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7화 이것은 짐의 잘못이다
월씨 가문의 그 늙은 집사도 처음 만났을 때는 태도가 아주 좋았다. 묻는 말에 잘 대답하고 모든 일을 제대로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 사람은 겉으로만 공손한 척했던 것이지 실제로는 그녀를 전혀 중요시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보고한 것은 모두 별 쓸모가 없는 잡다한 일이었다. 그녀의 시간만 낭비하게 만들었다.
궁의 내관들과 여관(女官)들도 비슷했다. 그녀와 한참 동안 말했지만 전부 일상적이고 잡다한 일이었고 의미가 있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열심히 들었다.
일상적이고 잡다한 일들도 듣다 보면 문제점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궁의 사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그녀에게 대충 둘러대는 것이어도 그녀는 열심히 들어야 했다. 듣지 않으면 그나마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리니까.
후궁의 총관 상궁과 내시 총관들을 모두 한 번씩 만난 뒤, 상식국(尚食局), 상약국(尚藥局), 상의국(尚衣局), 상사국(尚舍局)을 모두 들르고 나니 날이 어두워졌다.
월령안은 재빠르게 각 편전을 모두 한 번씩 가 보았다. 노인을 만날 수도 있을까 싶었지만 그녀는 숙 태비가 아니라 숙 태비를 도와 잡무를 처리하는 사람인지라 각 궁전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없었다.
상사국에서 나온 월령안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궁전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노인도 궁 안에 있을 테지만 만날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하루 종일 걸어 다니며 능구렁이들과 대화하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쳤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끌고 숙 태비가 묵는 영복궁으로 돌아왔다.
궁전에 들어서자 숙 태비의 측근 궁녀가 앞으로 다가와 예를 올렸다.
“월 낭자, 낭자께서 요구하신 장부를 전부 가져왔습니다. 글을 아는 내관과 시녀들도 데려왔습니다.”
“옥죽(玉竹) 낭자,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감사를 표했다.
“옥죽 낭자께서 마마께 말씀 좀 전해 주세요. 제가 조금 늦게 찾아뵙고 인사드리겠다고요.”
“마마께서 미리 허례허식은 차리지 말자고 전하셨습니다. 월 낭자께서는 영복궁에서 하시고 싶은 대로 하셔도 됩니다. 마마께 인사를 올리실 필요도 없고요.”
옥죽은 월령안이 올리는 예를 감히 받지 못하고 다급히 손을 피했다.
그녀가 모시는 마마도 월 낭자의 예를 받지 못했는데 그녀가 먼저 예를 받는 것은 우스운 일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은 마마가 공무를 관할하게 된 것도 월 낭자의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 마마를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공무를 인수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무것도 몰랐다. 뭐든지 직접 물어봐야 했고 직접 알아봐야 했다. 월령안은 아주 바빴다. 그녀는 사실 숙 태비에게 문안을 갈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사양하지 않았다.
그녀는 반드시 빠르게 궁의 상황을 파악하고 공무를 제대로 맡아야 했다. 그리고 월 삼낭과 대황자의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황제는 결코 그녀를 놔 주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촉박하고 임무가 막중했다.
월령안은 편전에 도착하여 바로 장부를 펼쳐 보았다.
장부는 무려 세 상자나 되었다. 최근 오 년 동안의 출납부였다.
월령안은 상자마다 두 권씩 꺼내 읽고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낮에 총관 상궁과 내시 총관이 보였던 우호적인 태도는 역시 가식이었다.
어쩐지 그녀에게 장부를 순순히 보여 준다 했다. 이걸 보니 장부와 함께 호된 맛을 보여 줄 심산인 것 같았다.
그녀가 오늘 들렀던 각 사국(司局)의 장부를 모두 섞어 놓았다. 그런 큰 상자가 무려 세 개나 되었다.
월령안은 아무렇게나 두 권을 꺼내 펼쳤다. 한 권은 상사국 이 년 전 칠 월의 장부였고 다른 한 권은 상의국 사 년 전 오 월의 장부였다.
다음 상자를 보니 오 년 전의 장부도 있었고 올해의 장부도 있었다. 완전히 뒤섞인 것이었다.
