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0화 좀 써먹으면 어때서요?
월령안은 일어서서 최일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비켜 달라는 뜻이었다.
최일은 잠깐 주저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말없이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월령안은 입술을 다물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최일도 더는 버티지 않고 월령안의 뒤로 물러났다.
월령안이 앞으로 나가더니 육장봉에게 읍을 했다.
“대장군, 여쭙고 싶습니다. 저를 군영에 남겨 어쩌시려고 합니까?”
“여기 남기 싫단 말이오?”
육장봉이 되물었다.
“대장군, 여긴 군영입니다. 군영에 머무를 수 있는 여자는 딱 한 부류죠. 대장군께서는 저를 무슨 신분으로 군영에 머물게 하려 하십니까?”
월령안은 질문했지만, 육장봉에게 대답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군대 기녀로 삼으실 생각입니까?”
“월령안!”
육장봉은 월령안의 말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건가? 내 속을 긁지 않으면 속이 안 풀린다는 건가?’
“군영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 여인이 군대 기녀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대장군께서는 높이 계시는 분이라 아무렇게나 한마디 하시면 그만이겠지만요. 저는 그 때문에 얼마나 큰 압박을 이겨 내야 하고, 또 얼마나 큰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는 모르실 겁니다.”
월령안은 자신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육장봉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속으로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이 남자는 영영 사람을 존중하는 법을 모를 거야.’
“누가 감히 당신에게 그렇게 말한단 거요?”
육장봉이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제가 방금 들어올 때, 북요인을 만났습니다. 대장군, 그들이 제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아세요?”
월령안은 비웃음이 어린 얼굴로 활짝 웃었다.
“하룻밤에 얼마면 되겠냐고 묻더군요.”
월령안은 여기 들어올 때 소식을 염탐하러 온 북요 병사들과 마주쳤다.
북요 병사들은 육장봉에게 괴롭힘을 당했으나 감히 육장봉에게는 분풀이를 하지 못했다. 대신 월령안을 보자, 거리낌 없이 모욕한 참이었다.
육이가 제때 막기는 했지만, 그들이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월령안을 바라보던 육장봉의 두 눈이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벌게졌다.
최일은 깜짝 놀랐다. 월령안의 앞을 막아 나서야 하는 건 아닌가 망설일 때였다.
육장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음산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펄럭!
막사의 가림막이 육장봉에 손에 높이 젖혔다가 다시 세차게 떨어지면서 커다란 소리를 냈다.
“대장군!”
육이가 깜짝 놀라며 급히 앞으로 다가갔지만, 육장봉에게 확 밀쳐졌다.
육이는 휘청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가까스로 몸을 가누었다. 다시 재빨리 따라붙으며 불안하게 외쳤다.
“대장군?”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육장봉의 싸늘하고 엄숙한 뒷모습뿐이었다.
‘대장군께서 왜 저러시지?’
육이는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몰랐다. 그는 불안한 나머지 보초병을 불러 육삼, 육사를 불러오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육장봉이 자제력을 잃을까 두려워 그의 뒤를 따라갔다.
육장봉은 곧장 북요 주둔지로 걸어갔다. 살기등등한 모습에, 누구도 감히 막지 못했다.
월령안은 막사 앞에 서서 점점 멀어지는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말했다.
“우리도 인제 그만 가죠. 그는 저를 잡을 수 없어요.”
“당신 설마…….”
최일은 의심의 눈초리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월령안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원스럽게 인정했다.
“령안, 저 사람은 무려 육장봉이라고요.”
최일는 저도 모르게 한껏 숨을 들이마셨다.
‘육장봉을 저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당신 간이 너무 큰 거 아녜요?’
“그래서요?”
월령안이 고개를 틀어 최일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휘두른다 해도 지금처럼 대놓고 육장봉을 휘두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스스로 처리해서, 육장봉을 난처하게 하지도, 그에게 폐를 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전이라…….”
