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화 믿는 구석이 있어 무서운 게 없다
최일은 얼굴을 살짝 굳히고 말하지 않았다. 여전히 동의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월령안은 냉소했다.
“제가 지나친 것 같아요?”
“이성적으로는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감정적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군요. 현음 장공주로 육장봉을 자극하는 건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당신과 육장봉 사이의 일에 현음 장공주를 끌어들이다니. 육장봉은…… 마음이 괴로울 거예요.”
최일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군자이지만, 저는 아닌 거예요. 제게 그런 선은 없어요. 오직 지고 이기고만 있을 따름이죠. 육장봉은 제 적수예요. 지지 않으려면 전력을 다해서 그에게 반응할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해요. 그리고 육장봉이 마음에 상처를 받는 거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제가 그 사람한테 뭐라고요. 왜 그 사람을 위해 생각해야 해요?”
‘남을 위협할 때는 원래 남이 아픈 곳을 찔러야 하는 거 아닌가?’
이 수법은 전부 육장봉과 조계안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마음을 내려놓았다고 해도 친구로 남을 수도 있잖아요. 꼭 이래야만 하나요?”
최일도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육장봉과 월령안 사이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부부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겠어요? 당신처럼 군자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못 해요. 저는 육장봉을 친구로 대할 수 없어요.”
만약 나중에 육장봉이 그녀를 유혹하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다면, 어쩌면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는 이 마음 또한 천천히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육장봉을 친구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만약’이라는 건 없다.
“최 공자, 당신도 거리낌 없이 굴고, 그를 쥐락펴락하잖아요. 당신도 육장봉이 당신에게 호감이 있는 걸 알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가 당신에게 호감이 없다면, 당신은 감히 그 사람의 성미를 건드릴 수 있나요?”
최일은 어두워진 눈빛으로 엄숙하게 말했다.
“령안, 잘 알잖아요. 오늘은 바로 당신이라서, 육장봉이 참은 거예요. 오늘 만약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어림도 없었어요. 설령 황제 폐하라고 해도 눈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면, 육장봉은 아마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
“어머, 사랑을 받는 사람은 워낙 믿는 구석이 있어서 무서운 줄 모른답니다. 그것도 모르세요?”
월령안의 눈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
최일은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육씨 가문에 머물던 삼 년 동안 육장봉이 나 몰라라 했던 과거를 떠올리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 당시의 육장봉은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어서 두려울 게 없었다.
그는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나랏일을 위해 집안일을 소홀히 했던 건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더라도, 삼 년 내내 편지를 쓸 시간을 짜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편지로 월령안이 육씨 가문에 시집온 목적을 캐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육장봉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월령안이라는 사람의 존재를 무시한 채, 월령안이 장군 부인으로서 육씨 가문을 위해 헌신한 모든 것을 마음 놓고 누렸을 뿐이다.
그녀의 말처럼 믿는 구석이 있어 무서운 게 없었던 것이다.
최일은 길게 한숨을 토해내더니 다시 물었다.
“령안,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은…… 도대체 육장봉이라는 그 사람인가요, 아니면 당신 상상 속의 육장봉인가요? 당신이 육장봉을 좋아한다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요? 왜 그 사람이 조금 못되게 굴었다고, 그 좋아했던 마음을 다 거두어들이는 건가요?”
“최일, 이런 걸 묻는 걸 보니 당신은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이 없는 게 분명하군요. 제가 좋아하는 육장봉은 그냥 육장봉이었어요. 알겠어요?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할 때는 그냥 그 사람이 어떤 육장봉이어도 상관이 없었거든요. 어떤 모습이든 내 눈에는 모두 최고였으니까! 설령 저를 저버렸다 해도, 제가 그를 대신해서 그를 좋아할 이유를 수없이 많이 만들었어요.
저는 육장봉을 미워하지도 않았어요. 조금이라도 탓한 적도 없다구요. 저는 줄곧 저 자신만을 탓했어요. 제가 평범해서, 뛰어나지 못해서 육장봉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고요. 육장봉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걸 뻔히 알면서도, 계속 집착하고 내려놓지 못하는 제가 천박하다고 탓했어요.”
월령안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최일, 이 일이 있기 전까지 전 육장봉을 탓한 적이 없어요. 조금도 탓할 수가 없을 정도로 좋아했거든요. 믿어져요?”
월령안이 이렇게 솔직하게 마음속의 생각을 이야기한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꾸미지 않은 감정을 내보인 것이 조금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최일은 월령안이 자기를 속이지 않았음을 알았다. 월령안은 그를 속일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육장봉을 탓하고 있잖습니까. 지금은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거두어들였나요?”
최일이 물었다.
“최일, 저는 육장봉을 탓하지 않았어요.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게 그 사람 잘못도 아니잖아요. 제가 무슨 자격으로 그 사람을 탓하겠어요.”
월령안은 여전히 최일을 보지 않았다. 자기에게 말하는 건지, 최일에게 대답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은 육장봉을 탓하지는 않았지만, 크게 상처를 줬어요. 당신은 상대를 좋아하면 살리려 하고, 미워하면 죽이려고 해요. 당신의 사랑과 미움은 너무나 강렬하군요. 상대고 자신이고 모두 상처를 입잖아요. 대체 육장봉에게는 무슨 잘못이 있는데요?”
최일은 참다못해 육장봉의 억울함을 대신 토로해 주었다.
그는 조금 전에 육장봉의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는 화가 치밀어도 자해할지언정 월령안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래요! 육장봉은 잘못한 게 없죠. 그러면, 그러면 저는 뭘 잘못했죠?”
