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령안이 저 때문에 화났습니다
육장봉은 어젯밤 소리 없이 성안에 나타났다가 아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그는 어젯밤 일에 연루될 수 없었고 그렇게 생각할 사람도 없었다.
조계안은 자신이 육장봉의 함정에 걸려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 덤터기는 쓰지 않으려고 해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단념하지 않았다. 입궁하여 황제에게 보고할 때 어제 일어난 일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모두 털어놓았다.
황제의 반응은 모두 육장봉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는 지하 투수장에 관한 일을 듣고는 안색이 좋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또한, 어젯밤 성안에서 조정 원로 대신의 아들들에게 폭행을 감행한 사람은 육장봉이며, 그가 월령안을 위해 했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조계안이 억울했다. 무언가 더 얘기를 더 하려 했지만, 황제는 불쾌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막았다.
“조계안! 그만 하거라!”
“황형, 제 말 좀 믿어 줘요. 어젯밤 일을 저지른 사람은 육장봉이라고요. 육장봉은 어젯밤 사람들을 거느리고 북요의 수렵대를 습격한 뒤 부상 당한 척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거느리고 조용히 입성해서…….”
“계안아. 네가 덤터기를 다른 사람에게 씌워도 짐이 다 용서하마. 이렇게 큰일을 저지르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하지만…….”
“황형……!”
“계안아, 사실 짐은 매우 언짢다. 네가 월령안을 위해 이렇게까지 큰일을 저지르다니. 하지만 더 언짢은 것은 네가 책임을 장봉이에게 전가하려 드는 거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육장봉에게!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어찌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책임질 용기 하나 없는 것이냐?”
황제는 어두운 얼굴을 하고서 마음속의 분노를 억눌렀다. 동생이 자신의 기대에 못 미쳐 한스러운 듯이 조계안을 바라보았다.
‘월령안이 대체 어디가 좋은 거지? 계안이는 월령안에게 완전히 미쳤어. 장봉이마저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다니.’
조계안은 화가 나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결국 얼굴에 썼던 가면을 끌어 내렸다. 그는 육장봉에게 형편없이 맞았던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었다.
“황형, 제 얼굴을 보세요!”
“네 얼굴…… 계안아! 이게 웬일이냐?”
황제은 깜짝 놀랐다가 즉시 화를 내며 말했다.
“설마 내가 너를 믿게 하려고 자해까지 한 거냐?”
조계안의 얼굴은 부기가 가라앉아 이른 아침처럼 퉁퉁 부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멍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자해라뇨! 이건 육장봉이 때린 겁니다!”
조계안은 가면을 내던지고 화가 나서 펄쩍 뛰었다.
“물론 저도 그 인간쓰레기들을 찾아서 죽는 것보다 못하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그럴 시간도 없었어요. 황형, 믿든 안 믿든 간에 어젯밤에 그 인간쓰레기들을 폐인으로 만든 건 육장봉이지 제가 아닙니다!”
황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알았다, 알았어. 믿으마.”
조계안이 노발대발하며 팽이처럼 돌고 있었다. 황제는 동생의 성질을 더 긁으면 조계안이 이성을 잃고 날뛸까 두려웠다. 마음속 불만을 가까스로 누그러뜨리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계안아, 네 말이 맞다 치고, 어떻게 뒷수습할 생각이냐? 이렇게 많은…….”
“육장봉이 저지른 일이에요. 저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조계안은 마음 같아서는 정말 육장봉을 잡아다가 그 스스로 황형에게 죄를 시인하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계안은 알고 있었다. 설령 육장봉이 자기 입으로 인정하더라도 황형은 믿지 않을 것이며 육장봉이 자기의 죄를 뒤집어 썼다고 생각할 것이다.
‘육장봉, 음험하고 교활하며 비열하고 파렴치한 소인배!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덤터기를 썼어.’
황제는 한숨을 쉬고 하는 수 없이 말을 바꾸었다.
“그래, 좋아. 그래서 장봉이는 여자를 위해 이렇게 큰일을 저질러 놓고 도대체 어떻게 뒷수습할 생각이라더냐?”
조계안은 황제의 체념한 듯한 말투를 듣고 그가 여전히 눈곱만큼도 자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덕분에 식어가던 화가 치밀어 눈이 빨개진 채 이를 갈며 말했다.
