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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70)화 (470/1,004)

470화 기대하게 되네요, 령안

‘과연 내가 생각이 많은 거였군. 하긴, 최씨 가문 대공자가 눈먼 것도 아니고 어찌 이혼당한 여자가 눈에 들어오겠어. 최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나를 중시한다고 알리려는 거겠지.’

월령안은 최일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옥패를 어루만지고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잘 보관할게요.”

옥패에는 아직 최일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월령안은 곧 손을 거두어들였다.

비록 최일이 다른 뜻이 없는 걸 알고 있지만 왠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옥패일 뿐이에요. 그렇게 긴장할 필요는 없어요. 궁중에서 조심하세요. 황궁이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입궁한 다음에는 외출하지 않도록 하세요.”

최일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편안하고 거리낌이 없이 행동했다. 월령안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듯 몇 가지 조언도 해 주었다.

조계안은 최일을 힐끗 노려보았다. 다른 의도가 없어 보이는 최일의 눈빛에 미간을 찌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생각이 많은 게 분명했다. 최일은 줄곧 친구를 진심으로 대했다. 월령안을 걱정해서 최씨 가문 젊은 주인을 대표하는 옥패를 준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조계안은 마음이 언짢았다.

육장봉은 월령안에게 호각을 선물했고 월령안은 그걸 소중하게 목에 걸었다.

지금 최일은 또 월령안에게 몸에 착용하는 옥패를 직접 월령안에게 매 주었다.

조계안은 자신이 월령안에게 아무것도 준 적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시녀 두 명을 보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월령안은 싫어서 뒤돌아서자마자 보내 버렸다.

‘그렇게 싫어할 건 없잖아.’

월령안이 최일과 ‘아쉬워하며 이별’하는 모습을 보고 조계안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꾸물거리기는. 어서 빨리 가자.”

“최 대인, 걱정하지 마세요. 저 혼자 잘할 수 있어요. 돌아가서 푹 쉬세요. 요 며칠 폐를 끼쳤어요.”

월령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급히 최일에게 읍하고 뒤돌아서서 마차에 올랐다.

요 며칠 그녀는 순천부에 머물렀다. 최일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줄곧 순천부에 머물면서 집에 가지 않았다.

관아에서 며칠을 지내다 보니 최일이 아무리 젊고 건강해도 눈가에 거무스름한 그늘이 져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좋아요.”

최일은 빙긋 웃었다. 봄바람처럼 따뜻한 미소였다.

경국지색의 미인, 세상에 둘도 없는 귀공자.

월령안은 마차에 앉아 고개를 내밀다가 때마침 그 미소를 보았다. 한순간 마치 봄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백화가 만발하는 듯싶었다.

그 미소는 한 줄기 빛처럼 마음속을 비추는 듯하여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월령안도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조계안은 고개를 돌렸다가 최일과 월령안이 서로 마주 보면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하마터면 화가 치밀어 피를 토할 뻔했다.

‘이 두 사람은 뭐 하는 짓이야? 왜 이리 질척거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둘이 뭔 일이 있는 줄 알겠다.’

조계안은 언짢았지만 최일과 월령안에게 화를 내지 못하고 두위에게 소리쳤다.

“멍하게 서서 뭐해? 빨리 안 갈래?”

“네, 전하.”

두위는 변명하지 않고 부하들에게 빨리 행동하라고 다그쳤다.

마부가 채찍을 휘두르자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월령안은 최일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마차에 도로 앉았다.

최일은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의 미소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제자리에 서서 월령안이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차가 모퉁이를 돌아 그림자도 보이지가 않아서야 얼굴의 미소가 조금씩 옅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심장을 눌렀다.

방금 전 월령안이 그에게 미소를 짓는 순간, 그는 마음이 설레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최일은 얼굴을 펴고 가볍게 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설개연에 참가할 날을 기대하게 되네요. 령안.”

육장봉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최씨 가문의 설개연은 최씨 가문 자제들을 위해 아내를 선택하는 연회였다.