월령안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최일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제 사랑도, 미움도 너무나 강렬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제가 그 사람을 좋아하든, 내려놓든 상관없어요. 전 단 한 번도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적도, 번거롭게 한 적도, 미워한 적도 없으니까요. 제가 조금 전에 상처를 준 것도 결국 그 사람이 먼저 저를 건드렸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월령안이 냉소했다.
“당신 말대로, 육장봉이 저를 좋아한다면 제 모든 걸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요? 나쁜 일이든, 좋은 일이든.”
최일은 말문이 막혔다.
‘내가 졌다! 내가 왜 방금 사랑을 잃은 여자와 이치를 따지려고 했을까? 아까의 교훈으로는 모자랐나?’
최일은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는 현음 장공주를 끌어들여 육장봉을 자극했다고 월령안을 책망할 수도 없었다.
월령안이 말했듯이, 그녀는 육장봉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육장봉의 심정을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가.
게다가 월령안이라고 마음이 편하겠는가.
최일은 눈을 감고 휴식하는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눈을 감았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의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는 말할 권리가 없었다.
* * *
마차는 빨리 달렸지만, 관도로 갔기 때문에 가는 길은 안정적이었다. 월령안은 마차에서 한숨 자다가 성에 들어와서야 깨어났다.
마차가 성에 들어오자마자 황성사 시위가 왔다. 월령안을 데리고 황성사로 가려 했다.
최일은 당연하게 교섭하러 나서려 했다. 그러나 월령안이 한발 앞서 문을 열었다.
최일은 월령안을 붙잡았다.
“령안, 나한테 맡기세요.”
“어차피 조왕 전하를 만나야 해요.”
월령안은 고개를 저으며 최일의 호의를 거절했다.
“저는 조왕 전하와 아직 이야기를 끝내지 못했거든요.”
“무슨 일이 있으면 조왕 전하께 순천부에 와서 말씀하라고 하지요.”
최일은 손을 놓지 않았다. 월령안은 돌아서더니 최일의 손에서 자신의 옷자락을 빼내었다.
“최일, 저는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아요.”
월령안은 말을 마치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황성사의 마차로 갈아타고 시위와 함께 황성사로 갔다.
최일은 말리지 못하고, 마부에게 말했다.
“황성사로 가자.”
최일은 월령안의 뒤를 따라 황성사에 도착했다. 월령안은 최일을 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일이 오고 싶다면 오라고 해야지, 뭐. 어차피…….’
어차피 육장봉을 놓기로 했다. 칠 년 전의 일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 더 는다고 해서 큰일이 날 것도 아니었다.
월령안은 황성사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가는 내내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했다.
최일은 월령안의 상태가 어딘지 이상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어디에 별다른 점이 있다고 콕 집어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뒤를 묵묵히 지킬 수밖에 없었다.
마침 조계안은 황성사에 없었다. 그러나 시위가 월령안이 자발적으로 황성사에 왔으며, 그와 간밤에 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하려 한다고 보고했다. 그는 당장 황궁에서 꾀병을 앓고 있는 황제를 내버려 두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하여 황성사로 달려갔다.
황성사에 도착하자마자 조계안은 손에 든 말고삐를 던져 버렸다. 그리고 부잣집 도련님처럼 건들거리는 모습으로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조급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월령안은 황성사 취조실에 앉아 있었다. 조계안은 안으로 들어가 한쪽에 앉아 있는 최일을 보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월령안의 앞에 앉았다.
“말해 봐. 최일을 데리고 찾아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냐?”
“대인께서 칠 년 전의 일을 알고 싶으시다면서요? 지금 말씀드릴게요.”
월령안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온몸은 경직되어 있었다. 눈매에는 한기가 감돌았다.
조계안은 위아래로 월령안을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약을 잘못 먹은 건 아니지?”
‘엊저녁에는 맞아 죽어도 말하지 않을 기세였는데. 오늘은 왜 갑자기 먼저 말하겠다고 하지? 월령안이 충격이라도 받았나?’
“정말 들으시겠어요? 기회는 단 한 번뿐이에요.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저는 평생 다시는 말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오늘 이후로 다시 입을 열 용기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말해봐라!”
조계안도 똑바로 앉았다. 두 손을 탁자 위에 얹어 두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에게서 무슨 이상한 점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음침한 눈빛으로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월령안은 진흙으로 빚은 조각상처럼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얼굴도 무표정하기만 했다.
월령안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대인은 투수장(鬪獸場)을 아시나요?”
“화제를 돌리지 말고 칠 년 전 이야기를 해라.”
조계안은 반나절이나 기다리다가 이 한마디를 듣게 되자 살짝 언짢아졌다.
월령안은 그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칠 년 전, 변경의 귀공자들 사이에서 투수가 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닭, 개, 귀뚜라미, 소, 호랑이 등등, 무릇 싸움을 할 수 있는 거라면 모두 갖고 놀았어요. 하지만 이런 놀이라는 게 많이 놀고, 오래 놀다 보면 다 거기서 거기잖아요. 결국 짐승은 짐승일 뿐, 아무리 피비린내가 풍기고, 자극적이라 해도, 많이 보다 보면 역시 재미가 없어지죠.
소여방을 비롯한 귀공자들은 금세 투수에 흥미를 잃었죠. 그때 아랫사람 중 누군가 사람으로 짐승을 대신하자고 했어요. 투수를 투인(鬪人)으로 바꾼 거예요. 하지만 단순히 남자 둘이서만 싸우면 자극이 적잖아요. 더 자극적인 걸 추구하려면 판을 키워야 했죠.
예를 들어 사람과 짐승이 싸우게 한다거나, 여인을 더하는 거예요. 특히 순진하고 풋풋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들을 데려다가 흥을 돋우는 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