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화 이번이 네 마지막 기회다
월령안은 시선을 내리깔고 무릎을 꿇으며 사죄했다.
“폐하, 노여움을 가라앉히십시오.”
그녀는 황제가 왜 화가 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탓이 아니었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이 밀려왔지만 그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노여움을 가라앉혀? 짐더러 노여움을 가라앉히라고? 짐이 어제 후궁의 공무를 너한테 넘겼는데 바로 그날 밤에 월 삼낭이 구출되었다. 짐이 어떻게 노여움을 가라앉히라는 것이냐?”
황제는 월령안이 피한 것을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또 화가 났다.
‘감히 피해? 월령안은 내가 황제라는 것을 모르는 것인가?’
누구도 감히 황제의 화를 피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피한 것은 월령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월령안이 피한 것이 다행인 일이기도 했다. 만약 그러지 않아서 월령안이 다쳤다면 그는 육장봉과 조계안에게 시달려 죽게 될지도 몰랐다.
‘어엿한 제왕인 내가 이토록 굽히며 살아야 하다니…….’
“월 삼낭이 구출되어 도망갔습니까?”
월령안은 경악한 표정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설마 지금 월 삼낭이 도망갔는데 그 책임을 내가 뒤집어쓰고 있는 거야?’
“네 생각에는?”
황제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는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짐이 너한테 공무를 맡기자마자 네가 짐에게 이렇게 큰일을 저질렀구나.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하다니. 너는 무슨 쓸모가 있느냐? 너는 청주의 그 사람들한테 짐의 안목이 그들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냐?”
황제는 월령안의 멍한 얼굴을 보자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짐은 너처럼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인간을 본 적이 없다. 같은 자매면서 월 삼낭은 널 팽팽 잘만 갖고 놀고, 너를 여러 번 함정이 빠뜨리고도 몸을 쉽게 빼서 도망가지 않았느냐. 널 좀 보거라. 넌 왜 이렇게 멍청하느냐!
짐이 월 삼낭을 네 손에 쥐여 주기까지 했는데 너는 어떻게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치는 것이냐. 고작 월 삼낭도 이기지 못하면서 청주에 가서 또 뭘 할 수 있겠느냐? 짐이 너한테 또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느냐?”
황제는 아주 빠르게 말했다. 월령안은 황제가 숨을 돌리는 순간,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폐하, 폐하께서는 언제 공무를 저한테 맡기셨습니까?”
그녀는 이 죄를 뒤집어쓰고 싶지도, 뒤집어쓸 수도 없었다.
“어제! 짐이 숙 태비더러 공무를 총괄하라고 명령을 내리지 않았느냐? 왜? 숙 태비가 너에게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더냐!”
황제는 화가 나 씩씩거리며 말했다.
“폐하, 외람되오나 폐하께서는 숙 태비께 공무를 총괄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소인과 무슨 상관이 있나요?”
물론 숙 태비는 그녀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숙 태비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궁의 여인이 아니니 절대 궁의 일에 개입하지 말거라. 황제가 대놓고 말을 한 것이 아니니 계속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해야 한다.”
물론, 황제가 대놓고 말을 해도 그녀는 어리둥절한 척하며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후궁의 여인들에게 공무는 권리와 지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건 황제의 여인들한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월령안은 황제의 여인이 아니니 공무를 맡아도 잠시뿐이었다.
일시적인 권리를 위해 후궁의 마마들과 그들 배후에 있는 가문의 미움을 사는 것은 너무 멍청한 짓이었다.
특히 황제는 태후를 건너뛰었다. 태후가 있는데 공무가 어떻게 그녀들 같은 사람한테 떨어지겠는가?
숙 태비라 해도 어제 황제의 명령을 듣고 태후에게 찾아가 사죄할까 밤새 고민했다. 하지만 결국 포기했다.
