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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황 (449)화 (449/1,004)

449화 억지는 그만 부리시고

육이는 입꼬리를 실룩거리더니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걸 누가 알아.”

“그럼 대장군과 월 낭자에게 가능성이 있을까요?”

육삼은 어쩔 줄을 몰라서 했다. 고개를 들어 근처에 있는 지휘 막사를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군이 간밤에 월 낭자를 데리고 ‘사랑의 언덕’에 갔으니 그럴지도 모르지.”

육이는 묵묵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마음속에는 이미 희망이 사라진 뒤였다.

육삼은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하마터면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할 뻔했다.

“사랑의 언덕? 대장군께서 설마 군대 안에 도는 소문을 믿는 건 아니겠죠?”

육일은 허허, 웃고 말았다.

육삼은 말문이 막혔다.

‘설마 우리 장군께서 그렇게 단순하시진 않겠지?

정말로 아무 생각 없는 병사들의 헛소리를 곧이듣고, 그 작은 둔덕을 사랑의 언덕,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곳이라고 여긴 건 아니겠지?’

육삼이 조그만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장군이 월 낭자에게 사랑의 언덕이라는 이름은 말했을까요?”

“어떨 것 같냐? 우리 장군이 어떤 분인데?”

육이가 되물었다.

“십중팔구는 말하지 않겠죠.”

육삼은 탄식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야겠어요. 제가 ‘사랑의 언덕’이라고 쓴 간판을 가져다 놔야겠어요. 그리고 매년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거기서 만난다는 이야기도 적어 넣어야겠어요.”

육이는 잠깐 생각하더니 동의했다.

“좋은 생각이야.”

그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장군은 군대 안에서 떠도는 소문을 곧이듣고 월 낭자를 그 언덕으로 데리고 간 게 분명했다.

‘하필 그 언덕에…….’

그 작은 언덕이 사랑의 언덕,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곳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있었던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그 언덕은 조금 높긴 하지만, 매우 높지는 않았다. 평범한 남자라면 체력이 유난히 처지지 않는다면 쉽게 오를 만했다. 여자는 다소 힘이 들 수도 있었다.

매년 봄과 가을이 되면 그 언덕을 오르는 연인들이 그렇게 많았다. 일반적으로 절반쯤 오르다가 남자가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여자를 이끌고 산에 오르고는 했다.

그러자 군대의 어느 병사가 그걸 보고 장난삼아 ‘사랑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다 보니 이 이름이 군대 안에 퍼졌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은 군대 안에서만 부르는 것일 뿐, 외부 사람들은 전혀 몰랐다. 월 낭자도 모를 게 분명했다.

육삼은 손불사의 심부름을 그만 잊어버렸다. 당장 그 언덕에 놓을 간판에 이름과 이야기를 쓰러 갔다.

육이는 육삼이 멀리 가고 나서야, 그가 무엇을 하러 왔는지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몰라. 중요한 일이 있으면 다시 돌아오겠지.”

* * *

육이는 계속 막사 밖에 있으면서 아무도 막사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북요에서 몇 번이고 사람을 보내 염탐했지만, 육이가 모두 돌려보냈다.

한편 막사 안. 황성사 사람은 육장봉, 월령안, 최일과 양쪽으로 갈라져 앉았다.

최일은 대수롭지 않게 의자를 월령안 옆자리에 끌어다 놓았다. 그리고 협상하고 있는 육장봉과 황성사 사람을 무시한 채, 목소리를 낮추어 월령안과 귓속말을 했다.

육장봉은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 황성사 사람과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귓전에는 가끔 최일과 월령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듣게 되자, 그의 얼굴빛은 금세 어두워졌다.

육장봉은 이미 황성사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듣고 있을 심정이 아니었다. 최일과 월령안에게 자신이 엿듣는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황성사의 사람을 차가운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상대방은 식은땀을 흘리다 못해 다시 요구를 낮추었다.

