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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51)화 (451/1,004)

451화 저를 보내 주십시오

육장봉의 친위대는 바로 군영에 있었다. 그들은 호각이 울리자마자 재빠르게 달려왔다.

“월 낭자? 왜 그러세요?”

“월 낭자, 괜찮으십니까?”

육십이가 가장 앞장서서 달려왔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걱정뿐이었다. 육이는 조금 늦었지만, 역시 걱정스레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저는…….”

월령안이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육장봉이 바람처럼 다가오더니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말했다.

“월령안, 호각을 불었소?”

“맞아요, 대장군. 제가 호각을 불었어요. 지금 회수하실 건가요?”

월령안은 육십이에게 위로의 미소를 건넸다. 그리고 손에 든 호각을 육장봉에게 건넸다.

“무슨 일이 있었소?”

육장봉은 월령안의 손바닥에 놓인 호각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차츰 어두워졌다.

월령안은 인사치레의 미소를 떠올렸다.

“제가 군영을 나가야 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대장군께서 편의를 봐주셨으면 합니다.”

“이것 때문에 호각을 불었소?”

육장봉은 이를 갈며 월령안을 노려보았다.

“전 지금 곤란에 빠졌거든요. 왜요? 이럴 때 대장군의 호각을 쓰면 안 되나요?”

월령안은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육장봉이 대답하기 전에 육십이가 급급히 말했다.

“월 누님, 호각은 육가군을 불러 모으는 데 쓰는 거예요. 저희는 누님이 무슨 위험에 처한 줄 알았어요. 방금 저희는 놀라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다음번에는 이렇게 놀라게 하지 마세요. 저희가 담이 작거든요.”

그가 오는 내내 숨이 멎을 정도로 뛴 건 하늘만이 알리라. 그런데 웬걸, 월 낭자는 무사했다. 다만 군영을 나가려는 것뿐이었다.

‘이건 장난이 너무 심하잖아!’

“어……. 그럼 돌려드릴게요. 다음부터는 쓰지 않게요.”

월령안은 손에 든 호각을 육십이에게 던져 주었다. 그와 동시에 허리에 달려 있던 주머니도 끌러내서 함께 던졌다.

“여기 한 개 더 있어요. 함께 돌려드릴게요. 다음에는 놀랄 일이 없을 거예요.”

‘월령안이 호각을 두 개나 가지고 있다니? 육씨 가문의 호각이 언제부터 이렇게 싸구려가 됐지?’

최일은 육장봉과 월령안을 번갈아 살펴보다가 말없이 한 걸음 물러났다. 자신은 정신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월 누님,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육십이는 허겁지겁 호각을 건네받았지만, 당장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육장봉의 얼굴에는 서릿발이 섰다.

“월령안, 적당히 하시오.”

“대장군, 저는 진심입니다.”

월령안은 웃음을 거두고 엄숙하게 말했다.

“호각 두 개로도 저는 군영에서 나갈 수 없나요?”

“군영에 있는 게 당신에게는 가장 안전하오.”

그가 성안에 없는 동안, 장씨 가문과 소씨 가문이 얼마나 미친 짓거리를 할지는 아무도 몰랐다.

‘월령안은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미움을 샀는지 모르는 건가?’

“안전요? 북요인이 있는데 제가 안전할 수 있겠어요?”

월령안은 비아냥거리며 웃었다.

“대장군, 대장군의 부하들은 단속할 수 있겠지만, 북요의 병사들까지 단속할 수 있나요? 제가 군영에 있다가 북요인의 손에 붙잡히면…… 그들이 저를 어떻게 대할까요?”

월령안은 곧 자문자답했다.

“짐작할 필요도 없죠. 대장군도 변방에 계셨으니 북요인에게 능욕당한 주나라의 여인들을 많이 보셨을 테니까요. 대장군은 그동안 북요인에게 유린당한 여인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거기에 한 명을 더 보태고 싶은 건가요?”

“당신,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만족하겠소?”

육장봉은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불끈 솟았다.

