문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월씨 가문이 강대해진다면 천자는 절대 월씨 가문을 남겨 둘 수 없었다.

“성조 황제는 죽기 전에 유조(遗诏 - 왕의 유언)를 남겼다. 월씨 가문은 쓸 수 있되 믿을 수는 없다고. 월씨 가문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바로 구족을 멸하라고 했지. 이 유조는 모든 황제들이 다 알고 있다. 과거에 월씨 가문이 배신했던 일은 월씨 가문 사람들은 잊었겠지만 조씨 가문의 황제는 잊지 않았다”

여기까지 말한 노인은 갑자기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투도 날카로워졌다.

“육장봉, 기억해. 영원히 폐하가 월령안을 달리 볼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아라. 령안은 월씨 가문 사람이야. 폐하는 영원히 령안을 믿지 못할 것이야. 또 령안에게 월씨 가문을 강대하게 만들 기회를 주지도 않을 것이다. 알겠나?”

“황숙의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칠 년 전의 일이 없었더라도 황제는 월령안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칠 년 전의 그 일은 단지 황제가 월령안을 더욱 싫어하게 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너는 령안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하느냐?”

노인은 사람을 누를 듯한 기세로 추궁했다.

육장봉은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확신합니다.”

“황제와 척을 지더라도?”

노인의 기세는 전보다 더욱 거세어졌다.

육장봉은 피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고 굳세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노인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당분간 널 믿어 보지.”

사실 그는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육장봉을 제외하고 월령안을 지킬 수 있는 또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육장봉은 일어서서 노인을 향해 정중하게 큰절을 올렸다.

“이런 말은 나중에 월령안에게 해. 나와 말해도 소용없어. 난 령안이에게 네 얘기를 해 줄 생각이 없으니까 말이야.”

노인은 이전에 육장봉이 찾아왔던 것을 떠올리며 농담을 했다.

“월령안은 저에게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육장봉은 다시 자리에 앉아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은근히 우쭐거리는 기색이었다.

노인은 육장봉을 힐끗 보고 눈을 내리깔며 고소해하는 시선을 숨겼다.

‘육장봉 이 녀석은 왜 우쭐거리는 거야? 령안이 화를 내지 않는 거야말로 가장 무서운 일인데. 너 이 녀석, 령안이가 너에게 화를 내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것도 눈치 못 채? 이렇게 멍청해서야, 앞으로 네 녀석이 당할 일은 많겠구나…….’

노인은 그 사실을 육장봉에게 알려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싱글벙글 웃으며 육장봉이 으쓱해 하는 것을 그저 지켜보았다.

‘우리 령안이가 육장봉 이 멍청한 녀석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고 서러움을 겪었는데 육장봉은 고작 이걸 가지고 뭐? 모진 추위를 겪지 않고서 어떻게 매화가 향을 풍길 수 있겠나? 육장봉 이 녀석이 고생 좀 하지 않고는 어떻게 령안을 아끼겠어? 우리 령안이가 고생한 걸 다 겪으려면 멀었다 이 녀석아..’

육장봉은 우쭐거린 뒤에도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다시 진지한 기색으로 물었다.

“황숙, 그렇다면 지금 아포가 말하는 신부가 누구인지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내가 이미 너에게 맡기지 않았느냐?”

노인은 자기에게 차를 붓고 시선을 살짝 들어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육장봉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월 삼낭입니까?”

“아니면? 월 삼낭을 풀어 주는 일을 내가 못해서 너에게 시켰겠느냐?”

노인은 찻잔을 들고 가볍게 들이켰다. 퍽 만족한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황숙.”

육장봉은 이를 악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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