“육장봉은 닷새 이내에 양국 비무의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되면 북요인이 우리에게 더는 위협이 되지 못하니 성 밖의 대군을 제가 움직일 겁니다. 정서 사건을 돌파구로 삼아 그와 관련된 자들을 먼저 한 번 걸러내고 장 부승상이 사직하게끔 한 뒤 천천히 다른 사람들까지 청산할 계획입니다.”
조계안은 말하면서 붉은색 편지 한 묶음과 장부책을 황제 앞에 바쳤다.
“이는 최근 며칠 동안 제가 조사해 낸 증거들입니다. 정서와 엮인 부정부패 사건은 미치는 범위가 아주 넓습니다. 장 부승상, 소 승상의 문생들이 모두 참가했더군요. 하지만 장 부승상은 뒷처리를 아주 깔끔하게 했어요. 이를 빌미로 그를 완전히 끌어내리기는 역부족이지만, 사직하게 만들 수는 있습니다.”
황제는 손이 가는 대로 훑어보다가 위의 놀라운 숫자를 보고는 노기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자신이 있느냐?”
“본래는 오륙 할 정도밖에 확신이 없습니다. 육장봉이 어젯밤 한바탕 난리를 피웠잖습니까. 구리파 사건의 내막을 잘 아는 장 부승상은 제 발이 저릴 게 분명합니다. 장씨 가문의 체면과 명성을 위해 한발 물러설 겁니다. 그러면 칠팔 할 정도는 성공할 거라 자신할 수 있습니다.”
조계안은 육장봉을 마음속으로 천백 번 욕했다. 하지만 기회가 있으면 황제 앞에서 육장봉을 위해 좋은 말을 아끼지 않았다.
‘어찌 되었건 육장봉도 형제이니. 별 수 없지.’
“네 말대로 하거라.”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무엇이 떠올랐는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구리파 사건은 더 이상 조사할 필요가 없다.”
“황형, 그때 어떻게 들어갔습니까? 설마 참가자 중 한 명은 아니겠죠?”
조계안은 황제가 남풍관에 팔려 갔던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이 일을 조사하지 못하게 하는 걸 알고 있었다.
제왕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때 그 어둠 속의 남풍관이 그토록 말끔히 없어져서 월령안이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 없게 된 일에는 그와 육장봉의 공로도 있었다.
이 역시 인과응보인지도 모른다. 월령안은 황제를 잘못 팔았고 황제는 그녀의 유일한 단서를 끊어 버렸다.
하지만 그때 황제가 성장한 월령안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면, 이미 황제는 이미 죽거나 혹은 죽는 게 나은 상태에 놓였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냐?”
황제는 화가 나서 조계안을 노려보았다.
“짐은 그때 잘못 들어간 것 뿐이다! 짐은 무슨 장소인지도 전혀 몰랐다. 쫓기다 보니 어쩌다 섞여 들어가게 된 거다. 들어가서 차 한 그릇만 마셨을 뿐이야! 그런데 그 차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얼마 안 되어 의식을 잃었고, 짐이 깨어나서 나가려고 했을 때는…….”"
황제는 그때 팔려갔던 일을 다시 말하고 싶지 않아 퉁명스럽게 말했다.
“됐다. 그때 일은 월령안도 피해자이니 짐도 탓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젯밤 일! 조계안, 경고한다. 한 번 더 그런 일이 있으면 짐은 절대 월령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월령안이 독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조계안을 망치는 화근임은 분명했다.
그의 동생은 그녀를 위해 미친 것처럼 행동했다. 대세를 살피기는커녕 조정 원로 대신의 아들들에게 손을 썼을 뿐만 아니라 못나게 육장봉에게 덤터기를 씌우려고 했다.
지금의 정세가 좋지 않고 그 또한 꾀병을 부리고 있는 상태이기 망정이다. 아니라면 반드시 월령안을 궁중에 불러들여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도록 따끔하게 일깨워 주었을 것이다.
조계안은 말문이 막혔다.
‘그래. 변명하지도 말자. 변명해도 소용 없는 걸 알잖아.’
육장봉은 평소에 됨됨이가 좋아 황형의 안에서 좋은 인상으로 각인되었다. 게다가 그 시간에 변경에 있을 수가 없었던 완벽한 증거까지 있었다.