월령안은 코웃음을 치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예전에는 그 사람을 마음에 담고 있었으니까요. 당연히 아까워서 이런 데 쓸 수가 없죠. 하지만 지금은 고작 남자 하나일 뿐이에요. 제가 좀 써먹으면 어때서요?”
최일은 그녀의 모습에 탄식하고 말았다.
“령안, 완전히 포기한 거예요?”
“모르겠어요.”
월령안은 최일뿐만 아니라 자신도 속이지 않았다. 바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최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또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해요. 전 이제 더는 그 사람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을 거예요.”
이제 더는 예전처럼 육장봉을 마음에 담아 두지도, 모든 일에서 그를 우선으로 하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의 육장봉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육장봉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건 괜찮았다. 서로 헤어져서 각자의 삶을 살면 되었다.
그런데 육장봉이 그녀를 좋아했다. 그렇다면 그녀가 어떤 짓을 해도 탓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떤 기대도 없다고요?”
‘이건 마음을 내려놓는 것보다 더 심각한데.’
“당신은…… 제가 그래도 저 사람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저 남자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요?”
월령안은 냉소하며 되물었다.
최일은 또 한 번 탄식했다.
“어젯밤 일은 사실 육 대장군을 나무랄 수 없죠. 그 순간에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이라 해도 다 마찬가지였을 거고요. 대장군의 잘못이 아닙니다.”
“아뇨! 저는 기꺼이 그 사람 탓으로 돌리겠어요. 왜요? 그러면 안 되나요?”
월령안은 고운 눈에 노기를 띠고 오만하게 말했다.
최일은 잠깐 멍해졌다가 웃고 말았다.
“그래요. 제가 잘못했네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여자에게 이치를 따진 내 잘못이지.’
월령안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내쉬더니 힘없이 말했다.
“이제 돌아가요.”
“괜찮아요?”
최일은 얼굴의 미소를 순식간에 거두었다.
“멀쩡하거든요.”
월령안은 등을 곧게 펴고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가벼운 발걸음에서는 슬픔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에게는 남의 동정이 필요 없었다. 그저 남이 그녀를 꺼리고, 두려워하기만을 바랐다.
최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괜한 걱정을 했네. 월령안이 강심장이 아니면 오늘까지 버틸 수가 없었지.”
최일은 빠른 걸음으로 월령안을 뒤따랐다.
황성사 사람은 그들 뒤쪽에 서 있었다. 그는 최일과 월령안의 대화를 듣고 한참이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두 사람이 그를 지나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뒤따라갔다.
월령안을 비롯한 세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육장봉은 북요인과 싸우고 있었다.
아니, 육장봉이 일방적으로 북요인을 두들겨 패고 있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육장봉 앞에 선 북요 병사는 완전히 고양이 앞의 쥐 신세였다.
월령안 일행 세 사람은 북요의 주둔지를 지나가다가 북요의 상장군 소영화가 급히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육 대장군, 이게 뭐 하자는 거요? 우리는 귀국에 주둔하면서 줄곧 귀국의 규칙을 준수하고 있었소. 왜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리는 것이오?”
“이유? 내가 네놈들을 때리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한가?”
육장봉은 앞으로 나아가더니 한 북요 병사의 얼굴을 짓밟았다. 그자는 아파서 비명을 질러댔다.
소영화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육장봉! 오늘 제대로 해명하지 않으면, 우리 북요는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요.”
“해명? 지금 하지.”
육장봉이 갑자기 돌려차기로 소영화를 한 방에 날려 버렸다.
“악!”
소영화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땅바닥에 세차게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유, 육…… 육장봉!”
소영화는 가까스로 고개를 쳐들고, 분노에 찬 눈으로 육장봉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육장봉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당장 소영화가 거느리고 온 병사들을 하나하나 걷어차서 날려 버렸다.
북요 대황자와 신호는 진작 바깥의 기척을 들었다. 그러나 둘 다 건너오지 않고 소영화만 보냈다. 뜻밖에도 육장봉은 전혀 체면을 봐주지 않고, 단번에 소영화를 걷어차 날려 버렸다.