“대장군, 노여움을 푸세요. 대장군을 화나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전 그냥 사실대로 말하는 것뿐이에요. 대장군께서 기어이 저를 여기 남기시려는데, 그럼 그만한 확신이 있나요? 제가 군영에 머물러 있으면 당신이 반드시 저를 보호할 수 있다고요? 당신이 보호하고자 하는 모든 이를 지켜 낼 수 있다고요?

어떤 실수도 없을 거라고, 당신이 평생 후회할 뜻밖의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약속할 수 있나요?”

월령안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모두 속뜻이 있었다. 남들은 그녀의 암시를 모를 수도 있지만, 육장봉은 알아 들었을 것이라고 그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육장봉은 일찍이 현음 장공주가 능욕당하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아직도 그는 현음 장공주를 주나라로 데려오지 못했다.

월령안은 현음 장공주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지만, 모든 말은 현음 장공주를 암시하고 있었다.

육장봉의 눈에서 사라졌던 핏빛이 또다시 눈을 뒤덮었다.

“월, 령, 안!”

지금 육장봉이 잇새로 뱉어내다시피 한 세 글자로, 그가 지금 얼마나 분노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육십이는 흠칫하고는 연신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월령안은 조금도 겁내지 않았다. 냉담한 표정으로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대장군, 저는 누군가가 영웅이라는 명성을 이룩하는 데 쓰이는 희생양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영웅이 되고 싶다면 스스로 영웅이 되세요……. 저를 이용하지 마시고, 저를 희생시키지도 마세요.

저 월령안은 이기적이고, 이익밖에 눈에 뵈는 게 없고, 인정 따위는 없는 장사꾼입니다. 저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희생하고 싶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대장군, 저를 보내 주십시오.”

“당신은 군영에 있으면 내가 당신을 지킬 수 없다고 그렇게까지 생각하는 거요? 군영을 떠나야만 안전하다고?”

육장봉은 손을 뒤로 돌려 뒷짐을 졌다. 여전히 꽉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내렸다.

“전 몰라요. 전 저 자신 말고는 아무도 믿지 않거든요.”

월령안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어젯밤 그 일이 가장 좋은 예시가 아니던가요?”

“어젯밤은…….”

“대장군, 우리 터놓고 이야기해요. 저를 보내 주실 건가요, 안 보내 주실 건가요?”

월령안은 장사꾼다운 말솜씨로 노골적으로 말했다.

“대장군께서 저를 보내 주시지 않는다면, 일단 듣기 거북한 소리부터 해야겠네요. 먼저 제가 북요인에게 능욕당하면, 그땐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 만약 대장군의 보상이 제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면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대장군은 원래 일이 저질러진 다음에 보상하는 게 특기잖아요.”

월령안은 숨도 고르지 않고 재빨리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제가 북요인에게 학대받아 죽는다면 보상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희 가문에는 다른 사람이 없거든요. 저 혼자라서 제가 죽으면 그만이에요. 대장군, 나중에는 당신이 제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북요로 출정할 수 있겠네요. 그래서 다시 한번 대영웅이 되면 참 좋은 명분이 되겠네요.”

“……가시오!”

육장봉은 월령안의 입에서 사람의 가슴을 찌르는 말을 이처럼 많이 쏟아져 나올 줄은 미처 몰랐다.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가장 예리한 칼, 가장 독한 독침 같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뼈를 긁고 피를 쏟게 했다. 아파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월령안이 이렇게까지 모질게 나올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감사합니다, 대장군. 나중에 뵙지요.”

월령안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육장봉에게 공수하여 읍을 하더니, 뒤돌아서 깔끔하게 떠나 버렸다.

최일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아무 미련도 없이 떠나가는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 넋을 잃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나는 이제야 겨우 월령안을 제대로 알게 된 모양이군. 아니지. 어쩌면 이게 진정한 월령안인가? 무슨 일이든 깔끔히 털어버릴 수 있는 사람.’

그는 다시 육장봉을 돌아보았다. 그의 두 눈은 붉어져 있었고, 온몸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참아낼 수밖에 없다는 모습이었다.