그녀가 장부를 보려면 이 장부 세 상자를 전부 다시 정리해야 했다.
만약 그녀 혼자서 다 하려면 오늘 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장부를 다 파악하기는 커녕 밤 동안 이 장부들을 전부 분류하기만 해도 아주 대단한 것이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이럴 거라는 걸 미리 짐작했기 때문에 미리 도울 사람을 구해 놓았다.
월령안은 바닥에 있는 장부 세 상자를 가리키며 옥죽이 찾아온 내관과 궁녀에게 말했다.
“먼저 각 사국의 것을 분류하고 그다음 다시 월별로 분류하거라. 각 장부마다 흰 종이에 연월과 사국명을 써서 붙이거라. 알겠느냐?”
몇몇 내관과 궁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월령안도 조급해하지 않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회를 주었다. 잡느냐, 마느냐는 이 사람들에게 달렸다.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자기를 위해 일을 할 것을 강요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후궁의 여인이 아니었다. 당연히 척 보아도 영원히 기댈 수 있는 뒷배가 되지 못할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한참 기다리다가 월령안은 이 사람들을 포기하기로 했다. 옥죽더러 사람을 다시 찾아오라고 하려고 했는데 어린 티가 나는 내관이 나섰다.
“소인이 할 줄 압니다.”
“네 이름은 무엇이냐?”
월령안은 흥미롭게 내관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운명을 걸다니. 이 애는 배포가 작지 않군.’
“소인은 이기(李奇)라고 합니다. 낭자를 뵙습니다.”
어린 내관은 두 눈을 반짝이며 흥분을 억지로 가라앉힌 채 말했다.
“그래, 너한테 한 시진을 주겠다. 이 장부 세 상자를 정리하거라.”
말을 마친 월령안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가 다른 이들을 지시해라. 만약 이 사람들이 쓰기 불편하다면 종 상궁에게 말해 바꿔 주라고 하겠다.”
“낭자, 걱정하지 마세요. 소인이 꼭 잘 해낼 겁니다!”
어린 내관 이기는 흥분한 듯 예를 올렸다.
그는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전제는 그가 일을 잘 해내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한 시진 뒤에 다시 오마.”
수하에게 맡길 수 있는 일이라면 월령안은 절대 직접 하지 않았다.
장부를 이기에게 넘겨준 뒤, 월령안은 안방으로 들어가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또 식사를 올리라고 했다.
자신의 몸은 절대 홀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저녁에 거센 싸움을 해야 했다. 배불리 먹지 않으면 제때 기운을 낼 수 없을 것이다.
* * *
대황자가 사망했고 월 삼낭이 구출되었다.
연이은 두 사건은 황제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또 황제가 후궁을 제대로 정리하고 질서를 바로잡을 결심을 하게 만들었다.
이반반은 오늘 하루 종일 바삐 보내고 나서야 겨우 실마리를 잡았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자 이반반은 다급히 황제에게 가서 보고했다.
“폐하, 대황자의 일은 단비(端妃)의 궁에서 단서가 끊겼습니다.”
“단비라고?”
황제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원인은?”
이반반이 대답했다.
“단비 마마는 삼 년 전에 황후 마마의 궁에서 유산하셨습니다. 황후 마마께 문안 인사를 올리려던 중 대황자께서 가지고 노시던 구슬을 부주의하게 밟아 넘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삼 년 전의 그 일은 잘 해결됐지 않았느냐. 단비가 그 일로 원한을 가졌다고? 고작 그런 일로 혁이에게 손을 써? 정녕 그년이 미친 것이냐?”
황제는 두 눈을 붉혔다. 화가 나서 사람을 죽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반반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그때 단비 마마께서는 폐하께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해 달라고 계속해서 간곡히 청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마마를 해치려고 했다고도 말씀하셨지요. 폐하께서는 그 일을 황후 마마께 맡기셨습니다.
황후 마마는 그때 한 어린 궁녀를 내쫓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하셨습니다. 그 어린 궁녀가 일을 세심하게 하지 않아 대황자가 가지고 논 구슬을 미처 다 치우지 못했고, 그래서 단비가 넘어져 유산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단비는 황후를 의심한 것이냐?”
