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0화 영원히 살아 있다고 여길 거예요
“나더러 너를 위해 령안이에게 사정해 달라는 것이냐?”
‘저 오만한 육장봉이 타인에게 부탁을 다 하는군.’
육장봉은 머뭇거리지 않고 시원하게 말했다.
“령안이는 황숙의 말에만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까.”
노인은 웃는 듯 마는 듯 육장봉을 흘겨보았다.
“옛날에 네 조모(祖母)께서 너더러 령안에게 잘해 주라고 말하지 않던? 혼인하면 령안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이야.”
육장봉은 침묵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그의 할머니는 월령안을 위해 편지를 썼었다. 편지도 한 통에 그치지 않았다.
그 편지의 행간 사이마다 그의 할머니가 월령안을 매우 좋아한다는 것이 드러났었다.
‘그때 나는 편지를 보고 어떻게 생각했지? 그래, 그때 나는 월령안이 정말 재주가 좋다고 생각했다. 상인답게 마음을 사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그의 할머니는 친손자보다도 월령안에게 더 신경을 썼다.
사실 그는 할머니와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 조손은 연락도 거의 없었다. 편지가 오가더라도 공적인 이야기만 하고 사적인 일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할머니가 월령안을 위해 편지 두 통을 보내왔다.
육장봉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그의 말 없는 모습만 보고도 노인은 일이 어떻게 되었던 건지 대략 알 수 있었다.
노인이 콧방귀를 뀌고서 말했다.
“애당초 너는 네 조모의 말을 들었었느냐?”
육장봉은 다시금 침묵을 지켰다.
물론 듣지 않았다.
들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노인에게 부탁하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령안이가 내 말을 듣는다손 치자. 그런데 내가 왜 우리 애한테 너 때문에 서럽게 지내라고 해야 하느냐?"”
노인은 육장봉을 조소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경멸조로 말했다,
“령안이가 삼 년 동안 겪었던 서러움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냐?”
노인은 월령안이 삼 년 동안 알게 모르게 비웃음을 받았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 삼 년 동안 월령안이 사람들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 몰래 슬퍼하던 것을 떠올리면 여전히 심장이 꼭 죄어들어 몹시 고통스러웠다.
육장봉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에도 불만이 서렸다.
“그 아이가 육씨 가문에 시집가서 어떻게 비웃음당했는지 아느냐? 다들 육씨 가문에서는 부인을 맞아들인 게 아니라 대단한 집사를 맞아들였다고 했다. 령안이가 네 아내였기 때문에 조롱과 모욕을 당하고 있었을 때, 남편인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너희 육씨 가문 사람들은 또 어디에 있었느냐? 령안이는 이혼당할 때도 육씨 가문에서 볼품없이 쫓겨났지. 너희 육씨 가문은 걔한테 마지막 체면과 존엄마저도 남겨 주지 않았다. 그때도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말을 미친 노인은 비웃으며 말했다.
“육장봉, 너는 이제야 처음으로 서러움을 겪었구나. 이제 시작이지 않느냐. 너는 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더러 령안이를 달래달라는 거냐? 너 때문에 또 무슨 서러움을 당하라고?”
육장봉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황숙, 오해이십니다. 저는 령안이에게 다시 서러움을 겪으라는 게 아닙니다. 제발 황숙께서 령안이를 설득해 주십시오. 지금 성안은 안전하지 못합니다. 군영이야말로 지금 그녀에게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육장봉은 변명하지 않았다. 지난 일은 이미 지나갔고 그가 이제 말해 봤자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난날보다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고 미래를 더욱 중요시하였다.
“령안이는 그래서 지금 어디에 있느냐?”
노인은 눈썹을 찡그리고 불쾌해서 물었다.
“순천부에 있습니다.”
육장봉은 여유 있고 차분했다. 느긋하게 입을 열어 말했다.
“황숙, 하룻밤 사이에 서른여 명이 다쳤습니다. 그중에 영리한 사람은 분명 칠 년 전의 일을 떠올릴 겁니다. 그렇게 되면 령안이를 함께 떠올릴 겁니다.”