“대장군, 월 낭자는 우리 황성사의 용의자입니다. 어제는 특수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월 낭자를 보내드렸습니다. 제가 듣기로 육 소장군은 이제 위험에서 벗어났다더군요. 저희는 반드시 월 낭자를 데리고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안 되면, 오후에는 안 되겠습니까? 정 안 되면 성문을 닫기 직전에는 어떻습니까?”

황성사 사람은 말을 마쳤다. 그런데도 육장봉이 그를 바라만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가만히 식은땀을 훔치며 이를 악물었다.

“성문이 닫히기 전까지도 안 된다면, 그럼…….”

“안 돼!”

육장봉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냉담한 목소리에는 아무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황성사 사람은 깜짝 놀라서 흠칫했다. 그가 막 변명하려고 할 때였다.

육장봉은 고개를 돌려 최일을 바라보았다. 온몸에서는 음침한 한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나는 동의하지 않겠다. 최일, 월령안에게 바람 넣지 말게.”

황성사 사람은 어안이벙벙했다.

‘내가 이렇게 놀랐는데, 육 대장군은 지금 내게 말한 게 아니었다고? 육 대장군, 저를 좀 보시겠어요? 방금 저한테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혹 사람을 잘못 본 거 아닌가요?’

황성사 사람은 그 자리에 서서 앉지도 서지도 못했다.

‘나보고 어쩌라고!’

황성사 사람뿐만 아니라 월령안과 최일도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일제히 육장봉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지목당한 최일은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연회일 뿐입니다. 대장군, 걱정이 많으시군요.”

“내가 생각이 많은 건가, 아니면 자네가 다른 마음을 품은 건가?”

육장봉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최씨 가문의 설개연(雪個宴)은 최씨 가문의 미혼 남성들이 신붓감을 고르는 연회가 아닌가. 월령안을 초대한 건 무슨 속셈이지? 월령안을 최씨 가문 자제들이 임의로 고르고 평가할 대상으로 만들 셈인가?”

“대장군, 최씨 가문 설개연에 대해 무언가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요.”

최일은 웃으며 해명했다.

“최씨 가문의 설개연에서는 품성이 출중하고, 재주가 넘치는 여인들만 초청합니다. 령안이 설개연에 참석하면 이득이 있을 겁니다.”

최소한 다른 사람들도 최씨 가문에서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제가 령안을 초청하는 건, 최씨 가문의 자제가 선보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최일은 육장봉의 어두운 얼굴을 무시했다. 미소도 변하지 않았다.

“매년 설개연은 최원(崔園)에서 열었습니다. 올해는 어머니께서 장소를 바꾸고 싶다고 하셔서요. 낙원은 이미 령안의 명의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어머니께서는 낙원을 빌려 설개연을 열려고 하십니다. 그럼 령안을 초대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월령안은 참가하지 않을 거다.”

육장봉은 최일의 해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바로 딱 잘라 과감하게 거절했다.

최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대장군, 령안은 이미 동의했어요. 거절이 좀 늦었군요.”

“절대 늦은 게 아니네.”

육장봉은 월령안을 바라보며 말속에 말을 담아 말했다.

“월령안. 내 말이 맞지 않나?”

월령안은 방그레 웃었다. 그저 육장봉의 암시를 알아듣지 못한 척 웃으며 말했다.

“대장군, 상인은 신용을 중요시합니다. 전 이미 승낙했습니다.”

“당신에게 그럴 시간이 어딨소? 잊지 마시오. 당신은 아직도 황성사의 용의자요.”

육장봉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그건 맞는 말 같군요. 최 대인……. 이 일은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아무튼 당장 급한 일도 아니잖아요.”

월령안이 고개를 돌려 육장봉에게 뒤통수를 보이고는 최일에게 눈을 깜빡였다.

최일도 협조했다.

“그렇군요. 저는 낙원만 빌릴 수 있다면 됩니다. 다른 건 상관없습니다.”

월령안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성에 돌아가는 대로 빌려 드릴게요. 지금 낙원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연회를 열려면 미리 준비해야 할 거예요.”

“그럼 이만 성으로 돌아갈까요? 마침 당신과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신 저택의 화재 사건 말이에요. 소씨 가문에서 용의자를 지목했어요.”