황제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이반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비께서는 황후 마마가 배후라고 주장하셨습니다. 황후 마마가 아니라도, 황후가 범인을 감쌌을 거라고요.”
“네가 조사해 보니 누구더냐?”
황제는 이반반이 일을 처리하는 습관을 알고 있었다. 혐의점이 있다면 반드시 내막을 자세하게 조사했다.
“황후께서 손을 쓰신 게 맞았습니다.”
이반반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단비께서 대황자께 손을 쓰신 것은 복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모든 운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었다. 곽 황후가 예전에 저지른 잘못은 결국 오늘날 그녀를 찌르는 창이 되었다.
“복수하기 위해? 그녀가 감히 짐의 아들에게 손을 썼다는 말이냐?”
황제는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어찌 감히!”
이반반은 바로 무릎을 꿇었다.
“폐하, 노여움을 가라앉히십시오.”
그는 감히 설득하지도, 설득할 수도 없었다.
단비가 유산했을 때 황제는 비록 마음 아파하기는 했지만 대황자를 잃은 것처럼 슬퍼하지는 않았다.
대황자는 중궁(中宮)의 적자였다. 똘망똘망 귀엽게 생겼고 영리하기도 했다. 황제는 대황자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대황자가 죽자 황제의 마음속은 더없이 고통스러웠다.
황제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는 탁자를 치고 일어나 성큼성큼, 난각으로 걸어갔다.
“짐은 단비의 구족을 멸할 것이다!”
“폐하, 분노를 가라앉히십시오!”
이반반은 이를 보고 빠른 걸음으로 따라갔지만 결국 한걸음 늦고 말았다.
황제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급하게 단비에게 가서 죄를 물었다.
단비는 황제의 앞에서 대황자를 모살한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자기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황제 앞에서 자기의 아들도 지키지 못한다고 황제의 어리석음과 무능함을 비꼬았다.
황제는 화가 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단비를 참수하고 말았다.
이반반은 막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 황제는 이미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었다.
“짐이…… 애초에 황후를 믿은 것이 잘못이었을까?”
황제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채, 멍하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땅에 쓰러진 단비를 바라보며 삼 년 전의 그날 밤을 떠올렸다.
삼 년 전, 단비는 지금처럼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로 침대에 누워 그에게 진실을 밝혀달라 간곡히 청했다.
그는 그때 황후를 믿었다. 후궁의 일은 황후의 영역이니 그녀에게 일을 맡겼던 것이다.
황후가 밝혀낸 결과가 석연치 않다는 것은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큰아들을 지키기 위해, 대황자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위해 그는 황후를 믿어 주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던 단비의 아이 보다는 당연히 대황자인 중궁의 적자가 훨씬 중요했다.
일이 끝난 뒤, 그는 단비를 위로하기 위해 많은 상을 내렸다. 또 단비를 비로 승진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불만스러웠다면 왜 한번도 그의 앞에서 그녀의 속내를 말하지 않은 걸까?
여인은 영원히 이처럼 만족할 줄 모르고 신임할 가치가 없는 것인가?
“폐하, 이것은 폐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반반은 황제가 손에 든 검을 빼앗았다. 그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지!’
후궁에서 아이를 지키지 못한 여인은 단비 한 명뿐이 아니었다. 단비는 너무 극단적이었다.
“아니, 이것은 짐의 잘못이 맞다! 만약 짐이 애초에 그토록 황후를 믿지 않았다면, 황후를 무조건 감싸지 않았다면 짐의 혁이는 억울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는 검을 이반반에게 넘겨주고 돌아서서 대전 밖을 바라보며 조금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반반, 짐이 지금 월령안을 믿는 것이 맞는 것이냐? 틀린 것이냐? 월령안은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그녀도 이 여인들처럼 내 신임을 져버릴까?”
그는 월령안을 보러 가고 싶었다. 그가 줄곧 낮잡아 봤지만 육장봉과 조계안이 높이 본 월령안을 만나고 싶었다.
그는 그가 여인을 보는 안목이 정말 그렇게 최악인지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