황제가 사람들 앞에서 태후의 체면을 깎았는데 그녀가 태후에게 사죄를 하러 가도 태후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해도 미움을 살 일이었다. 숙 태비는 곧 달관했다. 그저 월령안에게 절대 이 일에 휘말리지 말라고 조언해 주었다. 황제도 공식적으로는 공무를 그녀에게 맡긴다고 말했으니 그녀가 막고 있는 이상 괜찮을 거라고 말이다.
월령안은 이 모든 것을 이해했고, 또 그녀를 감싸 주는 숙 태비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다. 숙 태비의 말대로 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지금 보니 소용없는 일이었다.
황제는 손을 놓지 않을 것이다. 특히 월 삼낭이 구해져서 떠났으니, 더욱.
“하!”
황제는 월령안을 모르는 척하자 화가 나 실소를 하였다.
“월령안, 너는 짐을 어리석다고 여기는 것이냐? 짐이 공무를 숙 태비에게 맡긴 것이 무슨 뜻인지 네가 몰랐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구나.”
“폐하, 소인은 단지 일개 여상인일 뿐입니다.”
이 일로 그녀는 모르는 척하려고 해도 그럴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이 공무는 반드시 그녀가 맡아야 했다.
“그런들 또 어떠하냐? 월씨 가문의 존재 가치는 바로 황실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다. 월령안, 알겠느냐?”
황실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월씨 가문은 존재할 의미가 없었다.
월령안의 곧은 허리가 구부러졌다.
“소인, 알겠습니다.”
월씨 가문은 반드시 목숨을 걸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황실이 계속해서 월씨 가문을 쓰게 해야만 그녀가 살 수 있었다.
“알았다면 네가 해야 할 말을 알 것이다.”
황제가 차갑게 물었다.
월령안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인이 월 삼낭을 놓쳤습니다. 소인은 달갑게 벌을 받겠습니다.”
“이번이 네 마지막 기회다. 후궁에 다시 문제가 생긴다면 짐은 너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그는 월령안이 또 감히 모르는 척할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
“소인, 명을 받들겠습니다.”
월령안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로 큰절을 올렸다. 황제가 그녀더러 물러가라고 말하고 나서야 바닥에서 기어 일어났다. 그녀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난각을 걸어 나갔다.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후궁의 모든 여인과 적이 된다 해도…….
월령안은 황제와 맞설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각에서 돌아온 뒤, 월령안은 숙 태비를 찾아가 그녀에게서 후궁의 장부와 궁패(宫牌)를 받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다. 그녀는 자신을 여자 관리로 여기기로 했다.
숙 태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제 인수한 공무를 전부 월령안에게 넘겼다. 그리고 월령안이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한 나이 든 상궁을 붙여 줬다.
“이 사람은 종(鍾) 상궁이다. 궁의 사람들은 모두 종 상궁이 내 옆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단다. 네가 종 상궁을 데리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은 네가 날 대리한다는 걸 알게 될 것이야. 만약 처리하지 못할 일이 있다면 와서 날 찾거라. 내가 몸은 늙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체면과 인맥은 있단다.”
“태비 마마, 폐를 끼쳐 드렸습니다.”
월령안을 무릎을 굽히며 숙 태비에게 예를 올렸다. 마음속에는 온통 죄책감뿐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숙 태비도 궁중 암투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숙 태비의 신분이면 궁에서 여생을 마음 편히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와 엮이는 바람에 벼랑 끝까지 밀려났다.
숙 태비는 참지 못하고 실소를 하였다. 그리고 월령안의 이마를 살짝 짚고 말했다.
“내가 이렇게 오래 궁에 있었는데 조금 시끄러운 것을 두려워할 리가 있겠느냐? 폐하께서 태후를 건너뛰고 내 손에 공무를 넘긴 것은 나에게 아주 좋은 일이지. 다른 사람들이 보면 황제께서 나를 제일 신임하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야.”