최일은 여기까지 말하자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월씨 저택 방화 사건 때문에 소씨 가문을 조사한다고 해도 소 승상까지 조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소 승상이 당연하다는 듯이 하인을 내세워 죄를 떠밀어 버렸다.

최일은 갑갑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찾아가기도 전에 소씨 가문에서는 범인을 순천부에 데려다 놓았다. 그에게 순천부에서 하는 모든 일을 소씨 가문에서 똑똑히 알고 있으며, 전혀 겁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게 분명했다.

“전 성으로 돌아가면 황성사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황성사 쪽에서…….”

월령안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성에 돌아가면…… 나머지는 내게 맡기세요.”

최일은 월령안에게 위로의 눈길을 보냈다.

그가 직접 몸을 움직여 성 밖으로 사람을 데리러 왔으니, 그 대가는 절대 싸지 않았다. 조계안도 그의 체면은 어느 정도 봐 줄 것이다.

“좋아요.”

월령안이 잠깐 생각을 더듬더니 곧 깨달았다. 지금쯤 성안은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육장봉은 월령안이 그를 한쪽에 내버려 두고 최일만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가 점점 더 강해졌다.

그는 지금 월령안의 행동이 어딘가 매우 이상함을 직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디가 잘못되었다고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월령안은 그를 예전처럼 공손하게 대했다. 어제저녁의 일 때문에 언짢음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건 아니야.’

구체적으로 어느 부분이 잘못된 건지는 몰랐다. 하지만 느낌이 안 좋았다.

“대장군…….”

육장봉이 멍하니 있자, 최일이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육장봉은 정신을 차리고 그를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최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점잖게 일어나 육장봉에게 읍을 했다.

“대장군, 폐하께서는 여전히 혼수상태입니다. 모든 어의가 속수무책이라, 령안의 집에 머무는 손 신의를 입궁하게 해서 폐하를 치료해야 할 것 같습니다. 대장군, 폐하의 옥체와 관련된 일입니다. 대장군께서는 억지는 그만 부리시고, 대국을 중시하십시오.”

최일은 일부러 ‘억지는 그만 부리시고’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얼굴에는 악의 없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 말은 그냥 내뱉은 것일 뿐, 다른 의미라고는 없는 듯싶었다.

그러나 육장봉과 월령안 둘 다 잘 알았다. 최일은 그냥 내뱉은 것이 아니었다.

바로 어젯밤, 육장봉은 월령안이 육비우를 구할 수 있는 약을 내놓지 않았다며 ‘억지는 그만 부리라’고 질책했다. 오늘 최일이 그 말을 육장봉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는 건, 월령안을 대신해 화풀이하는 게 분명했다.

“최 대인은 여기저기 손을 안 뻗치는 데가 없군.”

육장봉은 냉소했다.

“대장군,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제가 여기저기 손을 뻗쳐 본들 닿는 곳이라야…… 기껏해야 여기까지니, 이 정도밖에 지키지 못합니다.”

최일은 손을 내밀더니 월령안을 등 뒤로 숨겼다.

“대장군, 시간이 늦었습니다. 북요인이 출발하라고 재촉하고 있을 겁니다. 저희도 장군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대장군께서는 배웅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떻게 나가면 되는지 압니다.”

“폐하께서는 정말 편찮으신가?”

육장봉은 최일의 속뜻이 담긴 말을 외면했다. 대신 냉담하게 질문했다.

최일은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말했다.

“온 변경 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궁문은 지금도 봉해져 있어, 아무도 드나들 수 없습니다. 소인은 성안 백성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육 대장군께서는 대국을 중시하시어 령안과 손 신의가 저와 함께 성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폐하께서 손 신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의를 가지고 사람을 협박하는 거? 당신 육장봉이 할 줄 아는 건 나 최일도 할 줄 알거든?’

육장봉은 최일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탁자를 힘껏 내리치며 말했다.

“월령안, 가서 손 신의에게 최 대인을 따라 입궁하라고 전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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