예전에 그는 월령안을 초대했다. 물론 월령안은 최씨 가문 자제들의 선택 범위에 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했다.

다른 사람들은 육장봉을 두려워하지만 그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월령안이 시집갔던 것을 꺼리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최일은 손을 내렸다. 금방 옅어졌던 미소가 다시금 얼굴에 피어났다. 그 미소는 전보다 더 시원하고 더 따뜻했다.

* * *

황궁 출입 금지령은 아직 해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었다. 조계안에게 있어 황궁 출입 금지령은 허울뿐이었다.

조계안은 직접 월령안을 난각 밖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더러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먼저 황제에게 가서 말했다.

그가 황궁에 계속 머무르는 건 불가능했다. 월령안이 황궁에 있으려면 황제의 보호가 필요했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반드시 황제에게 알려야 했다.

조계안이 입을 열자마자 황제는 벌컥 화를 냈다.

“월령안을 데리고 입궁했다고? 너 미쳤어? 아무나 다 데리고…….”

“흠흠……”

옆에 앉아 있던 노인이 가볍게 헛기침을 하였다.

황제의 기세가 한순간에 약해졌다.

“황숙.”

노인은 눈꺼풀을 치켜들고 온화하게 말했다.

“계안이가 이번 일은 정말 잘했구나. 폐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황제는 말문이 막혔다.

“황숙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그래 계안아, 이 일은 잘했다.”

‘황숙께서 이렇게까지 얘기하셨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황숙이 동생과 손잡고 나를 괴롭히잖아. 이러다가 언젠간 권위도 못 세우는 게 아닐까’

“사람을 황궁에 데려온 이상 잘 대접하거라. 계안, 월령안에게 조용한 곳을 찾아 주거라.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금위대를 보내 보호하거라.”

‘서둘러 멀리 떨어진 궁전을 찾아 보내거라. 일을 만들지 않도록 사람을 보내 지켜야 한다.’

황제는 월령안을 보면 칠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월령안도 피해자이기에 이제는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월령안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람이 왔는데 폐하께서 한번 만나 보십시오. 앞으로 월령안을 써야 하잖습니까. 만나 보고 그 애가 어떤지 판단하십시오.”

노인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제안했다.

월령안의 신분은 특수했다. 여인으로서 황제의 여자가 아니므로 전전(前殿)에도, 후궁에도 있을 수 없었다. 조계안이 아무리 돌본다 해도 멀리 떨어진 궁전에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궁중의 사람들은 본래 윗사람을 높이 받들고 아랫사람을 짓밟았다. 월령안이 입궁하여 만약 황제가 한 번도 만나보지 않고 곧장 편전에 머물게 한다면 궁중의 그 세상 물정에 훤한 이들은 령안을 잘 보살피지 않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그때 갑작스레 떠나는 바람에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노인도 월령안을 만나보고 싶었다.

병풍을 사이에 두고 멀리 바라만 봐도 기쁠 것이다.

노인이 말을 이렇게까지 하자 황제는 무시할 수 없었다.

황제는 월령안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울적한 마음으로 이반반을 보내 그녀를 데려오게 했다.

노인은 희미하게 웃더니 바퀴 의자를 병풍 뒤로 움직여 피했다.

월령안은 눈매를 다소곳하게 하고 이반반의 뒤를 따라 난각에 들어섰다. 그녀는 사방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심지어 고개를 들어 사람을 보지도 않았다. 자리를 잡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소인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는 상석에 앉아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뇌리에는 저도 모르게 어린 소녀가 빨간 피풍의를 두른 채 거만하게 말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저들을 모두 남풍관에 팔아 버리거라.”

그는 처음으로 그리 이목구비가 또렷한 소녀를 보았다. 또한 그렇게 악독한 소녀 역시 처음으로 보았다.