“너……, 지금 날 협박하는 것이냐?”
노인의 눈빛은 한순간 날카로워졌다. 온몸에 살기가 감돌았다.
육장봉은 고개를 저었다.
“오해입니다. 저는 사실을 알려 드리는 겁니다.”
노인은 하찮다는 듯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조현음의 아들도 역시 늑대 새끼였군. 넌 네가 령안이를 보호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이냐?”
“저 말고는 월령안을 지킬 사람이 없습니다.”
육장봉은 자신만만하고 오만방자했다.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한마디 덧붙였다.
“황숙, 암황령을 조금 급하게 주셨습니다.”
“너……!”
노인의 동공이 좁혀졌다. 육장봉의 말뜻을 알아차리자 책상 위에 있던 다구를 집어 육장봉에게 내던졌다.
“썩을 놈, 꺼져라!”
육장봉은 일어서서 날아오는 다구를 피했다.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노인에게 예를 올렸다.
“황숙, 지금 세대가 그 전 세대의 일을 책임질 겁니다. 령안은 마음 놓고 제게 맡기십시오. 여생 동안 제가 지켜 줄 겁니다.”
노인은 마음속에 울화가 치밀었다. 육장봉이 태연자약하게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 우리 령안이는 연약한 토사(莵絲 - 새삼, 덩굴식물로 하얗고 작은 꽃이 핀다)가 아니다. 네가 보호하지 않아도 스스로 빈틈없이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아이야!
육장봉,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거라.”
육장봉은 변명하지 않고 말했다.
“황숙, 조계안이 곧 찾아올 겁니다. 황숙은 황숙으로서의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전에는 신분이 밝혀지지 않아 이 뜰에 숨어서 월씨 가문의 문객, 사부로 지내셔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실 수 없습니다. 황숙께서 일찍 결단을 내리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치고 육장봉은 노인에게 읍하여 예를 올렸다. 그 모양이 아주 예의 바르고 표정도 온화했다.
그는 노인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인은 그를 바라보며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강산에는 시대마다 인물이 나타나 각기 수백 년을 재능을 떨친다.
노인은 그도 나이가 들었음을 인정 해야 했다.
* * *
육장봉이 떠난 후, 노인은 잠깐 홀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찻물이 다 식고 나서야 바퀴 의자를 움직여 되돌아갔다.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회색 옷의 하인이 그 모습을 보고 소리 없이 다가가서 바퀴 의자를 밀었다.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령안이를 찾아가거라. 앞으로 그 아이를 섬기거라.”
“저는 주인님의 사람입니다.”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니까 나 대신 네가 그 아이를 잘 지켜야 한다. 난 너 말고는 아무도 믿지 못하겠구나. 육장봉도 믿을 수 없어.”
사실 노인은 스스로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월령안을 보호할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이제 노인에게는 그의 꼬마 령안과 더 오래 함께할 방법이 없었다.
“주인님, 대장군은 작은 아가씨를 소중히 여기고 있습니다. 그가 작은 아가씨를 잘 보호해 줄 겁니다.”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이 딱딱하게 말했다.
노인은 눈을 감아 눈 속의 비웃음을 감추었다.
“어림없다. 육장봉은 오늘 육비우를 위해, 천하의 대의를 위해 령안에게 약을 내놓도록 강요했었지. 그러면 다음에는 천하의 대의를 위해, 주나라를 위해 령안에게 죽으라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육장봉이 훌륭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육장봉은 훌륭한 놈이야. 하지만 육장봉은 짊어져야 할 짐이 너무 많다. 내려놓을 수 없는 책임이 있으니 순수하게 령안이를 위해서 살 수는 없다는 말이다.”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주인님, 그건 남편이 아니라 자아가 없는 사사를 찾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아가씨가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흥! 우리 령안이 눈에 차지 않으면 그건 그 사람이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노인은 화가 나서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회색 옷의 하인은 결국 입을 다물고 속으로 말했다.
‘네, 네. 주인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두 사람은 묵묵히 본채까지 걸었다.
본채 건물이 가까워지자 둘은 멈췄다. 본채 건물 안에 손님이 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드디어 이날이 왔구나.”