“육장봉, 저놈이 미쳤나?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것인가?”
대황자 야율융진은 격노하여 책상을 후려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신호는 눈을 감았다. 그를 설득하지도, 직접 움직이지도 않았다.
“육장봉, 여긴 북요의 군영이다. 우리 북요의 군영에서 북요의 병사들을 때려눕히다니. 도대체 뭐 하자는 건가?”
야율융진은 육장봉이 북요 병사들을 모래주머니처럼 두들겨 대자 크게 노했다. 바로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시위의 칼을 뽑아 육장봉에게 휘둘렀다.
“대황자, 말조심하시오. 당신이 발을 딛고 있는 이곳은 주나라의 땅이오.”
육장봉은 몸을 옆으로 비킴과 동시에 발끝으로 땅 위에 떨어진 큰 칼을 밟았다. 큰 칼이 힘을 받아 튕겨 오르더니 바로 육장봉의 손에 떨어졌다.
육장봉은 칼을 쥐고 야율융진에게 휘둘렀다.
“대황자가 수하를 잘 다스리지 못했으니, 내가 대신 다스릴 수밖에.”
“뭐? 무슨 일이 있었지?”
야율융진이 재차 칼을 휘두르자, 육장봉이 칼을 들어서 막았다.
챙!
두 칼날이 맞부딪쳤다. 서로 맞닿은 부분이 그대로 우그러들었다.
두 사람은 갑자기 손을 거두었다. 야율융진은 두 걸음, 육장봉은 반걸음 물러났다.
육장봉은 야율융진을 외면한 채 재차 칼을 휘둘렀다.
야율융진은 화가 나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육장봉, 내가 부하들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고 하는데, 좀 똑똑히 얘기하게. 어떻게 잘못 다스렸단 말인가?”
“필요 없소. 내가 대신 다스릴 테니까.”
육장봉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단칼에 야율융진을 물러서게 하더니, 계속 칼을 휘둘러 그가 연신 뒷걸음질 치게 만들었다.
월령안은 근처에 서서 그 광경을 잠깐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군영 밖으로 걸어갔다.
최일은 육장봉을 한 번 바라본 다음, 멀어져 간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으로는 묵묵히 육 대장군을 위해 기도하면서 월령안을 뒤쫓아갔다.
최일과 함께 온 호위는 군영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일단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는 점이다.
세 사람이 군영 입구에 다다르자, 입구를 지키던 보초병이 예외 없이 막아섰다.
“대장군의 명령입니다. 그분의 명령이 없으면 아무도 군영을 드나들 수 없습니다.”
“나는…….”
삐삑―.
최일이 보초병과 교섭하려던 순간, 월령안이 목에 건 호각을 끌러서 불었다.
최일은 육가군의 호각을 본 적이 있었다.
호각이 울리는 순간, 최일은 멍해졌다. 그는 의아한 눈으로 월령안을 바라보았다.
“설마 육가군의 호각인가요?”
“네.”
월령안은 두 번 불더니 멈추었다.
“그걸…… 이렇게 쓴다고요?”
소문에 따르면 저 호각은 육씨 가문의 친위대를 불러 모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월령안은 그걸 너무 쉽게 써 버렸다.
“이렇게 안 쓰면요? 그럼 어떻게 써야 하나요?”
월령안이 되물었다.
“위험한 일을 당했을 때 쓰는 게 아닌가요?”
‘전혀 위험하지 않은데 왜 호각을 쓰지? 월령안은 자기가 귀한 걸 마구 낭비했다는 걸 알기는 할까?’
“곤경에 빠졌잖아요. 쓰면 안 돼요? 호각이 제 손에 있으니 제 마음이죠. 쓰고 싶을 때 쓰는 거예요.”
월령안은 수중의 호각을 아래위로 던지며 가지고 놀았다. 자기 손의 호각을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모습이었다.
최일은 잠시 멍하게 있다가 실소하고 말았다.
“그러게요. 제가 겉모습에만 집착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