황형뿐 아니라 그 피해자의 가족들도 손을 쓴 사람이 육장봉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칠 년 전 사건을 떠올리고, 더불어 월령안이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어도 말이다.
육장봉은 정말 그에게 큰 골칫거리를 떠넘겼다.
조계안은 속이 갑갑하기만 했다. 하지만 체념하고 가면을 쓰고서는 순천부로 최일을 찾아가 이 사건을 의논하려 했다.
하룻밤 사이에 서른여 명이 피해를 보았다. 그중에는 태후의 조카도 있었다. 칠 년 전의 사건도 언급할 수 없었다. 그는 어떡해서든 유씨 가문, 장씨 가문에 해명을 해 주어야 했다.
조계안이 이 놀라운 사건을 위해 동분서주할 때, 육장봉은 노인과 함께 명월 산장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 * *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흰 연기가 아스라하게 피어오르며 차 향기가 사방으로 넘쳐났다.
육장봉은 노인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차주전자를 들어 앞의 빈 잔에 가득 따라 두 손으로 공손하게 노인에게 건넸다.
“보내 주신 약은 감사합니다.”
노인은 찻잔을 받아들고 한 모금 마시더니 가볍게 탄식했다.
“령안이의 선물을 내놓은 것일 뿐이다.”
“령안이 언짢아했습니다.”
육자봉은 찻잔을 들었으나 마시지 않고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무척이나…….”
노인은 찻잔을 든 손을 잠시 멈칫했다가 곧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흥. 우리 령안이는 나한테 화내지 않을 거다. 그저 가슴 아파하겠지. 결국 내가 자신을 위해서 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육장봉은 할 말을 잊었다. 분명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 텐데도 노인은 그저 모른 척했다.
그는 화가 나지도 않고 부럽지도 않았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령안이 황성사에서 칠 년 전 구리파 일을 얘기했습니다.”
빠직!
노인이 손에 들었던 찻잔이 부서졌다.
“……조계안이 다그쳤느냐?”
“아시지 않습니까. 령안이 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도 그녀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육장봉은 사실 조계안이 그랬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노인의 젊을 적 명성과 수단을 떠올렸다. 그는 조계안이 월령안을 다그쳤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어쨌든 간에 그들은 형제였다. 그가 조계안을 때리는 것과는 결이 달랐다.
“령안이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령안이, 그 아이가 어떤 성격인지는 내가 너보다 더 잘 안다. 만약 너희들이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령안이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을 거다.”
노인은 흰 손수건을 꺼내 느긋하게 손의 물을 닦았다.
노인의 동작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웠지만 음침하고 차가운 살의가 서려 있었다. 왠지 모르게 사람을 떨리게 하는 분위기였다.
노인이 화를 내기 전에 육장봉은 한발 앞서 입을 열었다.
“어젯밤, 영녕후 차남을 포함한 서른한 명은 모두 벌을 받았습니다. 강남 쪽도 설씨 가문을 통해 사흘 안에 손쓸 겁니다.”
노인은 마음속으로 만족했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부잣집 도련님 몇 명을 혼내 준 것 뿐이잖나. 그렇게 자랑스레 말할 만한 게 아니다. 그 쓰레기 몇은 골칫거리가 아니지. 골칫거리는 그들 뒤에 있는 가문이다.”
“닷새가 지나면 폐하께서 정신을 차리실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한차례 척결이 있을 겁니다.”
당연히 화근을 없애 후환을 남기지 말아야 했다.
“나쁘지 않구나. 간신히 네 죄를 덮겠어.”
노인의 엄숙한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들이 벌 받는 꼴을 보게 되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칠 년 전에 있었던 일이 월령안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는 본인 외에 아무도 모른다.
그 일 이후 그는 월령안과 일 년 동안 함께 지냈다. 그녀를 상인 무리에 던져넣고 대상인들을 따라 방방곡곡을 다니게 했다. 그제야 월령안은 차츰 그 기억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일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는 건 아니었다. 그 일을 꺼내면 월령안은 한동안 우울해했다.
육장봉은 또다시 차주전자를 들어 노인에게 차 한 잔을 따르면서 두 손으로 잔을 받쳐 들고 노인에게 올렸다. 그러고는 살짝 억울한 듯이 말했다.
“황숙, 령안이 저 때문에 화가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