최일은 마음속으로 월령안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육장봉을 저렇게까지 화나게 만들고서도 무사히 물러설 수 있다니. 월령안이야말로 진정한 거물이었다.

‘정말 감탄스럽군! 어쩐지 월령안이 하찮다는 듯이 ‘고작 남자 하나일 뿐’이라고 하더니.’

지금의 월령안에게 육장봉은 그녀의 말대로 고작 남자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그녀에게 마구 이용당하는 남자일 뿐이었다.

‘한을 품은 여자란 참으로 독하군!’

최일은 육장봉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내면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저으며 육이, 육삼에게 한마디 했다.

“당신네 대장군을 잘 모시게.”

그는 곧장 월령안을 뒤쫓아갔다.

육이, 육삼을 비롯한 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려 했으나,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묵묵히 육장봉의 뒤에 섰다. 그리고 가능한 한 숨을 적게 쉬어 자신의 존재감을 죽이려고 했다.

육십이는 손에 호각 두 개를 들고 있었다. 검고 수척한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월령안이 마차에 올라타는 뒷모습을 억울하게 바라보았다. 눈 속의 갈망이 곧 실제로 변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용기가 나지 않아 입을 열지 못했다. 월령안이 멀어지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는 너무 난처하기만 했다.

육장봉의 뒷짐을 진 손에서는 피가 계속 흘렀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귀띔해 주지 못했다.

그는 그 모습 그대로 제자리에 서서 월령안이 점점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탄 마차가 보이지 않자, 뒤돌아서며 말했다.

“가자.”

그 한마디는 아무 기복도 없이 너무 차분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명령인 듯했다.

정작 육이나 육십이나, 다들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장군은 차분할수록 무섭게 폭발했다.

바로 아까처럼, 장군이 막사에서 나왔을 때 누구도 그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장군은 북요의 주둔지로 달려가서 북요의 상장군과 대황자를 한바탕 두들겨 팼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다른 나라의 사신을 두들겨 패다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육이는 맥없이 고개를 푹 떨군 육십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속으로 몰래 탄식하다가 결국 똑같이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잠시 후에 북요와 소통할 생각을 하니 죽고만 싶었다.

* * *

최일은 두 대의 마차를 몰고 왔다. 그러나 월령안이 마차에 오르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녀와 같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속도가 느린 편은 아니라, 군영을 볼 수 있는 범위에서 빠르게 벗어났다.

최일은 차창을 열고 내다보았다. 육장봉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닫은 최일은 마차에 기대어 눈을 감고 휴식하는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이렇게 여러 번을 반복하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히던 월령안이 결국 참지 못했다. 그녀는 눈을 뜨고는 화가 나서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여인처럼 우물쭈물하지 마시고요.”

최일은 잠시 말문이 막혀 한참이 지나서야 대꾸했다.

“여인처럼이라니 무슨 소리예요? 당신은 여인이 아닌가요?”

월령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저는 가식적이고, 우물쭈물하고, 도리를 따지지 않아요. 소인배처럼 상대하기 힘들죠.”

월령안이 먼저 말을 다 해 버리자, 최일은 일시 할 말이 없었다. 그저 탄식하고는 한마디 했다.

“당신이 오늘…… 육장봉을 자극한 게 조금 지나쳤어요.”

“제가 현음 장공주를 암시한 것 말인가요?”

월령안은 냉소했다.

“현음 장공주는 좋은 분이에요. 그분을 가지고 육장봉을 자극하지는 말아야 했습니다.”

최일은 드물게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월령안도 그의 분위기에 맞춰 똑바로 앉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제가 상인인 줄은 알고 계시죠?”

“내 말은…….”

“똑같은 일이에요.”

월령안은 최일의 말을 끊어 버렸다.

“전 상인이니까, 담판하는 자리에서 상대를 일격에 무너뜨릴 수 있다면 절대 두 번에 나누어서 하지는 않아요. 현음 장공주는 육장봉의 유일한 약점이자, 돌파구예요. 현음 장공주만이 육장봉이 상처를 받고, 몸가짐을 흐트러트리게 하고, 이성을 잃게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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