어린 소녀는 눈매가 그림 같았고 이목구비가 선경(仙境)에 사는 아이 같았다. 무뚝뚝한 표정을 지은 것이 꼬마 어른 같아서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런데 그처럼 귀여운 아이가 어른도 쉬이 가질 수 없는 모질고 독한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은 예쁘지만 마음이 독하다. 이는 월령안에 대한 그의 첫인상이었다. 그 뒤로 누가 월령안이 좋다고 해도 그는 모두 코웃음을 쳤다.

어린 나이에 그토록 악독하다니. 그런 소녀가 자라서 어딜 가겠는가.

하지만 칠 년이 지난 뒤에야 진상이 드러나고 그는 비로소 그녀를 잘못 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오해했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월령안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월령안이 그를 알아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도 그때 투수장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를 그 부잣집 도련님들과 같은 부류로 생각할 텐데 그럼 그의 명성은 어찌할 건가.

당당한 일국의 황제가 남풍관에 팔려갔던 것을 알면 어찌할 건가. 월령안을 죽여 입을 막아야 한단 말인가.

황제가 잠깐 정신을 판 사이 조계안이 짜증을 내며 말했다.

“황형, 어서 월령안을 일어서라고 하세요. 땅바닥이 차가워요. 월령안은 아가씨이고 몸도 약해요. 오래 꿇으면 몸에 안 좋아요.”

“너 진짜…….”

황제는 조계안을 못마땅하게 흘겨보았다. 뒤편 병풍 쪽에서 불만스러운 낮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말문이 막혔다.

‘내 처지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일어나거라.”

황제가 답답함을 참아가며 입을 열었다.

“폐하 감사합니다. 폐하…….”

월령안은 태연자약하게 일어섰다. 그녀는 말을 더 꺼내 황제의 은혜에 감사하려 했지만 그 순간 조계안이 옆에서 또 재촉했다.

“황형, 자리를 내주세요.”

황제는 이제 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무감각하게 이반반에게 말했다.

“이반반, 자리를 내주거라.”

“네, 폐하.”

이반반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 내고 월령안에게 낮은 걸상을 가져다주었다.

“폐하 감사합니다.”

월령안은 처음으로 입궁한 것도, 처음으로 황제를 만나는 것도 아니었다. 앞서 청희 장공주의 병을 치료해 주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황제와 접촉했다. 월령안은 황제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황제는 보기 드문 성격 좋은 군왕이었다. 사람을 싫어해도 함부로 죽이지도, 벌을 내리지도 않았다.

때문에 그녀는 황제가 두렵지 않았다.

“너…….”

월령안은 대범하게 앉았다. 황제는 본래 몇 마디 인사치레로 그녀더러 황궁에 편히 묵으라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월령안 허리춤의 옥패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너 허리춤의 옥패는 어디에서 난 거냐?”

“옥패? 이걸 얘기하시는 겁니까?”

월령안은 의외의 말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황제의 시선을 따라 최일이 그녀의 허리에 매어 준 옥패를 보게 되었다.

“맞다. 그건 네 것이냐?”

황제는 월령안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조계안이 월령안을 위해 해명하려고 했다. 이때 월령안은 옥패를 끌어 손바닥에 올려 내밀었다.

“폐하께 알려드립니다. 이건 최 대인께서 소인에게 빌려주신 겁니다.”

“최일이 너에게 빌려주었다고?“

황제는 월령안의 손에 든 옥패를 바라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최일, 미친 것이냐? 대대로 가주에게 물려져 내려오는 최씨 가문의 옥패를 함부로 빌려주다니?’

“최 대인은 소인이 황궁에 온다는 소문을 듣고 소인이 귀인을 화나게 할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 옥패를 빌려줌으로써 소인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려고 했습니다.”

월령안은 숙태비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황궁에서 그녀는 말썽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누가 도발해도 참고 양보할 것이다.

그녀는 사람이 처마 밑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는 도리를 알고 있었다.

“네가 최씨 가문 옥패로 자신감을 얻는다고? 짐이 보건대 너는 본래도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던 듯하구나.”

월령안의 말을 들은 황제는 저도 모르게 입가를 실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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