“하지만 마마께서는 필요가 없으시죠. 아닌가요?”
월령안은 숙 태비와 하루밖에 지내지 않았지만 그녀가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숙 태비는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숙 태비의 처지로는 현재에 만족해야만 하기는 했다. 한 태비가 궁에서 무엇을 겨룰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필요가 없지만 내 친정은 필요하단다. 궁에서 이 정도로 난리가 났으니 궁 밖은 얼마나 시끄럽겠느냐?”
숙 태비는 월령안의 손을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내 친정의 상황을 모르겠구나. 내 친정도 예전에는 한때 권세가 있는 집안이었어. 하지만 내 아버지께서는 장 승상과 정치적 견해가 맞지 않았지.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오라버니는 항상 장 승상에게 억눌릴 수밖에 없었단다. 오라버니는 선황이 등극한 해에 장원 급제를 했지만 지금도 오품 낭중(郎中)에 지나지 않아. 네 덕분에 내가 후궁에서 잠깐이라도 빛날 수 있겠구나. 조정의 그 사람들은 폐하의 뜻을 짐작하기 좋아하지. 어쩌면 폐하가 오라버니를 중용하려는 줄 알지도 몰라. 이건 내 오라버니에게는 좋은 기회야.”
“태비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공무를 잘 다스리겠습니다.”
숙 태비의 이 말에 월령안은 진정으로 걱정을 내려놓았다.
적어도 그녀가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인 건 아니었다.
“모르는 게 생기면 얼마든지 나에게 와서 물어보거라. 나설 일이 있으면 그때도 나에게 이야기해. 내가 그래도 궁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있었으니 적어도 체면은 조금 있단다.”
말을 마친 숙 태비는 잠깐 생각해 보다가 또 한마디 당부했다.
“폐하께서는 줄곧 대황자를 아꼈단다. 대황자가 그렇게 되었으니 폐하의 기분이 좋지 못할 것이다. 분위기를 자세히 살피거라. 절대 폐하의 화를 돋우어서는 안 된단다.”
모든 사람들이 황제의 성격이 온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숙 태비는 황제의 온화한 성격을 믿고 후궁에서 소란을 피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황제는 결국 황제였다. 성격이 아무리 좋아도 그건 황제가 너그러운 것이었다. 이는 황제가 화를 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성격이 아무리 좋은 사람도 화를 낼 수 있었다. 더구나 황제는 강산의 주인이었다. 황제가 성격이 좋은 제왕이 되는지 아니면 변덕스럽고 괴팍한 제왕이 되는지는 모두 황제의 뜻에 달렸다. 황제를 억누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가 너그럽게 구는 것을 그만둔다면 황제의 좋은 성격을 믿고 저지른 잘못은 모두 죽을죄가 되고 만다.
마치 곽 황후처럼 황제의 좋은 성격을 믿고 한번, 또 한 번 황제의 인내력 한계를 시험하다가 결국 화를 돋우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태비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처신할지 잘 알겠습니다.”
그녀는 한 번도 황제의 미움을 사려고 한 적이 없었다. 황제가 아무리 성격이 좋아도 그녀는 감히 그러지 못했다.
왜냐하면 황제의 온화한 성품은 한 번도 그녀에게 배풀어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월령안은 숙 태비에게 감사의 예를 올리고 종 상궁을 데리고 궁전의 일을 관리하는 상궁과 내관을 만나러 갔다.
예전이었다면 명령을 내려 그 사람들이 그녀를 만나러 오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궁 안에서의 이동이 힘들 때였다. 월령안은 하는 수 없이 직접 그들을 만나러 갔다.
지금 궁에서 유일하게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사람이 그녀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궁에서 총관의 위치까지 오른 사람들은 모두 세상 물정에 훤했다.
월령안은 오후 반나절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결론은 이랬다. 모두들 아주 정겨웠고 아주 말을 잘 들었으며 그녀를 매우 존중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