노인은 가볍게 웃었다. 표정에는 조금의 느긋함도 섞여 있었다.
“내년이면 네가 현음에게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령안이가 너를 북요로 데려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주인님, 원하신다면…….”
회색 옷을 입은 하인에게는 여전히 살기가 남아 있었다.
노인은 손을 저었다.
“십 년이구나. 충분하다. 허나 꼬마 령안이의 가족들은 모두 그 앞에서 죽었어. 그러니 나는 꼬마 령안이가 내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가거라.”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대답하고는 뒤돌아서 떠났다. 노인은 바퀴 의자를 움직여 본채로 들어갔다.
얼마 안 되어 본채에서 노인과 황제, 조계안이 나왔다.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은 즉시 떠나지 않고 어둠 속에 숨어 노인이 입성할 때까지 몰래 호위했다. 노인이 안전하게 황궁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하인은 월령안을 찾아 순천부로 갔다.
월령안은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서(徐) 아저씨, 어떻게 오셨어요? 영감님께서 몸이 안 좋으세요? 제, 제가 가서 손불사를 데려올게요.”
월령안은 말을 하자마자 곧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은 코가 시큰해져서 월령안을 가로막았다.
“작은 아가씨, 주인님은 무사하십니다. 다만 집으로 돌아가셨을 뿐입니다.”
“지, 집으로 돌아갔다고요?”
월령안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집으로 돌아갔다니, 무슨 뜻이에요? 영감님……, 영감님이 저를 버린 거예요? 제가 진짜 가족이 아니어서, 피가 이어지지 않아서 저를 버리는 거예요?”
“작은 아가씨, 사람은 원래 다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주인님의 몸은 아가씨께서도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결국 가족들과 다시 만나야 합니다.”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이 말하면서도 내심 한탄했다. 그는 월령안을 어찌 위로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는 남을 위로하는 능력은 전무(全無)했다.
“제가 잊었네요. 영감님은 제가 아니었죠. 저 말고도 가족이…….”
월령안은 노인을 위해 기뻐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월령안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억지로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원해서 가신 거예요?”
“네.”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은 주저함이 없었다.
“이미 결정하셨던 거죠, 그렇죠?”
그렇지 않으면 그리 쉽게 그녀의 약을 보냈을 리가 없었다.
노인은 그녀가 노인에게 선물한 것이라면 실 한 오라기도 무척 소중히 여겼다.
노인은 그녀가 해 준 옷도 자주 입었지만 좀처럼 훼손되는 법이 없었다. 몇 년 전 의복도 보기에는 새 옷과 별로 차이가 없었다.
육장봉하고는 정말 달랐다.
육장봉은 그녀가 준 물건을 소중히 여긴 적이 없었다. 어쩌다 한 번 그녀가 지은 옷을 입어도 쉽사리 망가뜨렸고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네. 주인님께서 바라셨습니다…….”
회색 옷을 입은 하인이 고개를 숙이고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주인은 영원히 월령안의 마음속에 살아 있기를 원했다.
슬기롭고 강대하기만 주인은 나이가 들자 오히려 가랑잎으로 눈을 가리려 했다. 천진하게도 월령안이 그의 죽음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면 영원히 살아 있다고 여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가 사실을 숨겨도 노인의 꼬마 령안은 이내 모든 것을 깨달았다.
월령안은 우는 것보다 더 초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분이 영원히 살아있다고 여겼으면 하시는 거겠죠. 영감님은 제가 다시는 가족과의 사별을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셨으니까요. 그분은 제가 영원히……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거예요.”
“작은 아가씨, 아가씨는 주인님께서 유일하게 걱정하는 분입니다.”
그의 주인은 죽음에 임해서도 월령안을 위해 생각했다.
“네, 저도 알아요. 그래서 그분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요. 전 영감님의 부고를 받지 못하는 한 영원히 그분이 살아 계신다고 생각할 거예요.”
월령안은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애써 웃으려 했다. 하지만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노인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잔인한지, 아니면 노인이 그녀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이 더 잔인한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단지 지금 매우 괴로웠다.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